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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nergist Jun 22. 2020

베를린이나 칸은 아니지만,

뉴질랜드 웰링턴에서 국제영화제를 보다니!


예상치도 못한 영화제 관람



웰링턴에 와서 제일 기뻤던 것을 꼽으라면 뉴질랜드 국제영화제 기간이 곧 시작된다는 걸 알았을 때였던 것 같다. 처음 영화제에 가봤던 건 대학교 1학년 때 필드트립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 갔었던 것. 과에서 매년 10월이 되면 버스를 대절해 부산까지 내려가 3박 4일간 피프 (그땐 Pusan 이 공식 영문표기법이었다 하하 세월이란..)를 즐기고 돌아왔었다. 사실 2학년 때 까지는 영화에 별 관심도 없어서 필드트립 참가비에 포함된 티켓 3장 모두 유명한 감독이나 배우가 참여한다는 Guest Visit 영화를 예매하는 데만 써 버렸다. 그리고 낮에는 부산을 여행하고 밤에는 선후배 동기들과 늦게까지 술 마시고 해운대 바닷가 앞을 헤매고.. 사실 갓 십 대를 벗어난 초보 대학생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유흥이었다. 어찌어찌 다사다난한 과정을 거쳐 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복수전공까지 하기 시작하며 찾아간 영화제는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난생처음 칠레 영화, 노르웨이 영화 등을 보기도 하면서 영화제가 아니었더라면 볼 수 없었을 작품들에 대한 감사함과 안타까움이 조금씩 들었다. 이제껏 내가 가질 수 있는 선택의 폭이 이렇게 넓었는데, 멀티플렉스에서 상영관을 점유한 클리셰의 전형 한국영화나 할리우드 영화만 보고 있었다니. 세상엔 이렇게 다양한 이야깃거리와 방식이 있는데. 서울에 살면서 연예인 볼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무슨 유명한 감독과 배우를 보겠다며 GV에 티켓을 몰빵했는지 나 자신이 조금 부끄러웠다. 이후에도 서울과 지방에서 하는 여러 영화제가 있으면 찾아다녔는데, 그래서 마침 뉴질랜드에서 만난 국제영화제가 너무 반가웠다.


인터넷 웹사이트로 무슨 영화를 고를지 찾아보다가, 책자를 찾기로 했다. 영화제는 책자에 표시해가면서 티켓 끊고 스케줄 짜는 게 맛이지. 도서관에 자유롭게 가져가라고 비치된 책자를 찾아, 개막작부터 폐막작까지 영화들을 쭉 살펴본 후 마음에 드는 영화들을 추렸다. 유럽 영화들 몇 개, 뉴질랜드 영화도 하나 꼭 봐야지 하고 추가.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이 나오는, 칸이나 선댄스 수상작들도 추가. 우리나라는 영화제 기간의 영화들이 더 저렴한 편인데, 여기는 일반 상영관보다 몇 불 더 비싸다. 생각해보면 그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보고 싶은 영화는 많지만 스케줄도 잘 맞지 않고 장바구니의 합계금액이 미친 듯이 올라가는 걸 보고 적당히.. 골라내서 다섯 편만 예매했다. 하루에 세네 개씩 보던 이전의 영화제 기간에 비해 티켓수가 터무니없이 적구나ㅠ_ㅠ 그리고 개막을 기다렸다. 일상이 조금 지루하던 참에 온라인으로 시킨 택배를 기다리는 느낌이랄까..


