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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nergist Nov 16. 2018

스물여덟, 워킹홀리데이를 마음먹다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맞아요.

 갑자기 뉴질랜드? 


일생에 한 번은 가 보고 싶었던 워킹홀리데이, 지원 제한 나이인 서른을 넘겨서 그 기회를 잃고 나면 후회를 할 게 분명했다. 물론 이후에 어학연수나 대학원 유학도 가능한 일이지만 아직까지는 공부에 대한 뜻이 없었고, 놀면서 여행하는 것도 좋지만 한 나라에서 일정 기간 이상 체류하면서 문화를 체험하고 새로운 것들을 경험할 수 있는 워킹홀리데이가 나에게는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직장도 그만두고 뭘 해야 할까 고민하던 와중에, 미루고만 있던 워킹홀리데이에 도전하기로 했다. 


일단 영어권 국가들로 선택지를 정리하고 상반기부터 차례로 지원했는데, 정작 가고 싶었던 영국과 아일랜드는 추첨에서 똑 떨어지고 마음의 상처를... 크흑. 시험 점수나 순서를 정하는 것에 익숙한 나는, 차라리 내가 시험을 봐서 떨어진 거라면 깔끔하게 나의 실력을 인정하고 마음을 접겠는데 무작위 추첨이라 온전히 나의 운에 맡긴다는 것이 너무 희망고문처럼 느껴졌다. 그러다가 대학시절 수강신청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온라인 선착순 모집’ 뉴질랜드 워홀 신청 날짜가 다가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모두 서버 마비로 흰색 창을 보고 있던 시각에 사파리+크롬+모바일로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된 것처럼 착착 넘어가는 신청 페이지에 208불을 결제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뉴질랜드????


누구에게는 정말 간절한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였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얼떨결에 당첨된 복권 같은 이번 기회가 사실은 너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 감정은 곧 내가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남반구, 언젠가 여행이라도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뉴질랜드를 이렇게 좋은 기회를 통해 갈 수 있다는 기쁨으로 변해 하루 종일 내 주변을 맴돌았다.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한겨울의 내 생일을 맞아볼 수 있다니.



 나는 목표가 중요한 사람 


신체검사까지 마치고 비자가 발급돼 이제 떠나기만 하면 되는 상황에 놓이자, 문득 원론적인 생각을 하게 됐다. 나는 왜 떠나는 거지? 뭘 하고 살지? 후회하지 않을 1년을 보내기 위해 뭔가 목표가 될 만한 것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봤다. 나에게 중요한 것이 뭐지?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는 청년들의 대부분은 목표를 세 가지로 압축한다. 영어(외국어), 돈, 여행.
 
 나는 학교 때 정규수업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토익점수도 있고, 영국으로 어학연수(등골브레이킹) 도 짧게나마 다녀왔고, 잘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어서 해외 드라마든 영화든 영자막으로 계속 연습을 했기에, 영어에 대한 부담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어학연수도 꽤 오래전 이야기고 영어를 안 쓴 지 오래돼서 얼마나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이번 워킹홀리데이에서는 어학원의 과정은 건너뛰기로 했다. 언어를 배우는 것은 나에게 재미있고 즐거운 일이지만, 앞으로 크게 영어를 자주 사용하는 직종에 있을지는 미지수이므로 다른 것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최저 시급 만원을 외치는 우리나라와 달리 뉴질랜드는 최저 시급 $16.50으로 원화로 환산하면 약 12,000원, US달러 기준으로 전 세계 탑 4위를 기록하고 있다. 물론 물가의 차이가 있겠지만, 풀타임 잡으로 돈을 벌면 1년 동안 얼마든지 많이 모을 수 있는 시급이므로 잠시 고민했으나......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는데 통 쓸 시간이 없어 통장에 차곡차곡 모이던 지난 회사생활을 생각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 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어르신들 말마따나 저승에 이고 지고 갈 것도 아니니 나는 돈에 욕심을 많이 내지 않기로 했다.
 
