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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nergist May 02. 2020

멋진 리더와 함께 일한다는 것

두 번째 일자리, Te Puke의 키위팩하우스 이야기


키위 팩하우스 캐주얼 워커가 되었습니다!



키위로 유명한 뉴질랜드에서 팩하우스 일을 하다니! 

새로운 워커들과 함께 인덕션을 마치고 처음에는 Packing Line으로 들어갔다. 기계에서 미친 듯이 굴러들어 오는 키위를 박스들에 잘 펼쳐 담고, 질이 좋지 않은 키위는 버리는 작업을 했다. 단순노동이다 보니 처음에는 ‘키위를 예쁘게 잘 담자’ 에만 집중했는데, 하루 8시간 작업을 하다 보니 일이 금방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니 습관적으로 잡생각이 따라온다. 인생 전체에 대해 돌아보고,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 워낙 기계소리가 시끄럽고 키위가 쉴 새 없이 굴러오다 보니 바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과 떠들기도 거의 불가능하다. 가끔 기계가 멈추거나 쉬는 시간에만 허리를 펴고 서로들을 바라본다. 아보카도 농장에서는 그 넓은 부지에 30명 안 되는 사람들이 매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졌지만, 팩하우스에서는 100명 넘는 사람들이 일하니 하루에 한 번 마주치기도 쉽지 않다. 


나는 곧 포지션이 바뀌었다. 패킹을 며칠하고 나니 손가락 마디마디가 뻐근하고, 건조한 손 끝은 키위 털이 닿아 갈라지곤 해서 아프지만 잘 참아내고 있던 중이었다. 5일 차 되는 날, 슈퍼바이저가 따라오라고 하더니 Quality Control Booth로 데려갔다. 기계도 완벽하진 않은지, 크기/무게 선별 작업을 마친 키위들이 가끔 섞일 때가 있다. 한 박스에 들어가는 개수 오류, 사이즈 분류가 잘못된 키위들, 모양이나 상태를 체크하는 곳이 바로 이 퀄리티 컨트롤 부스다. 나는 무작위 샘플링으로 키위 무게를 재서 Under-sized 키위가 2개 이상 나오면 매니저들에게 알리고 Corrective Action을 진행하는 Weighing을 하게 됐다. 대학교 때 논문용 샘플링 배웠던 걸 예상치도 못하게 뉴질랜드 키위팩하우스에서 사용하고 있다니 참 인생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포지션이 바뀐 덕분에, 팩킹라인에 하루 종일 처박혀 있는 대신 분주하게 트롤리를 몰고 다니면서 움직이고, 많은 사람들 - 특히 키위 박스를 쌓는 Stacker들과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은 포지션이다. 평소에 많은 대화를 하진 않았지만 매일 인사하면서 하하호호 같이 깔깔댔던 슈퍼바이저가 좋은 포지션에 꽂아준 것 같아 내심 기분이 좋았다.


쉬는 날에는 주변 여행. Te Puna와 타우랑가


그러다가도 퀄리티 컨트롤 부스의 다른 일을 하게 되는 날도 있었다. 벌크 박스에 들어가는 키위 개수를 무작위로 세는 Counting 담당자가 쉬는 날이어서 대신 일을 맡았다. 기계 결함을 체크한다는 점에선 동일해서, 1시간에 한 번씩 전체 레인을 체크하고 정확한 개수가 나오지 않으면 샘플링을 계속하는 식으로 Corrective Action을 진행했다. Weighing은 라인 매니저/퀄리티 컨트롤러 등 키 스탭과 커뮤니케이션하는 일이 많다면, 카운팅은 팩커들과 가까이 있으면서 조금이나마 친해지는 계기가 됐다.


마운트 망가누이 트랙, 운동하기 진짜 좋다!