약간 큰 동네마다 5개 미만의 관을 가진 작은 로컬 영화관이 있다. 내부는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이고 고풍스러운 샹들리에가 걸려있거나 벽난로 장식을 해 놓은.. 건물 자체는 오래됐을지 모르지만 청소며 수리며 아주 깨끗하게 잘 유지되는 것 같다. 영화 가격도 다양하다. Monday Escape라고 월요일마다 할인도 해 주고, 카페처럼 10편의 영화를 관람해 스탬프를 모으면 1편을 무료로 볼 수 있다. 담합으로 영화료 올리기에만 급급한 멀티플렉스에 익숙한 나는 이 영화관들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후에 갔었던 영화관도 작은 카페가 1층에 마련되어 있고, 상영관은 3개가 전부이며, 오래된 마룻바닥과 두툼한 카펫이 공존했다. 또 신기했던 건 카페들에서 제공하는 와인잔이나 찻잔 유리컵들을 그대로 상영관에 가지고 들어가는 거였다. 입장을 기다리며 앞에 앉아있는데 이전 영화가 끝나고 사람들이 퇴장하자 청소를 위해 들어간 스태프들이 트레이에 잔들을 수거해서 나오는 걸 보고 뜨악.. 물론 작은 영화관이라서 가능한 거겠지만 와인은 와인잔에, 차는 찻잔에 마시며 편안하게 영화를 관람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끝나고 팝콘이나 일회용품으로 꽉 차는 멀티플렉스 쓰레기통과는 사뭇 다른.. 우리 동네에도 작은 영화관들이 생겼으면 좋겠다.


영화제라서 광고나 트레일러들로 시간을 보내지 않는 것도 좋았지만 시작 전에 간단한 영화 퀴즈들을 스크린에 보여줬다. 예를 들면, ‘그레이스 켈리는 히치콕 영화 몇 편에 출연했을까요?’ 나 ‘가장 처음으로 미국 영부인을 연기한 사람과 그 작품은?’ 등. 개봉 예정인 영화들에 관련된 문제를 제시하고, 해답을 보여주며 다음 주부터 상영함을 알리는, 위트 있는 광고도 놓치지 않았다.



Girl / 칸느 수상작 / 벨기에, 네덜란드


영어 자막이 나와서, 의학 용어들 빼고 수월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근데 현지 언어가 막 귀로 흘러들어오니까 영어자막도 안 읽히는 부작용이. 유럽의 라틴 혹은 게르만 언어들이 다 영어와 비슷비슷한 데다가 요즘 불어를 공부하고 있다 보니 귀로는 불어가 들리지 눈으로는 영어를 읽어야지, 초반에는 정신없다가 점점 괜찮아졌다. 


남성의 몸으로 태어나, 여성 발레리나를 꿈으로 하는 16세 라라의 이야기다. 나는 평소 LGBT를 지지해 왔는데, 성장기에 정신과 육체의 괴리감이 있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자신의 몸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혐오에 가까워 학대하는 주인공을 보면서 정작 이해할 수 있는 건 쥐뿔도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딸이 되고 싶은 아들을 믿고 지지해주고 서투르게나마 자신의 역할을 하고 싶어 하는 아빠, 그리고 당연하게 지지해주는 주변인들이 비치는 사회상도 신기했다. 대체 여자처럼 보이는, 발레를 할 수 있는 남자 배우를 어디서 찾았지? 하고 찾아보니 남자 무용수가 연기자로 데뷔한 거였다. 어린 나이인 것 같은데, 이 작품을 찍으면서 자신의 정체성에는 문제가 없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나는 뒷 이야기에 훨씬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 


The Kindergarten Teacher / 선댄스 수상작 / 미국


최근에 패터슨이라는 영화를 봤었다. 아담 드라이버가 나오는 짐 자무쉬 영화인데, 시를 쓰는 버스 드라이버의 일주일을 잔잔하게 그린 영화다. 나이가 들면서 시가 조금씩 좋아진다. 학교 다닐 때 문학시간에 공부한 건 1도 이해 안 되더니. 우리의 교육방식 문제도 있다. 시의 형식, 사조, 중요한 구절, 시인의 특성, 이 시어가 의미하는 것들만 외우다 보니 머리로만 이해하는 시험을 위한 교육이지, 감성을 전혀 건드리지 못하는 것 같다. 20살이 훌쩍 넘어서야 시를 조금씩 읽기 시작했는데, 정갈한 언어로 감정을 응축해서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이 영화도 시를 다루고 있다. 유치원 교사인 매기 질렌할은 취미로 시 창작 수업에 다니는데, 마침 시에 대해 천재성을 드러낸 유치원의 아이를 발견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다. 나는 미친 듯 노력했는데 누군가의 타고난 재능에 밀리는 경우... 허탈함과 좌절감이 들지만, 아이의 시가 더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은 기교 없이 쉬운 언어로 솔직하게 감정을 전달했기 때문일 것이다. 노아 바움백의 위 아 영이라는 영화도 생각났다. 본인 혹은 남들의 평가에 매달리게 되는 창작의 고통이란. 원제는 The kindergarten Teacher인데 2019년 한국에 수입 개봉하면서 '나의 작은 시인에게'라는 한글 제목을 얻었다.