 여행은 나에게 매우 중요하다. 그런 신조어가 생긴 지 의식하지도 못하고 급작스레 나에게 발병했던 대2병의 시기에 나는 난생처음으로 혼자 국내여행을 떠났었다. 집에 편지 하나 놔두고 휴대폰은 꺼둔 후 무기한으로 떠난다니 가족들은 내가 집을 나간 줄 알고 많이 걱정했었던 기억이 난다. 정동진-강릉-가평의 코스로 3박 4일 혼자 여행을 하면서 엄청나게 많은 고민거리들을 해결했고 앞으로 나갈 방향을 잡았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무언가에 막히면 훌쩍 여행을 떠난다. 아무래도 서울에 있는 카페에서 소음을 이어폰으로 겨우 차단한 채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노트에 To do list를 만드는 것보다는, 어딘가 조용한 곳으로 여행을 떠나 오솔길을 걸으며 고민거리를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정리하는 것이 나에게 더 잘 맞는 방법인 것 같다. 바로 그 시기였다. 워킹홀리데이가 끝나면 다시 일했던 분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진로를 찾을 것인가? 근 30년 살아온 나는 어떤 사람인가? 앞으로는 어떻게 살 것인가? 에 대한 고민들이 머릿속을 아주 꽉꽉 채우고 있어서, 뉴질랜드에 있는 1년 동안 여행하며 정리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였다.


 당시의 나는 천직일 거라 예상했었던 일을 하다 지쳐 그만둔 상태였다. 회사 시스템과 인간관계에 질려버렸고, 이게 과연 내가 원하던 일이 맞나 하며 때 늦은 진로 고민을 다시 붙잡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대학교 때부터 알바 과제 복수전공 그 밖의 활동 등으로 한 순간도 제대로 쉬지 못했고 졸업하자마자 바로 취업해서 나에게 휴식을 줄 시간도 없었다. 몸과 마음을 재정비할 필요성을 느껴 워킹홀리데이를 선택했던 거였다. 자연스럽게, 나에게 지금 중요한 키워드는 휴식, 여유로운 생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라고 압축됐다. 






 어떻게 살 것인가 


서울 출신이고 그 외의 곳에서는 살아본 적도 없는 나는, 한국 생활과 똑같이 도시에만 머무르면서 홀리데이를 이용해 여행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 한 몸 뉘일 따뜻한 ‘home sweet home’ 이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굉장한 안정감과 편안함을 가져다 주지만, 여기에서처럼 또 일에 얽매이며 휴가만을 기다리는 생활을 하고 싶지는 않아서.. 게다가 나는 모든 것에 쉽게 질리는 편이다. 취미도 손에 익기 시작하면 지겨워지고, 일도 익숙해지면 재미없고, 동네도 온갖 골목길을 다 지나다녀본 후엔 지루해진다. 그래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뉴질랜드에 대한 책을 먼저 샀다. 워킹홀리데이 관련 책들도 시중에 나와 있지만, 그건 그들의 삶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대신 여행책을 집어 들었다. 여행자들의 삶과 워홀러의 삶은 천양지차로 다르다. 누구에게는 넉넉한 예산이 있지만, 누구에게는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짧은 기간 동안 드넓은 대지를 빠르게 누비는 사람들과,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이동할 수 있는 사람들. 관광지에 집중된 책이기에 그저 기본 정보들만 얻으려고 빠르게 훑어봤는데, 건진 게 하나 있었다. ‘기후’. 나에게 기후는 매우 중요하다. 더위건 추위건 많이 타는 편이라, 한여름 한겨울에는 맥을 못 춘다. 기온으로만 따지면 여름에는 우리나라보다 선선하고 겨울에는 따뜻한데, 나라 전체가 온건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기후 분포도를 보면 무려 아홉 개의 특성(북섬 4, 남섬 5)로 나뉘는데, 기온은 비슷할지 모르지만 주변 지형의 영향을 받는지 습도나 비/눈의 여부 등으로 차이가 많이 난다. 선호하는 기후를 가진 지방 쪽에서 마음에 드는 도시들을 몇 개 추려냈다. 오클랜드, 웰링턴, 넬슨, 블레넘, 더니든, 퀸스타운. 그러다 보니 다 한 번쯤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여행에 관련된 에세이를 많이 읽은 편인데, 그중 하나가 <나는 떠났다 그리고 자유를 배웠다> 이다. 독일 여행부문 베스트셀러로, 한 작가가 TV 퀴즈쇼 상금을 가지고 세계 여러 나라의 한 도시에서 한 달씩 살아보며 자신에 대해 알아가고 인생에 대해 배우는 일기 혹은 편지 형식의 책이다. 여러 도시에서 살아보는 것, 못할 건 뭐야? 물론 나는 퀴즈쇼 상금이 없다. 마냥 놀면서 지낼 수는 없으니 일자리를 계속 옮겨야 할 테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다지 선호되지 않는 단기 알바를, 언어도 잘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어느 고용주가 좋다고 써 줄까? 고민을 한 아름 안고, 뉴질랜드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작게는 북섬 6개월, 남섬 6개월 단위로) 여행을 하며 일을 하는 워킹+홀리데이를 하자, 라는 생각을 해 봤다.


