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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nergist Jun 03. 2020

Before SUNthing

새로운 해를 보고, 낮의 해에 녹고, 지는 해를 아쉬워하고, 달로 달래는


팩하우스 일이 끝나고 이동을 시작했다. 기스본-네이피어가 있는 호크스 베이(혹스 베이) 쪽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는데 이왕이면 바닷가 쪽으로 여행하면 좋을 것 같아서, 동해안을 따라 나 있는 고속도로를 따라 달리기로 했다. 



이런 해안고속도로를 달릴 때 가장 좋은 점은 언제나 멋진 뷰가 나타나면 차를 멈춰 서고 한참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다. 곳곳마다 좋은 뷰를 볼 수 있는 거점이 잘 마련되어있는 편이라 말없이 한참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운동도 된다. 여기서는 사람들을 마주치면 다들 자연스럽게 하이, 하고 인사를 건네거나 목례를 하는데 사실 나는 그게 좀 불편하다. 여행자가 많은 시기에는 어차피 자기 무리들과 떠드니까 괜찮지만 가끔가다 1분에 한 번씩 인사를 해야 할 때가 오면 내 안의 한국인이 고개를 들어.. 무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추워지는 계절에 점점 캠퍼/백팩커들이 줄어들어서 요즘엔 어딜 가나 나 혼자이거나 모터홈을 끌고 다니는 노부부들만이 전부라서 많이 편해졌다. 



와카타네를 지나 오호페 비치 쪽에서 하루 저녁을 묵었다. 캠프그라운드를 통해 바로 바닷가로 나갈 수 있는 아주 훌륭한 곳이었고 선셋 뷰가 아주 기가 막혔다. 다음날 아침에는 그 캠프그라운드 관리자 아주머니와, 나 말고 유일한 숙박객이었던 일본인 캠퍼를 만나서 한참 수다를 떨고는 각자 또 갈 길을 재촉했다.


화산섬이라는 화이트 아일랜드도 보일 정도로 깨끗한 날씨


나의 다음 코스는 이스트케이프를 향해 가는 거였는데, 가는 길에 또 좋은 뷰포인트들이 많아서 시동을 멈춰야 했던 게 몇 번인지 모르겠다. 이스트코스트를 따라서는 바닷가에 예쁜 교회나 성당들이 있는데, 마오리 문화와 잘 어우러졌다는 리뷰를 보고 찾아가 봤지만 겨울철이라 다들 닫았는지 조용했다. 비수기에 여행하면 이런 단점이 있다. 크흡.




Before Sunrise, 생애 첫 해돋이를 세상에서 제일 먼저


이 나라 고양이들은 사람을 너무 좋아해.. 전 집사가 될 마음이 없어요


테 아라로아까지 달렸다. 이스트코스트는 와카타네에서 테 아라로아까지 고속도로를 따라 바다 뷰를 볼 수 있지만 여기까지가 전부다. 테 아라로아에서 기스본 근처까지는 산길을 따라 달려야 한다. 꼬불 길 달리는 것쯤이야 이제 아무렇지도 않고 뉴질랜드는 산길 달리는 것도 물론 아름다운데, 이쪽이 다 벌목지역인지 나무들이 처참하게 잘려나가고 황폐한 모습만이 남아 있어서 그게 조금 아쉽다. 테 아라로아에서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함께 선셋 뷰를 보고, 포후투카와 종 중에 가장 크다는 나무도 구경했다. 그나마 이스트코스트에서 큰 마을이라더니 있는 건 포스퀘어 상점 하나, 주유소 하나, 카페 하나가 전부여서 아보카도 농장에서 일하던 때가 떠올랐다.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해돋이를 보기 위해 이스트코스트로 30분을 달렸다. 자갈길을 달리면서도 곳곳에 풀어놓은 소/말/양들을 조심해야 했는데 그 말인즉슨, 정말 상점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그 동네에도 사람이 살면서 가축을 기른다는 뜻.. 이스트케이프 올라가는 입구는 사유지였고 실제로 집 몇 채가 계단 바로 앞까지 있었다. 어떻게 그런 곳에서 살 수 있을까. 나는 항상 큰 도시에서, 편의시설들이 가까이에 있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이런 곳에서 사는 건 꽤 불편하리라는 생각만이 들었다. 게다가 통화권 이탈 지역이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텐데. 그저 버려진 집 들일뿐일까?




한 번도 어딘가에 나 스스로 해돋이를 보러 간 적이 없다. 21세기가 시작될 때도, 매년 1월 1일이 되어도, 항상 해돋이를 보며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러 바닷가로 산 정상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굳이..? 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이번에는 한번 해 보기로 했다. 이스트케이프는 날짜변경선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처음 해를 볼 수 있는 곳이라는 말을 듣고, ‘첫 시도로 아주 좋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800개의 계단을 올라가 정상에 도착하니 나 말고도 몇몇 여행자들이 더 있었고, 전날 만난 일본인 캠퍼를 또 마주쳤다. 약 10분 정도 기다려 떠오르는 해를 바라봤다. 오늘의 해를 세상에서 가장 먼저 봐도 여전히 아무 감흥은 없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뭐라도 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 남은 6개월간의 워홀 생활이 무사히 끝나기를 바란다고 속으로 외쳤다. 붉게 물들면서 밝아지는 하늘은 아름다웠는데 바람이 엄청 불어서 콧물이 질질 흐르길래 하산...





