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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nergist Jun 21. 2020

비바람 부는 웰링턴에서의 겨울

세번째 일자리 키친핸드로 정착!


친근하지만 수줍은 뉴질랜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와이파와라는 타운에 도착했다. 저렴하고 괜찮은 평을 가진 캠프그라운드가 있는 마을이었는데 초입에서부터 꽤 느낌이 괜찮길래 좀더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홀리데이파크는 정말 리뷰대로 아주 훌륭했다. 깨끗한 시설에, 와이파이에, 가격도 저렴하고.. 나는 유명하고 비싼 곳 말고 로컬들이 운영하는 홀리데이파크를 많이 다니고 있는데 하나같이 주인들이 비슷하다. ‘난 그저 조금 넓은 부지를 가지고 있는데 땅을 놀릴 바에야 시설 만들어서 여행하는 캠퍼들이나 받을까~?’ 라는 느낌.. 돈 욕심이 없는, 마음이 넉넉한 사람들 같다. 특히 이스트코스트 쪽으로 여행하면서 묵은 홀팍들이 대부분 그랬는데, 오피스에 들어가면 ‘나 지금 자리에 없음’ 이 과반 이상이라 전화를 해서 이용 허락을 받거나, 더 심한 경우는 ‘그냥 아무데나 자리 잡고 써, 팩실리티 여기 여기에 있음, 낼 아침에 보자’ 라고 쓰여 있는 경우들이 많다. 일찍 일어나서 돈 안 주고 튀면 어떡하려고? 그런 경우들이 거의 없기에 캠퍼-주인 간의 신뢰관계가 쌓여 이런 편의가 생성됐겠지만 겪어도 겪어도 당황스럽다. 다음 날 아침에 돈 내러 갔는데 그제서야 일어나서 “아 미안미안 그냥 10달러만 문에다 꽂아 놓고 가줘~” 라고 하던 아저씨도 있었다. 여기 와이파와에서는 문을 노크해도 아무도 나오지 않아서 두리번거렸더니, 홀팍에 돌아다니던 아저씨가 “주인 지금 나간 거 같은데 걍 나중에 와” (!) <부재중이신 것 같아 동네 구경하고 이따 돈 내러 올게요> 라며 이름/차 번호/휴대폰 번호로 메모를 붙여놓고 저녁에 돌아왔는데 정작 다음날 아침까지 아저씨를 못 만났다. 홀팍에 돌아다니는 아저씨들(대부분 큰 카라반이나 버스를 개조한 곳에서 지내는 분들)은 나를 보며 또 “아 그냥 써~ 내일 돈 내~ 아무 상관 없어~” 하신다. 마치 본인 집인 것 마냥. 홀리데이파크 안에 조그마한 마을이 형성된 것처럼 가족같이 지내는 게 아주 인상적이다. 이틀을 묵고 나서야 겨우 아저씨를 만나서 숙소비를 치렀다. 이제 어디로 가? 묻길래, 잘 모르겠지만 일단 웰링턴 쪽으로 가려고요. 했더니 2번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면 더 볼만한 것들이 많은 마을들을 지나가게 될 거라고 이야기해 주셨다. 파머스턴노스를 지나서 어퍼헛 쪽으로 내려가려고 했는데 로컬이 추천하는 거니까 또 믿고 계획 변경.