유튜브에서 뉴질랜드 여행에 대한 동영상들을 신나게 검색했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담은 여행 영상들을 보면서, 나도 곧 저기에 갈거야! 라는 생각으로 지겨운 출근 준비시간을 활기차게 바꾸려고 노력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한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나의 시청 기록을 기반으로 유튜브가 자연스레 추천 동영상에 띄워준 것이었다. <Female uni student saves 1,000 pounds a year on rent!> 영국에서 생활할 때도 렌트비가 제일 많이 나갔던 기억이 있어서 그걸 줄이는 비결이 뭔지 궁금했는데, 영상을 보니 캠핑카였다. 혼자만의 공간과 자유로운 이동이 한꺼번에 가능한 방법! 나에게는 정말 환상적인 조합이었고, 갓 대학생이 된 저 여성(약한 존재로 지칭하고 싶지는 않지만)도 스스로 만들어서 타고 다니는데 나라고 못할 건 뭐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캠핑카(뉴질랜드에서는 흔히 캠퍼밴이라고 부른다고 함)에 대한 유튜브 동영상, 해외 블로그, e-book 등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가 몇 가지 있었다. 

 
 첫째로 운전. 면허를 따고 차를 몬 지는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매일 운전하는 것이 아니다 보니 아직도 미숙한 면이 있다. 그런 내가 과연 반대쪽 좌석에서 반대쪽 차선으로 운전해도 안전할까?
 둘째로 공간. 만약 저렴한 중고 밴을 사서 캠퍼밴으로 리모델링한다면, 그 작업공간과 도구들이 필요할 것이다. 며칠 길게는 몇 주 몇 달까지 뚝딱거릴지도 모르는데, 도움 없이도 어디서 어떻게든 할 수 있을까?
 셋째로 위생. 결벽증까지는 아니더라도 청결에 항상 신경 쓰는 엄마의 영향으로 나도 위생에 굉장히 민감한데, 빨래나 샤워가 (지금처럼 자주) 여의치 않은 캠퍼밴 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해보겠어, JTBC 예능 <비긴 어게인>을 보면서 다시 얻은 깨달음이다. 무조건 안 되는 것이란 없다. 어떻게든 상황에 맞춰 변화할 수 있는 법. 뉴질랜드는 드넓은 자연 덕분에 캠핑을 즐기는 사람이 많고, 홀리데이파크도 잘 되어있는 편이라고 했다. 무엇보다도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면 방범창이나 옆집으로 가려진 아침이 아니라, 어제는 파도가 철썩이는 바닷가에서 오늘은 푸르른 잔디밭 위에서 기지개를 켤 수 있는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꿔 봤다. 그래서 커다란 고민을 또 한아름 안고, 캠퍼밴도 리스트에 올리기로 했다.