일한 지 한 달 정도가 되던 날, Weighing - Counting에 이어서 Finished Pallet Inspecter로 포지션이 또 한 번 바뀌었다. 팩커들이 키위를 박스에 담고, 그 박스를 스태커들이 나무 팔레트에 차곡차곡 쌓아 올려 정해진 숫자를 채우면, 스트래퍼(Strapper)들이 그 팔레트들이 움직이지 않도록 사방에 V보드를 대고 위에도 종이모자를 씌워 스트랩핑 기계에 넣는다. 그렇게 완성된 팔레트들에 EDI(인벤토리 관리자)들이 사이즈/농장 번호/바코드 등 정보가 적힌 스티커를 붙여놓으면, 나는 이 팔레트들이 운반될 준비가 됐는지 마지막으로 한번 더 체크하는 일을 한다. EDI 스티커와 팔레트 스티커를 비교해 사이즈, 퀄리티, 박스 종류, 농장 번호 등을 체크하고 포장이나 운반 준비가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해 서류작성을 하고 내보내는 작업. 역시나 거의 똑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거라서 일이 익숙해지니 엄청 빠른 속도로 할 수도 있고, 시간을 조절해가면서 여유롭게 할 수도 있다. 패킹을 할 때보다 손을 덜 다쳐서 좋고, 많이 걸어 다닐 수 있어서 좋다. 아이폰 건강 앱을 체크해보니 하루에 13,000걸음.. 물론 전에 일할 때는 하루에 20km, 20,000 걸음 넘게 걸을 때도 있었기 때문에 신체적으로 힘든 작업은 아니고 즐겁기만 하다. 사람들도 와 너 또 좋은 포지션으로 옮겼네! 이러다가 퀄리티 컨트롤 라인을 다 배우겠다, 라며 웃었다.
 
 인스펙션을 하다가 완성된 팔레트들을 끌고 내보내는 스트래퍼/스태커들을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기계의 힘을 빌리긴 하지만 저게 엄청 무거울 텐데, 어떻게 저렇게 하루 종일 끌고 다니지? 무게가 얼마나 될까 궁금했다. 벌크 박스를 기준으로 한 박스에 최소 10.**kg 어떤 때는 11kg가 넘기도 했다. 박스가 한 층에 10개, 10층으로 쌓아 올리니까 결국에는 한 팔레트에 벌크 박스 100개가 들어가는데 그 말인즉슨 한 팔레트에 1톤이 넘는 키위들이 실려 있다는 것이었다. 그걸 끌고 다니는 스트래퍼들도 신기하지만, 내가 하루에 팔렛인스펙션 하는 종이를 25장 이상 쓰니까 (한 장에 팔레트 8개씩 작성), 200개 이상의 팔레트가 하루에 완성된다는 이야긴데 그럼 200톤? 하루에 200톤씩 키위들이 팩킹된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아보카도 농장에서도 비슷한 것을 느낀 적 있었다. 내가 일한 곳이 (apparently) 뉴질랜드 아보카도 농장 중 가장 넓은 곳이라고 했는데, 쉐드에 걸린 지도에 55ha라고 쓰여있길래 별생각 없이 평수로 바꿔봤더니 (학창 시절 a/ha 배운건 기억도 안남ㅋㅋ) 16만 평이 넘는 농장이었던 것. 하아.. 그 와중에 아보카도 나무는 가로 5미터/세로 3미터 간격으로 끝도 없이 심어져 있고, 다 자라면 한 나무에서 1톤 이상을 생산한다고.. 숫자의 개념을 확실히 바꿔주고 있다.





운 좋게 걸린 캠프그라운드 이야기 



캠프그라운드가 약간 신기하다. 컨트랙터가 연결해준 프라이빗 캠프그라운드인데 (어불성설) 정식 홀리데이파크로 등록된 곳이 아니라 아는 사람들만 알음알음 이렇게 거쳐서 오는 것 같다. 여기 묵는 애들은 다 키위피킹이나 팩하우스 일을 하고 있다. 가격도 엄청 저렴한데 최대 15명 정도만 살 수 있다. 엄청 붐비지는 않지만 샤워/화장실이 하나라서 처음에는 약간 불편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고 다들 붐비는 시간을 알아서 잘 피하고 서로의 차례를 알기 때문에 이제는 별로 붐비지 않는다.


캠프그라운드 지천에 오렌지나무. 마트 가서 오렌지 사먹는 사람이 바보다!


