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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nergist Jun 03. 2020

살고 싶은 곳이 생겼습니다

날씨도 사람도 색깔도 따뜻한 네이피어/헤이스팅스 여행


이스트랜드 최대의 도시라는 기스본을 지나, 네이피어에 도착했다. 네이피어는 뉴질랜드에 오기 전에 정착 도시 선정을 위해 책자를 살피다가 마음에 찍어 둔 선택지 중 하나였다. 아르데코의 도시. 고등학교 디자인 이론 수업 때 아르데코 사조에 대해 배웠던 것이 떠올랐지만 디테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음... 역시 시험용 공부였을 뿐이었다)고 일단 도착해서 살 만한 곳인지 살펴보기로 했다. 



전날까지 트래블메이트와 프리 캠핑을 하던 여독이 남아 네이피어에 도착하자마자 따뜻한 물로 샤워부터 하고 밀린 빨래를 다 돌렸다. 다 깨끗이 씻어내면서 안 좋은 기억들은 지우고 새롭게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여유롭게 걸으며 네이피어를 둘러봤다. 여기는 참 아름다운 도시다. 블러프 힐에 올라가서 항구를 둘러봤다. 바다가 이렇게 맑을 수가 없다. CBD는 이렇게 맑고 길게 뻗은 바닷가를 끼고 이루어져 있고, 관광객이 많은 도시인지 바닷가에는 온통 백팩커스/호텔/로지 등 숙소들이 즐비해 있다. 바닷가 쪽으로 탁 트인 창들과 베란다에 나와 있는 커피 테이블을 보면서, 아침에 해돋이 혹은 오션뷰를 보면서 일어나 따뜻한 티나 커피로 몸을 데우는 것도 참 좋은 여행 방법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비싸겠지만 (크흡)


도시를 따라 쭈욱 펼쳐진 마린퍼레이드, 그 바로 옆에 위치한 캠핑장. 환상적이다


작은 규모의 마을들을 여행하다 조금 큰 도시로 나오면 당황스러운 것이 바로 주차공간이다. 우리나라보다는 주차할 곳들이 많은 편이지만 대부분 60분-120분 제한이 있거나, 각 주차공간 옆에 기계를 둬서 1시간에 1달러 등 주차비를 내도록 유도한다. 카메라가 있는 건 아니어서 주차비를 내지 않고 가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주차비도 아끼고 양심도 함께 간직했다. 한참 주차공간을 찾다가 결국 그냥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프리 캠핑사이트에 일찍 주차를 해 두고, 걸어서 시내를 돌아다녔다. 바닷가를 따라 쭉 길이 나 있어서 걷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다음날 계속 시내를 돌면서 네이피어 유일무이 무료 주차구역을 찾아냈다. 의지의 한국인.) 이 캠핑장은 네이피어 헤이스팅스 통틀어 유일한 프리사이트인데다 이틀 이상 체류도 안 되고, 차도 8대밖에 못 들어가서 일찍 자리를 맡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신경을 써서 좋은 자리를 맡고 나면 정말 아늑한 캠핑이 기다린다. 바닷가임에도 불구하고 해변이 약간 아래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보니 바람이 세게 불지 않아서 참 좋았다. 
 



1. 아기자기한 마켓


토요일 파머스 마켓은 Lower Emerson St에서


마침 토요일 마켓이 열린다길래 잠시 들렀는데, 코로만델 템즈 마켓에 비교하면 아주 작은 편이었고 주로 직접 기른 농산물이나 먹을 것들을 팔고 있었다. 5분이면 다 둘러볼 수 있어서.. 샌드위치를 하나 사 먹으며 주변 공원을 둘러봤다. 따뜻한 공원에 앉아있자니 마켓을 둘러보러 나온 노부부, 어린아이들이나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젊은 가족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일요일 마켓은 마린 퍼레이드 오션스파 옆에서.

일요일 아침에도 마켓이 열리는데 토요일의 한 세배 정도 되는 규모인 듯. 푸드트럭도 훨씬 다양하게 많고 파는 물건도 다양하다. 농산물만이 아니라 세컨핸드 물품, 직접 만든 수공예품 등 다양하다. 사고 싶은 것들이 많았으나 짐을 줄여야 하는 여행자는 0원의 지출을 기록했습니다. 
 