시간만 나면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로 구글링을 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이런 것도 있구나, 하고 스크롤을 내렸던 것이 갑자기 머리에 스치기에 기억을 더듬어 다시 링크에 접속했다. WWOF. Willing Workers on Organic Farm의 줄임말이다. 친환경 농장에서 하루에 일정 시간 이상 일을 도와주는 우퍼가 되면, 호스트는 대가로 숙식을 제공해준다. 호스트에 따라 다르지만 간단한 집안일을 도와주거나, 창고정리를 해 준다거나, 진짜 농장일을 경험해 볼 수도 있다. 일정기간 한 집에서 살을 맞대고 살아야 하다 보니 호스트도 우퍼도 서로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 같다. 방 한 칸을 내어 주고 식사만을 함께 하는 홈스테이와는 조금 다른 체험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신선했고, 그리고 대학교 때 농활 가는 걸 정말 좋아라 했던 기억을 꺼내 줘서 기뻤다. 그런데 나에게 아주 새로운 체험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대학교 때 줄기차게 농촌으로 갔었던 것과 더불어, 그 당시는 일을 주면 망치지 않고 어떻게든 잘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농활의 본 목적인 연대라는 가치를 잊어버리곤 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어렵다. 나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외향적이지만 내향적 인간이라 처음 보는 사람들과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떠들기가 쉽지 않고 그저 연기를 한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문화교류와 체험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일을 망치지 않아야지 라는 생각만 하게 될까 봐 걱정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못할 건 또 뭐야?
 
그래서 우프에 대한 정보들을 여럿 검색해 봤다. 그러다 보니 체 거르듯 검색 창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Help X. Help Exchange의 줄임말로, 우프와 비슷하지만 농장일을 포함해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한 호스트들이 헬퍼를 찾는다. 호스트가 숙식을 제공하는 경우도 있고, 숙박만을 제공하는 경우, 노동에 대한 정당한 페이를 지급하고 렌트비를 받는 경우도 있는 등 천차만별이므로 호스트의 글을 자세히 읽어볼 필요가 있다. 홈스테이, 백팩커스 호스텔에서 간단한 청소나 가드닝을 돕는 일을 할 수도 있으므로 선택의 폭이 훨씬 넓다. 
 
BackpackerBoard라는 뉴질랜드를 여행하는 백팩커스들이 모이는 페이지도 찾았다. 여행 가이드도 있고, 벼룩시장을 통해 서로 필요한 것들을 사고팔기도 하고, 교통이나 숙박에 대한 정보, 그리고 워홀러들을 위한 구인광고도 있다. 이동하면서 단기 일자리를 얻기가 수월하겠구나 라는 생각에 들어가 보았더니, 정보가 의외로 많다. 처음 이 페이지를 알게 된 경로는 ‘여기에 올라온 숙박시설에 묵으면 주인을 통해 일자리를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이었는데, 시즌별로 호스텔/백팩커스 주인이 농장 컨트랙터와 연결해준다는 이야기였다. 단기로 일하고 단기로 여행하고, 이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아 리스트에 올리기로 했다.




 체크리스트 


비행기표도 사고, 환전도 하고, 보험에도 가입하고, 에어비앤비로 오클랜드 첫 숙소도 정했다. 뉴질랜드에서 돌아오면 만료되는 토익 때문에 다시 한번 시험도 보고, 튜터링이라는 앱을 통해 회화도 연습(하려고....) 했다. 필요한 서류들도 정리하고, 혹시 몰라 여기저기 건강검진까지 마쳤다. 짐을 다 싸서 캐리어에 채우고 나니 방은 텅 비어서 을씨년스러운데 마음은 벅차올랐다. 드디어 일 년살이 할 뉴질랜드로 가는구나!



* 네이버 블로그 (blog.naver.com/s_ynergist)에 먼저 작성된 글들을 정리했습니다. 자세한 (지나간) 이야기는 블로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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