중간에 몇 군데 들러볼 곳이 있었는데 하나는 Tui 양조장/박물관이다. 새 이름을 딴 뉴질랜드 맥주인데, 조금 향이 독특하고 다른 맥주들에 비해 홉피한 느낌이 더 짙다. 뉴질랜드 맥주는 한국에 있을 때 브루독 밖에 먹어본 기억이 없는데, 여기서 파는 나머진 다 별로인 편.. 오죽하면 유러피안 애들이 뉴질랜드 맥주는 오줌 맛 난다고 한다. 특히 Lion Red 나 Speight는 세일 하지 않는 이상 애들이 쳐다도 안 보고.. 스테인라거가 맛있는데 비싼 편이고, 그나마 저렴한 가격 중에서는 독일식 하겐이나 투이를 가장 많이 먹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투이 향이 별로였는데 먹다 보니 괜찮아서 나도 투이를 많이 먹었던 기억이 난다. 요즘엔 추워서 맥주고 나발이고 잘 안 마시지만. 가이드 투어를 통해 양조장을 둘러볼 수 있는데, 유럽 여행 조금씩 할 때 플젠/더블린 등양조장에 갔던 기억이 있어서 가이드 투어는 제끼고 무료 입장인 박물관만 살펴봤다. 박물관 바로 옆에 펍이 붙어있는데, 에일로만 나오는 병맥주 이외에 다크비어나 라거, 사이다 종류도 팔고 있어서 오랜만에 나도 다크비어 한잔. 점심을 안 먹고 갔더라면 식사도 했을텐데, 옆 테이블들을 보니 식사류도 꽤 괜찮아 보였다. 인포메이션센터에서 가져간 맵들을 살펴보며 다크비어를 비우곤 다시 출발.



들르고 싶은 곳은 꽤 됐는데(뉴질랜드 3대 치즈장인의 농장이라든가, 자잘한 워킹트랙 등) 왠지 모르게 내키질 않아서 그냥 지나치고 일찍 캠프그라운드에 들어왔다. 프리사이트였는데 양들이 풀을 뜯어먹는 한가운데에서 밤을 보낼 수 있는 곳. 산골짜기라서 전화/인터넷 신호도 없는데다가 주변에 가로등이고 나발이고 불빛이 아예 없는 지역이라 밤에는 달빛 별빛에만 의존해야 하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양치기가 된 것처럼 풀밭을 걸으면서 양들을 이리 저리로 몰아 보기도 하고, 나를 멀뚱히 바라보는 양들과 눈싸움을 하기도 하고. 낮에 도착했을 때 바로 옆 테니스 코트에서 여자애들이 필드하키를 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으로 보이는 분도 너무 자유분방.. 검부츠에 하이비 입고 돌아다니고.. 누가 저분을 선생님이라 하겠는가 동네 밭 가는 아저씨지.. 아이들이 신나게 놀이를 하는 것을 보면서 피크닉테이블에서 따뜻한 차를 끓여마시고 책을 읽고 있자니 운동을 하던 여자아이가 다가와 “웰컴투 알프레드턴” 이라고 말하고 휙 가버렸다. 시골 동네로 내려오면 올수록 어린 애들이 아시안인 나를 좀 신기해 하는게 느껴진다. 힐끔힐끔 쳐다보기도 하고 일부러 와서 말을 걸거나 저렇게 휙 내뱉고 가기도 하고.. 친근하지만 수줍은 뉴질랜드 사람들. 이방인에게 건네준 한 마디에 마음은 따뜻해진다.



40분 정도 더 달려 그레이타운 초입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보이는 플래카드는 이렇게 외쳤다. “저희가 뉴질랜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뽑혔답니다!!!” 큰길을 따라 아트 갤러리, 소규모 공방들이 늘어서서 조용하면서도 예술가 마을의 느낌이 흐르는.. 사람들도 너무나 친절했다. 하지만 나는 더 큰 고민거리가 있었기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 그것은 바로 고용안정.




비싼 도시에서 덜 벌고 더 쓰는 이상적인 삶 (?)


아 히터 없었으면 죽었다


팩하우스를 마치고 동해를 따라 북섬 아래쪽으로 여행하면서, 추운 겨울 동안 따뜻한 호크스 베이에 정착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심지어 일자리도 있었으나 캠프그라운드가 없어서 뒤돌아선 마당이었다. 여행만 2주 가까이 하다 보니 어디선가 일을 또 시작해야 하는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캠퍼밴 생활을 쉽게 포기할 수 없어 모든 게 걸리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새벽 온도가 너무나 떨어져 침낭+이불 2채로도 추위를 견디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고 드디어 마음을 먹었다. 웰링턴으로 가자! 겨울동안 도시에서 플랫 구해 지내고 봄에 다시 캠퍼밴 여행을 시작하자고. 고용 안정과 추위가 사람의 신념을 이렇게 꺾었다.