진입로는 야자나무들로 가득해서 아주 이국적인 데다가, 마당에 레몬/아보카도/귤/야자/바나나/마카다미아/피조아/호두 등 엄청 많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는데 맘껏 따 먹으라고 하더라. 돈이 필요해서 이 캠프사이트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그냥 집 하나에 아주아주 넓은 마당이 남아도니까 워홀러들을 받아주는 것 같다. 데이오프 때는 느지막이 일어나 시리얼을 씹으며 침구를 정리하고, 캠프그라운드를 돌아다니면서 과일들을 줍거나 딴다. 내 차 근처에 떨어져 있는 호두 주워 먹기가 대부분이지만, 키 작은 다른 애들을 위해 (나도 작지만) 여기저기 올라가 막대로 아보카도, 오렌지 등을 따 주기도 했다. 

 

농장에서 일할 때도 보지 못한 사이즈의 아보카도 나무와, 태어나서 처음 본 바나나 나무
마카다미아 나무 아래 알맹이가 엄청 많은데 까 먹을 방법이 없다
나는 호두나무 아래에 산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호두가 떨어져 차를 후두둑 치고 가는데, 다음날 주워서 아침으로 먹는다 (ㅋ)
내 차에서 바라본 선셋 뷰와 닭 뷰.


있을 건 다 있는 동네지만 다 작아서 대부분의 시간을 캠프그라운드에서 보내거나 아예 테푸케(티푸키) 밖으로 나가는 일이 많다. 진입 초반에 웰컴 사인을 보면 Kiwifruits capital of the world라고 쓰여 있을 정도로 키위에 대한 자긍심이 넘치는 것 같다. 로토루아 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시카 팩하우스 옆에 거대한 키위 모형도 있고. 키위 트럭들이 왔다 갔다 해서 괜히 운전을 더 조심하게 된다. 데이오프때 근처 숲 워킹트랙에 가려고 달리다가 본 No.1, No.2 로드는 이름이 신기할 뿐만 아니라 주변이 다 키위 생산지(Grower)다. 키 큰 나무들을 울타리 삼아 농장들이 끝없이 줄지어 나오는데, 각 농장마다 키위를 보내는 팩하우스 이름이 쓰여 있는 게 신기했다. 여기저기 달리면서 우리 팩하우스 이름 찾기도 해 봤는데 넘버원투로드는 주로 시카나 이스트팩이 가까워서 그리로 보내는 듯. 
 
 사람들이 모여 살다 보니 이런저런 일이 생긴다. 물론 학교 때 서비스직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세상엔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 많단 건 알았지만 그건 우리나라 사람들로 한정적이었던 것과 달리 외국에 나오면 다양한 또라이를 또 만날 수 있다. 태국 여자애를 스토킹 하고, 페트롤 쉐어링 가격 문제를 일으키고, 유러피안은 레이시스트라고 주장하고(본인도 유러피안이면섴ㅋㅋ), 유독 사이가 좋지 않던 독일 애한테는 나치즘 언급까지 하고 떠난 터키쉬를 보면서, 다들 돕고 사는 여행자들 사이에서도 조심할 건 조심해야겠구나 싶다.




키위 팩하우스의 두 얼굴


쉬는 시간에 구워준 스콘과, 9일 연속 일했다고 팩하우스에서 간식으로 쏜 피자 (ㅋㅋ)


팩하우스의 좋은 점.


1. 깨끗한 카페테리아
 농장에선 마땅히 쉴 곳이 없으니 햇볕 아래 뜨겁게 데워진 차에서 쉬면서 음식을 먹거나 다들 창고 바닥에 앉아있었다. 계약이 바뀐 이후에는 스모코 테이블이 만들어져서 거기서 쉬기도 했지만. 일을 하다 보면 손도 금방 더러워지는데 물이 안 나올 때도 있어서 꼭 물티슈를 갖고 다녔고, 화장실은 수세식인 데다 너무 멀어서 가기도 애매했었는데 여기는 쉬는 공간이 아주 잘 마련되어 있어서 좋다. 화장실도 깨끗하고, 점심을 따뜻하게 먹을 수 있도록 푸드 워머와 전자레인지도 준비되어 있고, 티와 커피는 항상 마실 수 있으며 가끔 스모코때 스콘도 구워준다! 너무 맛있어서 욕심부릴 뻔했다.
 