Holiday / 선댄스 상영작 / 덴마크, 네덜란드, 스웨덴


플롯과 이미지의 괴리가 상당한 영화였다. 터키의 한 휴양지를 너무나 아름답게 화면에 담아내는 반면 내용이 너무나 불편한.. 젊고 예쁜 여성이 한 갱스터 보스의 여자 친구가 되고, 패밀리에 합류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다. 약간 뻔한 내용이긴 하지만,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그린 것 같았다. 정신적/물리적/성적 폭력을 당해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고, 자유를 원해도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상황. 가진 것에 비해 원하는 것과 숨길 것이 많은, 그 외의 방법을 찾을 수도 찾고 싶지도 않아하는 주인공의 심리를 볼 수 있었다. 마지막에 아름다운 터키의 바다를 배경으로, 카메라를 향해 돌아보는 장면을 보면서 책자에서 본 리뷰가 생각났다. Something is boiling up inside her. 과연 그렇게 계속 살게 될까? 그리고 대니쉬와 더치는, 온갖 유럽계 언어들을 다 섞어놓은 것처럼 들린다. 신기한 언어임. 


Wildlife / 칸느, 선댄스 수상작 / 미국


책을 원작으로 한, 폴 다노 감독의 영화다. 배우로 익숙한 그가 어떻게 감독했을지 궁금했던 차에, 좋아하는 제이크 질렌할과 캐리 멀리건 주연의 영화라 덥석 예매했다. 미국의 50년대 배경이라 사실 발음이 익숙하지 않아서 어려웠는데, 그래도 이미지로 많은 이야기를 하는 영화여서 다행이었다. 부모의 감정이 멀어지는 것을 시시각각 지켜보는 어린 아들의 관찰자적 시선으로 영화가 진행되는데, 아이에게 이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이기적인 어른들이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을 읽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캐릭터들의 성격이 변해가는 개연성이 약간 떨어지는 것 같이 느껴져서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엔딩씬이 퍽 마음에 들었다. 아들 역할은 폴 다노 감독이 마이 리틀 선샤인 정도 나이에 했으면 잘 어울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캐릭터를 연기한 Ed Oxenbould라는 배우는 앞으로 왠지 필모그래피가 생기면 챙겨볼 만한 배우인 것 같다. 2019년 수입되어 제목을 바꾸지 않고 '와일드라이프'로 개봉했다.


Mega Time Squad / 뉴질랜드 / Q&A 세션


뉴질랜드 영화제에서 뉴질랜드 영화를 안 볼 수 있나.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이라길래 리듬감을 기대했는데 역시나였다. 시작부터 비주얼과 사운드가 쾅쾅. B급 감성 충만한 범죄 액션 코미디물이라 대사로 웃기는 씬들이 많았는데 아직도 뉴질랜드 억양에 익숙하지 않아 초반에 좀???? 하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익숙해져서 웃을 수 있었다. 중국에서 온 신비한 팔찌를 차게 되면서 겪는, 허당끼 있는 날건달의 이야기인데, 동양권 문화를 엄청나게 잘 이해하고 있다거나, 희화화하는데 어느 정도의 존중이 있거나 하진 않지만 불편하지는 않을 정도여서 괜찮았다. 누가 수입 좀 해서 제대로 번역 좀 해줬으면 좋겠다. 내 B급 감성 건드림. 끝나고 Q&A 세션이 있었는데 시간 계산을 잘못해서 못 본 게 한이다.. 영화제의 백미는 큐엔에이나 지브이라고! 엉엉




여기 사람들은 영화제 하는 것도 잘 모르는 눈치였는데, 대부분의 관객들도 다 어르신들.. 와인 한잔씩 하시면서 여가생활을 풍요롭게 하시는 모습에 또 한 번 여유를 느꼈고, 나는 조용하게 영화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시간과 돈이 허락했다면 더 많은 작품을 즐겼을 텐데 참 아쉽다. 



* 2018년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재구성해 브런치에 옮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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