하지만 웰링턴의 플랫들은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어디가 비싼 지역인지에 대한 파악도 아직 되지 않았지만 확실한 건 오클랜드보다 웰링턴이 약간 비싼 편인 것 같다. 테푸케 캠프그라운드에서 캠퍼밴 생활 하면서 주에 50달러도 안 냈던 걸 생각하면 여기는 세 배가 넘는 금액을 플랫에 지불해야 하니 타격이 크다. 도시라서 캠프그라운드를 찾기가 힘든데, 그나마 시 외곽에 저렴하고 괜찮은 곳을 찾아서 정착했다. 캠퍼밴 생활을 하는 유러피안 여행자 애들이 많아 푸케누이 홀팍에 묵었던 느낌이 들고, 시설들도 깨끗하며, 이번에 구입한 소형 히터를 틀기 위해 전기를 연결해서 이용하면 플랫 사는 것보다 저렴하게 이용 가능하다. 히터 없는 캠퍼밴 생활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


지난 3월 오클랜드를 떠난 이후로 대도시에 발을 붙인 건 이번이 처음이다. 각 지역의 거점 도시를 거치긴 했지만 정작 둘러본 건 하루 이틀이 전부이고, 그 도시 근교에 정착해서 살았기에 대도시가 조금은 어색하다. 지난 포스팅에도 언급한 적 있었지만 대도시에 왔구나 라고 절실히 느끼는 때는 주차공간인데, 웰링턴은 그야말로 대도시다. 시티에 나가면 온통 유료 주차공간들 뿐이고 그마저도 꽉 차서 주차를 못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실 웰링턴은 다른 지역에 비해 생활비가 조금 더 들어가는 곳 같은 게, 페트롤이 확연히 비싸다! 요즘 기름값이 오른건지, 아니면 여기가 특히나 비싼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클랜드에서 2불도 안 됐던 가격을 더 이상 꿈도 꿀 수 없다. 푸케누이에서 지낼 땐 ‘그래 동네에 주유소 하나 있으니 2.07이어도 봐준다, 가끔 근처 도시 나가서 파캔세이브 6c 할인받으면 되니까’ 했고, 테푸케에서는 ‘그래 동네에 주유소 2개 있으니 경쟁하는 게 당연하지, 2.15여도 봐준다 BP 6c 할인 받으면 되니까’ 였는데.... 여긴 최대 $2.23까지도 봤다! 할인 받아도 2.10대.. 얼마나 아껴지나 싶지만 똑같이 40달러를 넣어도 양이 적게 들어가다 보니, 운전하다 무심코 연료량을 체크하면 확확 줄어드는 게 느껴진다. 흑흑 이렇게 비싸다니... 이 나라에서 가장 비싸다는 동네 퀸스타운에는 어떻게 내려가지? 싶다.