 2. 다들 웃으면서 일하는 것 
 어찌 됐건 10시간씩 팩 하우스에 처박혀 매일 일하는 건 지겨울 법도 한데, 여기 사람들은 다들 즐겁고 행복해 보인다. 피곤하거나 지루해하거나 힘들어 보이는 사람이 없다는 게 신기하다. 이 지역 사람인 경우 가족이 같이 일하는 경우도 많으며 키위 워커인걸 되게 자랑스러워하는 느낌이 든다. 웃으면서 일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아무래도 근력이 좋고 성향이 파워풀한 스태커들이 주로 분위기를 잘 이끌어나가는 것 같다. 그들이 깔깔 웃고 노래 가사를 막 바꿔서 엉망으로 부르면 괜히 팩커들이나 그레이더들까지 웃음 짓곤 한다. 웃으면서 일한다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매일 똑같은 일이더라도 잠시나마 웃음으로써  얻게 되는 에너지가 굉장히 큰 듯. 나는 왜 내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살면서도 잠시나마 웃을 일이 없었는지 되돌아보게 되더라. 
 
 3. 노래 들으며 일할 수 있는 것 
 농장에서는 트랙터가 왔다 갔다 하니까 위험하다고 이어폰으로 노래를 못 듣게 했었는데, 팩하우스에서는 큰 스피커를 통해 라디오를 틀어준다. 우리나라도 일하면서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건 불변의 법칙인가 보다 했음. 항상 듣는 스테이션에서 주로 최근 히트곡들, 업템포들을 틀어주기 때문에 돌리다 보면 이건 빼박 노동요의 채널이라는 걸 알 수 있다. 


 4. 불규칙한 데이오프 
 매일매일 팩하우스 핫라인에 전화를 걸어서 내일 일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비가 오는 날에는 다음날 거의 일이 없을 거라고 예상하면 됨. 내일을 예측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재밌다.
 
 5. 남 걱정 
 나쁜 의미가 아닌, 좋은 의미의 남 걱정을 많이 해준다. 물론 이건 영어권에서 기본으로 깔린 How are you? 문화이기도 하지만. 키위 무게 재려고 박스들을 트롤리에 계속 싣고 돌아다니는데, 굳이 나는 스태커들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내 손 닿는 범위 한에서는 직접 팔레트에서 박스를 빼오고 다시 쌓아 놓고 했더니 보는 사람들마다 스태커들한테 부탁해, 너 그러다가 다쳐서 일을 못할 수도 있잖아, 라고 걱정해준다. 한국의 정수기 물통 이야기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마오리 전통음식 항이 광고를 보고 나도 주문했었는데, 며칠 있다가 돈을 돌려줬다. 맛이 없었다고;; 이렇게 정직할 수가.

 

조금 싫은 점. 


1. 불규칙한 데이오프와 노래
 좋기도 하면서 싫기도 한 점이다. 퀸 생일 연휴 전으로 9일 연속 일했더니 아주 어깨가 빠질 노릇이었다. 게다가 데이오프가 퍼블릭홀리데이라 샵이나 도서관이 다 닫아버려서 할 게 없다. 아보카도 농장에서 43.5시간 정해진대로 일하고 매주 똑같은 페이슬립을 받았었던 것에 너무 익숙해서 그런지, 불규칙한 데이오프는 매주 페이슬립도 달라져서 하나하나 따져봐야 한다는 게 좀 귀찮기도 하다. 하루에 10시간씩 일하니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들도 지겨워지기 시작했는데, Six60, Adele, Bruno Mars, Charlie Puth 등 여기 뉴질랜드에서 인기 있는 아티스트들 노래는 지겹게 나오고 Ed Sheeran Happier는 심지어 3번 넘게 들은 날도 있다 (ㅋㅋㅋㅋㅋ) 


 2. 많은 워커들 
 10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의 비율을 따져보자면 로컬 반, 백팩커나 아시안 이주민들 반인 것 같다. 백팩커들은 come and go, 게다가 누가 데이오프를 가지는지도 잘 모르니까 그냥 그날그날 보이는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그게 며칠 반복되고 얼굴이 익숙해지다 보면 그제야 서로와 조금씩 친해지는 것 같다. 아보카도 농장에서도 느꼈었지만 워낙 사람들이 왔다 떠났다 하니까 로컬들도 크게 정 붙이지 않는 느낌이 든다. 백팩커들도 그렇고. 
 