2. 따뜻한 색깔의 건물



네이피어는 아르데코 워크가 가장 유명하다. 그리고 볼 게 이것밖에 없다. (ㅋㅋ) 가이드 투어를 진행한다는 아르데코 센터에 갔는데, 오후 2시 투어가 남아 있었다. 지난번 와이탕이 트리니티 쪽에서 가이드 투어를 했다가 속사포처럼 읊어대는 가이드 덕분에 많은 것을 놓친 기억이 나서, 10달러에 가이드 내용이 담긴 지도를 사서 셀프 가이드 투어를 하기로 했다. 비등비등하지만 리딩이 리스닝보다는 낫겠지 싶어서.. 


마오리 전통문양을 디자인에 적용한 건물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 같다. 조화롭고 영롱한 색깔들.


1931년에 일어난 리히터 7.9 규모 지진 때문에 호크스 베이 지역은 박살이 났고, 당시 유행이었던 그리고 지진에 안정적인 외형과 저렴한 비용 일석이조를 동시에 취하는 아르데코 형식으로 도시를 재건축하면서 네이피어는 살아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2년 만에 도시 전체를 재건축한다는 것은 삶의 터전이 폐허가 된 시민들로서는 참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이들은 훌륭하게 해냈고 마오리 문화를 적절하게 결합시키기까지 했다. 도시 전체에서 아르데코 형식인 기하학적 무늬들을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고, 이전까지 건물을 이루던 갈색/검은색/흰색 등이 아닌 청록색/분홍색/하늘색 등을 시멘트에 조합하는 기술을 도입해 건물들이 아주 형형색색이다. 하지만 대부분 채도가 다 낮은 색들이라서 어느 건물 하나 튀지 않는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계획도시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이 아르데코 셀프 가이드 워크를 하다 보니 여러 설명에 스패니시 미션 양식/스코티시 등 유럽 대륙 쪽의 형식을 따 왔다는 문구들이 보였다. 그렇게 보니 약간씩 디자인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여기가 뉴질랜드가 아니라 유럽 대륙인가 싶은 생각도 들 정도였다. 알면 알 수록 조금 조잡해 보이는 건 내 착각인가. 



신기한 점은 재건축을 하면서 전기선들을 다 건물 아래로 깔아서 전봇대가 없다! 도시에서 하늘을 향해 사진을 찍으면 항상 걸리적거렸던 전깃줄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근데 한 가지 단점은 전봇대가 없다 보니 길 이름을 표시할 표지판도 걸 데가 없다는 것. 그래서 코너에 있는 건물들에 길 이름을 붙여 놓거나 바닥에 표시한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이 도넛가게 넘 귀여움ㅋ 그리고 카페들도 귀엽다
도움 많이 된 네 개 책자. 아이사이트에서 얻음!


아르데코센터에서 빈티지 차량 투어도 해 주니까 관심 있는 사람들은 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네이피어는 눈에 띄게 빈티지 차량이 많다. 마치 1950-60년대 할리우드 영화에 나올법한 오픈 빈티지 차량도 봤고, 아주 옛날 스테이션왜건 형식의 차량들도 굉장히 잘 정비된 상태로 돌아다닌다. 그리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들어보니 아르데코 페스티벌 기간에 빈티지 차량 퍼레이드도 한다는데 페스티벌 기간에 여행을 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호크스 베이 지역은 와인이 유명하고 빈야드가 굉장히 많다. 앙상한 가지들이 빼곡. 네이피어 진입 약 10분 전부터 고속도로를 따라 빈야드 투어 광고판이 보였다. 와인의 도시라는 명성에 못지않게 도시 곳곳에 와인바가 잘 되어 있다. 들어가 보고 싶었으나 나에게 와인은 쥐약이라, 아쉽게 등을 돌렸다. 반짝반짝하게 닦여 진열된 와인잔들, 묵직한 와인셀러, 예쁜 인테리어가 나를 현혹시켰으나 (이것 또한 쥐약) 차를 운전해야 해서 눈물을 머금고 돌아갔다.
 



3. 따뜻한 기후, 풍부한 일조량



네이피어에서 한 20분만 달리면 나오는 헤이스팅스는 쌍둥이 도시로 유명하다. 아르데코 워크 책자로 살펴본 네이피어의 건물들도 헤이스팅스에 가면 똑같은 것들이 몇 개 있다. 도시 자체를 비교했을 땐, 다들 문을 닫는 일요일이어서 그런 건지 날씨가 흐려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헤이스팅스가 좀 더 조용한 편에 가까운 것 같고, 거리가 좀 더 넓어서 아기자기한 맛이 덜하다. 네이피어 곳곳 숨은 골목에 스피크이지 느낌의 바들과 작은 로컬 상점들이 많다면, 헤이스팅스는 로컬 상점이라도 뭔가 프랜차이즈화 된 느낌이 있다. 이상한 일이지?