일터 바로 앞의 바닷가
캠핑장 바로 뒤 언덕의 전경


지금껏 6개월 간의 워홀 생활은 굉장히 운이 잘 따라주는 편이었다. 목표한 것들을 차근차근 해 나갈 수 있었고, 특히 워홀러들을 고민에 빠지게 만드는 일자리 운도 괜찮았다. 그 흔한 집집마다 CV 돌리기 한번 없이 온라인 지원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있으니. 웰링턴에 내려오면서 여기저기 CV를 메일로 보내 놨고 트라이얼을 거쳐 한인이 운영하는 자그마한 카페에서 키친핸드로 일을 시작했다. 일 구하면서 정착한다고 정신사납고 싶지 않아서, 그냥 가장 쉬운 루트를 따랐다. 키친 스탭들 모두 인상이 선하고 좋은 분들이라 잘 챙겨주시고, 추운 날씨에 밖에서 일하지 않아도 돼서 좋고, 바리스타들한테 음료를 부탁해서 마실 수도 있고, 따뜻한 점심 식사도 제공돼서 좋다. 이제껏 음식점이나 펍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식사로 손님 테이블에 나가는 메뉴를 받아본 적이 없는데, 진짜 오더와 다를 것 없이 정성 가득한 식사를 받아들자니 이걸 먹어도 되나 부담감이.. 프로 셰프님들이..!! 따뜻한 식사를..!! 주시는 게 가장 좋은 점인 것 같다. 키친 스탭들이 다들 조용한 편이기도 하고 주방 분위기 자체가 아주 고요한 편이라, 말할 일이 별로 없다. 시끄러운데서 스트레스 받는 것보다 훨씬 낫다. 키친엔 모두 한국인이다보니 영어를 쓸 일은 없고, 홀 스탭들이 현지인이거나 영어 스피커들이지만 걔네랑 말할 일도 별로 없다. 영어가 목표가 아니니까 큰 상관은 없다. 딱 하나 단점은, 하루에 6-7시간씩 5일을 일하면 수입이.. 아보카도 농장에서 18.50에 홀리데이페이까지 따로 받았을 때 그게 정말 특이한 케이스겠거니 했었는데..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키위 팩하우스에서는 미니멈+홀리데이페이였어도 하루에 10시간씩 일해서 어느정도 벌었는데. 게다가 엄청난 물가의 웰링턴에서 살아남으려면 지출이 꽤 늘어나기에 지금은 정말 말 그대로, 덜 벌고 더 쓰는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불만보다는 오히려 이상적인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게 내가 처음에 목표 했던 워홀러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돈이 아니었기 때문에, 생활이 가능한 정도 혹은 여행자금을 모을 정도로만 하루에 적당하게 일하고 내 시간을 충분히 갖는 것을 하나의 시나리오로 예상했었다. 돈에 목숨을 걸기 시작하면 할 수록 한국에서 스트레스 받아가며 일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게 맞았다. 지금은 9시에 일을 시작하고 3, 4시쯤 일을 마치고 나오면, 아직도 해가 중천이라 남은 시간을 온전히 내가 다 사용할 수 있다. 해 뜨기 전에 출발해서 해 지고 나서 퇴근하던 팩하우스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여행하듯 살기, 살면서 여행하기’도 가능하다. 예전에 어떤 트윗을 봤다. 프랑스에서는 2000년부터 노동시간을 39시간에서 35시간으로 줄였는데, 사람들이 미친듯이 일하지 않아도 세상이 잘 굴러간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한국에서 내가 일주일에 35시간씩 일하면 얼마를 벌게 될까, 내 생활비는 충당할 수 있을까?




키친은 처음이지만


일요일, 월요일이 휴무라서 월요병은 없다. 화수목금토 아침 일곱시 알람을 듣고 눈을 뜬다. 출근은 아홉시까지지만, 언제부터인지 늦잠을 자고 지각을 하면 나 자신에게 실망해 기분이 나빠서 하루를 망치곤 했다. 그래서 그냥 아예 일찍 일어나는 편이다. 꿀을 넣은 블랙티 한잔을 만들고, 멀티그레인 식빵에 일반 버터와 땅콩버터를 발라서 아침을 먹는다. 어릴 때부터 엄마가 아침 안 먹으면 학교 안 보낸다고 했던 게 생각난다. (지금 생각하면 개이득이지만) 혼자 사는 동안 아침식사보다 잠의 노예가 되었다가 몸이 망가진 걸 생각하고 다시 아침을 꾸준히 먹는다. 따뜻한 샤워로 몸에게 일할 준비를 시키고 차도 시동을 먼저 걸어 예열을 시킨다. 낮 시간에는 약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지만 출근시간엔 약간 막힌다. 그래서 넉넉하게 25분 잡고 출발. 웰링턴은 대부분 언덕지형이라 고도가 확실하게 느껴진다. 올라갈 때 바람이라도 불면 차체가 흔들림과 동시에 속도가 잘 안나오고, 내려갈 때는 마치 비행기라도 탄 듯이 귀가 먹먹해지면서 아파온다. 그리고 출근 20분 전에 차를 대놓고 책을 읽는다. 어디선가 그런 글을 봤다. 회사 동료 중 출근하기 전 한 시간동안 회사 앞 스타벅스에 앉아있다가 오는 사람이 있다고. 그래야 아침에 회사로 향하는 게 아니라 스타벅스로 향하는 거라고 자기 자신을 안심시키며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을 그렇게까지 싫어한다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다.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나도 화장실 들어갈 때 나올 때 다르다고, 놀 때는 줄어드는 통장잔고에 불안해 하더니 일을 구하고 나서는 역시 귀찮아져서, 여유롭게 일찍 와서 책을 읽는다. 나는 책 읽으러 여기에 오는거야 라고 생각해본다.