Before Sunset, 영화 같은 저녁노을


하와이 같지만 뉴질랜드. 볕이 좋아서 한참 동안 누워 책을 읽었다. 
아무데서나 멈출 수 있다는 것. 캠퍼밴 여행의 가장 큰 장점.
뉴질랜드에서 가장 긴 와프라는 톨라가 베이에도 들르고, 그 옆 쿡스코브에 갔다가 머드 진창에 빠져서 생쥐꼴을 하고 돌아왔다.



와이누이 비치를 마지막으로 들러 해 지는 것까지 보고 기스본으로 향했는데, 와이누이 비치에서의 선셋 뷰는 정말 천국을 연상시켰다. 온통 구름이 끼어 있어서 해 지는 걸 못 보는 대신 분홍색/보라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볼 수 있었고 그 아래 엄청난 파도에서 이 추운 날 서핑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니, 내가 있는 곳이 약간 현실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저녁노을이었다. 


뉴질랜드에서 가장 짧은 강이라는 투랑가누이 강. 1200미터.


해 진 후 도착한 기스본은, 뉴질랜드라기보다는 약간 아일랜드 더블린 같다는 생각이 드는 도시였다. 하루 저녁을 묵고 다음날 도시 한 바퀴를 돌았는데, 도시가 너무나 조용하고 평화로워서 이런 곳에서 살면 정말 아무런 스트레스도 안 받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어디든 스트레스는 있을 것이다…) 오래된 서점에 들어가 책을 구경하다가 2층에 카페가 있는 걸 발견하고 오랜만에 외식을 하며 기분을 내줬다. 
 






Before Midnight, 누군가와 함께 여행한다는 것


기스본을 떠나 네이피어로 가는 도중에 와이로아라는 마을에서 프리 캠핑을 하기로 했는데, 거기서 프렌치 여행자를 만났다. 캠프 사이트는 그냥 공중화장실이 딸려있는 공용주차장일 뿐이어서 캠퍼는 우리 둘 뿐이었다. 동네를 한 바퀴 함께 돌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일정이 비슷하다는 걸 알고는 함께 며칠간 여행하기로 했다. 저녁을 해 먹고, 따뜻한 멀드 와인을 끓여 마시면서 별자리를 관찰하고, 카드놀이도 하고. 자정이 오기 전까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뉴질랜드에서 숲 속 온천이라니. 걷는 길은 비가 와서 쌀쌀했지만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일 수 있어서 좋았다. 


원래 프랑스에서 물리학 선생님으로 일하던 친구라, 다음날 마이히 페닌슐라에서 하는 로켓 발사 실험을 보러 가겠다고 하기에 거기도 같이 가 봤다. 안타깝지만 기상 상황이 좋지 않았고 로켓에 문제가 생겼는지 발사는 취소됐고, 갑자기 비가 많이 내리기 시작해 우리는 근처의 온천으로 향했다. 만약 나 혼자 여행했다면 온천 따위엔 가지 않았겠지만 이것 또한 좋은 경험이었다. 다음날은 와이카레모아나 호수에 올라가서, 이 친구는 8시간 트래킹을 하고 나는 30분짜리 트래킹을 세 개 따로 했다. 
 
 

저 멀리 먼지만 한 내 리버티. 자연의 광활함을 또 한 번 느낀다. 


얼마간은 순조로웠다. 하지만 나는 항상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혼자만의 여행에만 익숙해서 이 며칠간이 약간 고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 동네에서 뭔가를 많이 할 생각이 없었는데 이 친구는... 계속 이 호수에 있고 싶어 했다. 플랜을 처음부터 같이 짰다면 좋았겠지만 내가 가진 정보가 많이 없다 보니 끌려 다니듯 여행을 했고 결국에는 서로 의견이 좁혀지지 않아 3일 후에는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 처음에는 서로가 좋은 트래블메이트였을지 모르지만 마지막에는 좋게 끝나지도 않았다. 나는 누군가와 싸움을 하는 걸 싫어해서 돌려 말하는 성격이고, 얘는 직설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다 말해야 하는 성격이었다. 얘가 화를 내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의견이 다르면 잘 들어보고 조율하면 되는 것을, 결국에는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발언까지 해가며 화를 내는 사람과 여행을 함께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 하기로 했다. 좋게 말하면 주관이 뚜렷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고집 세고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쪽에서도 모든 일을 그러려니 하는 나를 답답해했겠지만. 사람과 함께하는 일은 이렇게나 어렵다.
 
그렇게 나는 와이로아를 떠나 네이피어에 도착했다. 네이피어부터는 다음 글에. 여기는 정말 아름다운 도시다!




* 2018년 블로그에 먼저 작성한 글을 재편집해 올리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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