안녕하신지요 오승열씨


헤이스팅스 아트 갤러리에 들러서 전시를 구경했는데 마침 한국인 아티스트가 전시에 참여하고 있었다. 아트갤러리 자체는 작았지만 전시는 흥미로웠고, 도서관과 갤러리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공간에서 사람들이 모여 커다란 캔버스를 앞에 두고 참여식 강의를 진행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Otatara Pa Reserve
Te mata Peak, 360도 뷰가 멋지다


다음날 바닷가 근처 캠핑장에서 눈을 떴는데, 평소와 다르게 캠퍼밴 앞쪽에 김이 안 서려 있는 걸 보고 역시 따뜻한 지역이라고 생각했다. 겨울이 되다 보니 캠퍼밴 내부는 내부대로 춥고 바깥은 바깥대로 이슬이 맺히는데, 아침에 일어났는데도 12도라니! 이 쪽 호크스 베이 지역이 베이 오브 플렌티 지역과 더불어 일조량이 풍부한 곳이라고 들었는데, 그 말대로 햇빛이 아주 따뜻하고 하늘이 맑다.


CBD 안쪽은 충분히 둘러봤기에 운전을 하고 돌아다니면서 주변 볼거리를 찾았는데, 호크스 베이 지역에는 딱히 볼 것/할 것이 별로 없다. 가넷 서식지라는 케이프 키드내퍼스에 가볼까 했는데 새에는 관심도 별로 없고 투어로 많이 진행하는 곳이라.. Otatara Pa Reserve와, Te mata Peak라고 360도를 둘러볼 수 있는 작은 산을 올랐다. 가끔 이렇게 운동이 필요해. 



그리고 나서 케이프 키드내퍼스에서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나오는 오션 비치에서 밴 뒤로 대 놓고 따뜻한 날씨 즐기기! 바닷가에 누워있다 보면 보이는 게 하나 있는데, 구름의 이동이다. 여기는 구름이 그냥 하늘에 박힌 듯 움직이지 않는데, 그 말인즉슨 바람이 덜 불고 덜 춥다는 이야기. 살기 좋은 곳이다. 




어른도 아이도 따뜻한 말을 건네는 도시


Never look back unless you are planning to go that way
곳곳에 있는 그래피티는 SEA WALLS 가이드북을 따라가다 보면 더 자세하게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참새와 아침 나눠먹기.


만약에 이제껏 거쳤던 도시 중 어디서 살고 싶어?라고 물어보면 네이피어라고 답하겠다. 바닷가도 드넓게 펼쳐져 있어서 답답하지 않고, 도시 구석구석에 있는 작은 바까지 알아가고 싶다. 그리고 어딜 가나 사람들이 친절하게 먼저 말을 걸어 도와준다. 다른 데서도 많이들 그러지만, 네이피어 사람들은 그냥 잠시만 서 있어도 길을 잃었거나 도움이 필요한 줄 아는 것 같다. 친절 그 자체.. 첫날 도착해 수영장 시설에서 1달러짜리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는데, 바로 옆에 붙은 학교에서 수영 수업을 들으러 왔던 어린 여자아이가 날 보고 신기했는지 이것저것 물어 왔다. 아이도 먼저 말을 거는 곳. 아이들도 참 많다. 공교롭게 주말에 여행하다 보니 가족들을 많이 볼 수 있었고, 다른 도시에 비해 유모차의 비율이 월등하게 높은 것 같다. 살기 좋은 도시인 것 같고, 살아보고 싶다.


하지만 캠퍼밴에서 묵을 홀리데이파크가 없어서 여기서 정착할 수는 없다는 게 좌절스럽다. 대부분 백팩커/호텔 등의 숙소만 있고, 캠프그라운드가 없다. 그나마 몇 개 있는 홀리데이파크는 다 비싸고.. 사실 네이피어에서 키위 농장 겨울 잡을 구했는데 백팩커 연계 일자리라 도미토리에 머물면서 일해야 한다고 하길래 보내줬다... 키위도 이제 별로고 백팩커스도 별로라, 잡 찾기 힘든 겨울 시즌에 아주 배가 불렀다. 결국 나는 네이피어에 살고 싶다는 마음을 접은 채 이동하기로 했다. 



* 2018년 블로그에 작성된 글을 재편집해 올리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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