출근해서는 하루가 비슷하다. 나는 처음 하는 일이라도 금방 익숙해지는 편이고 노하우를 쉽게 쌓는 편이라, 그냥저냥 내 방식을 찾아 일을 해 나가는 중이다. 요식업 사업장에서 일한 경험은 수없이 많지만 항상 홀에만 있었고 주방에는 들어와 본 적이 없어서, 셰프님들한테 안 걸리적거리고 효율적으로 일하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설거지 방식이 한국과 조금 다른데, 아주 큰 수조에 거품물을 만들어 두고 그릇을 담가서 설거지를 한다. 그러다 보니 자잘한 음식물쓰레기는 하수도로 그대로 내려가게 된다. 이 나라는 기본적으로 쓰레기 구분이 없고, 큰 박스나 재활용품만 나눠서 버리는 정도? 가정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일반 쓰레기와 함께 버리는 걸 보고 깜짝 놀랐었다. 설마 했지만 업장에서도 그런다. 거품 낸 수세미로 하나하나 닦고 거름망을 쓰는 우리나라와 너무 다르니, 대체 하수시설이 어떨까 싶다. 그런 인식이 없다 보니 홀 애들도 짬처리를 제대로 안 한다. 한국에서 일할 땐 음식물 쓰레기를 나눠서 버리는 것도 이유지만, 설거지 할 때 힘들다고 깨끗이 버려 달라고 그렇게 주방에서 부탁했었는데.


하루의 마무리는 인생 아이스크림으로.. 아름다운 노을과 함께!


3시나 4시 정도면 퇴근한다. 해가 중천이라 아주 좋다. 아직도 할 수 있는 게 많은 시간이다. 근데... 이제껏 일할 때는 일찍 나가고 오랜 시간 일해서 저녁에 퇴근하면 밥 해 먹고 뒹굴거리다 자는 게 일과였는데, 자유시간이 주어져도 뭘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웰링턴은 할 게 없기도 하고. 자유시간을 맘 놓고 즐길 취미가 없다는 것에 깜짝 놀라 글을 쓰기 시작했다. 파파모아비치처럼 딱 차 대놓고 글이라도 쓸 수 있는 공간을 찾아야 한다. 캠핑장 뒤쪽이나 가게 근처에 있는 워킹트랙을 찾아 걷기도 한다.




겨울의 웰링턴에서 우울이 고개를 든다


어휴 날씨 넘 구려요


웰링턴에서 겨울을 보내고 남섬으로 내려가려 한다. 비가 많이 와서 습한데, 웰링턴은 바람까지 많이 분다. 처음 도착 후 3일간은 비바람이 몰아쳤다. 언덕 지형이 많고 바람이 많이 분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심할 줄이야.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언덕에서 속도가 확연히 줄어들면서 바람 때문에 차체까지 심하게 흔들린다. 습관대로 한 손으로 운전하다가, 어이구 죄송합니다 하고 두 손으로 핸들을 붙잡는다. 심지어 새벽에는 우박도 내렸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정말 날씨 하고는


고작 20분인 출근길에 온갖 날씨를 다 본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가, 미친 듯 쏟아졌다가, 어느 구간을 지나면 반짝 해가 나기도 하고, 다시 와이퍼를 최대치로 움직여야 할 정도로 비가 오기도 한다. 하루종일 구름만 낀 흐린 날씨일 때도 있고, 잠깐 창문 밖을 쳐다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해가 떠 있기도. 그렇게 날씨가 변덕을 부리니 활동량도 줄어든다. 아무리 겨울이라도 해가 있는 낮에는 12-13도일 때가 많아서 일찍 마치면 요가매트를 펴 놓고 스트레칭과 필라테스를 하곤 했다. 요즘 들어 몸이 찌뿌둥하길래. 생각해 보니까 날씨가 변덕을 부려서 워킹트랙도 찾아다니지 않고 근처 어딜 걷지 않은 지가 꽤 됐다는 걸 알았다. 아이폰 건강 탭에 걸음 수가 현저하게 떨어졌고. 활동량이 줄어드니 뇌도 스트레스를 받고 경미한 우울감이 쌓였다. 사실 오기 전부터 약간 예민해지고 스트레스가 쌓이긴 했었다. 올해 목표로 하는 것들에 대한 성취가 나타나지 않아서 짜증이 났고 (그렇게 하루아침에 되는 일들이 아님을 알면서도) 저녁에는 일찍이 해가 지니까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음악을 듣거나 프렌치 공부를 하거나 리디북스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데 그것마저도 지겨운 지경에 이르렀다! 6개월 정도 됐으니 똑같은 생활에 또 질릴 때가 된 거다. 대체 여행하면서도 이 생활을 지겨워하는 나를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경미한 우울감이 있어서 기분을 좋게 하려 단 것들을 찾아 먹거나 술을 마셨는데, 그러다 보니 피부가 반항하고 몸이 약간 무거워지고 한동안 잠잠했던 만성위염 증세가 슬슬 올라오기 시작했다. 또 몸이 망가지니 생리불순이 찾아왔다. 지난 1년 반~2년 동안 한번도 거른 적 없었는데! 심지어 발암물질이 나왔다는 좋은느낌 생리대를 쓰면서도! 뉴질랜드에 오고 나서는 정상범주인 28일 가까이로 돌아간다고 신기해하기도 했는데! 20대 초반까지는 많이 건너뛰곤 했다. 워낙 불규칙하기도 했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였는데, 2년만에 그것도 뉴질랜드에서? 남과 비교하는 건 좋지 않다는 걸 알지만, 불지옥에서 딤섬이 되어가며 야근하는 한국의 친구들에 비해 정말 편안한 삶을 살고 있으면서 무슨 스트레스냐며 너무 나약해진 나 자신을 꾸짖기도 했다.


시티가 내려다보이는 공원
겨울이긴 한데.. 또 이렇게 꽃이 피고 날씨가 좋을 때도 있고


우울감은 PMS로부터 시작된 것 같았다. 가족과 친구들이 보고 싶거나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것으로 보아 향수병은 아니다. 흐리고 우울한 날씨 탓 50, 소셜라이징 50이라고 원인을 규명해 봤다. 팩하우스를 떠난 후 2주간 나 혼자 있는 시간이 좋다고 해서 계속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운전하거나 하면서 많게는 하루에 한마디도 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겨울이라 여행자들도 많이 없었지만). 그러다 보니 외로움이 몰려온 모양이었다. 이러면 내가 여기서 몸과 마음의 독소를 뺄 수가 없다고 생각해, 간식과 술을 끊고 위염약을 다시 먹고 시간이 나면 이어폰을 끼고 걷기 시작했다. 확실히 몸을 움직이는 건 기분전환에 도움이 된다. 시티 센터로 나가 쿠바스트릿도 가보고 시티갤러리도 둘러보고 앞에서 프리와이파이도 사용했다. 어찌됐든 날씨만 좋으면 걷는 건 환영이다. 처음 보는 동네에서 그냥 아무데나 발길 닿는 대로 걷는 여정. 그러다가 GPSmyCity라는 앱을 발견했는데, 기왕 걸을 거면 아무 골목이나 들어가지 말고 볼만한 골목길을 추천해주는 앱이다. 웰링턴 앱을 다운받았는데 아주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저녁에는 한참 혹사시킨 다리를 마사지하고, 조용한 재즈를 듣거나 명상 앱을 이용해 머리를 비우는, 아예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연습을 하고 있다.


책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에 이런 구절이 있다. 요즘 유행하는 혼밥, 혼술, 혼영 다 좋지만 그렇게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고 나면 어찌 됐건 사람들 틈바구니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고. 내가 평가하기에 가장 빛나고 아름다웠던 시절이 있다. 대학교 1-2학년 때인데,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과 나 혼자 있는 시간이 잘 나눠져서 밸런스가 아주 좋았다.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에 대한 스트레스로 사람과 부딪히는 걸 그렇게 싫다 싫다 했지만 결국에는 사회적 동물인 모양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인연을 만들고 싶지는 않아서 일단은 홀리데이파크에 머무르는 사람들과 마주치면 조금씩 이야기하곤 한다. 여름에 함께 여행했던 친구나 테푸케에서 만난 친구처럼,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을 또 만나기를 기대한다. 일터도 있고, 숙소도 있고, (바람은 불지만) 따뜻한 날씨에, 저녁에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고속도로 위에서 크게 노래를 부르니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모든 건 생각하기에 달렸다.


꿈꾸는 삶의 방식 리스트에 하나 추가, 작약 나무를 정원에 심을 수 있는 삶. 떨어진 꽃을 하나 주워 한참 들여다봤다.


나 자신을 즐겁게 하는 일이 필요하다. 내일 죽는다면? 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내일도 멀다, 당장 운전하다가 몇 분 후에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버킷리스트가 있으면 뭘 하나, 사후세계에 떨어져서 후회하지 않으려면 뭐라도 하라며 나를 부추기고 있다. 내가 한창 바쁠 때는 시간 없고 여유가 되지 않아 못 했던 것들이 많아, 언젠가는 꼭 해야겠다고 미루며 살았다. 그 언젠가가 지금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나는 지금 시간이 많고 여유롭다. 근데 왠지 용기가 필요한 것만 같아서 이리저리 주저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여기까지 온 것도 굉장히 용기가 필요했던 일인데 다른 걸 못할 건 뭐야, 별것도 아닌데. 누군가 전에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못 놀아본 사람들은 시간 있어도 못 논다고. 학교때부터 바빠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른 채 십 몇년을 살았으니, 몸이 익숙하지 않은것도 당연하다. 혼자서, 잘 놀아보려는 노력을 해 보려고 한다.


벤 스틸러와 나오미 왓츠가 나오는 While we were young 이라는 영화를 다시 봤다. 40대 부부가 20대 커플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는데, 보면서 나는 여기서 20대임에도 불구하고 40대처럼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 마치면 집(=밴)에 돌아오고, 씻고, 음악듣고 책 읽다가 자고, 또 일하고, 즐거운 일이랄 것도 없이 관성에 젖어 사는 것. 물론 이제껏 워라밸이 무너져 이런 여유를 가지지 못했던 것에 대한 보상 개념으로 몰아 쉬고 있는 거긴 하지만, 또 가끔은 지루하기도 하다. 그렇다고 밤마다 클럽에 가서 춤을 추거나, 술 마시고 행오버에 시달리거나 젊음을 빙자한 미친 짓거리들 하는 게 20대가 꼭 해야 하는 일도 아니지만. 이대로 정체되기 전에 새로운 것들에 자꾸 나를 노출시킬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아직 시간이 많고 아주 젊은 나이라고 나 자신에게 계속 말해줘야 할 것 같다.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고, 뭐든 주저 않고 도전할 수 있도록.


또 다른 책 <자존감 수업>이라는 책은 한 챕터가 끝날 때마다 퀘스트를 준다. 나의 장단점을 적어보면서 내가 그렇게 사랑받지 못할 사람인지 체크해보라거나, 미래형/긍정형/행동 위주의 목표를 세워보라는 등. 그 중 나는 내가 버리고 싶은 습관 적기와, 하루하루 감사할 일이나 아주 작은 것이라도 행복했던 순간을 적어보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다. 버리고 싶은 습관을 적으니, 무심결에 또 하려고 할 때마다 적은 것들이 떠올라 주저하고 행동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된다. 자기 전에 감사하고 행복한 일을 적으니, 지루하고 똑같아보이는 일상일지라도 아주 조금씩이라도 웃었다는 걸 생각하면 행복하게 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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