 3. 내가 뭘 잘하는지 너무나 잘 깨닫게 해 줌 
 나는 뭔가를 배우고 뭔가에 익숙해지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고, 그렇게 한번 시작하면 책임감을 가지고 꾸준히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런 단순 반복 노동에 한번 익숙해지면 아주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할 수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그걸 확실하게 알게 돼서 너무 싫다. 게다가 웨잉이나 카운팅을 할 때는 주로 서류 작업이나 스프레드시트 같은 매니징 프로그램을 다루는데, 그것들도 내가 어릴 때부터 잘하는 분야 중의 하나고. 꼼꼼함과 꾸준함이 나의 장점이 될 수는 있으나, 나는 항상 그것들보다는 창의력을 더 가지고 싶었다. 물론 꼼꼼함과 꾸준함이 단점이 될 수는 없지만 내가 하고 싶은 분야에서 막강한 강점이 되지도 못한다는 게 너무나 슬픈 일이다. 이건 앞으로도 잘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4. 이상한 걸 아낌 
 미친 듯이 굴러들어 오는 키위들을 박스에 담거나 트레이에 예쁘게 세팅하다 보면 손들이 아작나기 마련이다. 나는 굉장히 손이 차고 건조한 편이라 쩍쩍 갈라져서 피를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팩하우스에는 대체로 손이 멀쩡한 애들이 없더라. 처음에 인덕션 할 때는 일할 때 장갑을 제공한다더니 알고 보니 플라스터(밴드)를 받으면 그것이 빠지지 않게 장갑을 준다는 말이었다. 근데 밴드를 받기 위해 슈퍼바이저를 찾으면 그들은 한쪽 구석에 마련된 first aid kit 옆 플라스터 레지스터에 이름을 적게 한다. 대체 뭘 아끼는 거야 이놈들아.. 미친 듯이 버려지는 핸드타월이나 좀 아끼라고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화재경보로 느낀 리더의 중요성


출근길 붉게 물드는 하늘, 햇빛이 야자나무를 반짝이며 물들이는게 참 예뻤다. 그리고 일찍 끝난 날 여유롭게 바라본 저녁 하늘.


지루하던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못 들어 본 알람이 울렸다. 갑자기 기계가 작동을 멈추고, Fire Alarm이라는 메시지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다들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밖으로 대피했다. 두 라인이 다 돌아가는 날이라서 사람들이 주차장에 꽉 들어찼다. 나는 이제껏 한 번도 화재경보 알람이 울리면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다. 학교에서도 그랬고 일할 때도 그냥 누군가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웠겠거니 하고 무시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였으면 그냥 간단히 무시했을, 혹은 ‘뭐야 뭐야’ 하고 불씨의 근원을 조금 찾다가 다시 일로 복귀했을 화재경보 알람에 다들 밖으로 대피한 것에 약간 문화충격을 받았다. 미친 듯이 먼저 나가려는 게 아니라, 마치 학교에서 화재경보 연습을 하듯이 다들 천천히 순서를 지켜 문으로 대피하고 밖에서도 팩하우스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매니저의 다음 신호를 기다렸다. 진짜 불이 났던 건지 아니면 누군가의 실수였는지는 이야기가 없어서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느 정도 상황이 파악되고 안정된 후에야 다시 들어갈 수 있었다. 이틀 후에 퇴근 15분을 앞두고 또 한 번 화재경보가 울려서 대피했다. 이번에는 다들 개이득이라며 웃었지만 양치기 소년처럼 오작동이라고 무시할 법 한데 또 한 번 대피하는 것에 놀랐다. 
 

요즘은 사진 찍을 일이 잘 없어서 앨범에 담긴 게 별로 없다. 아침저녁 출근길에 하늘 바라보다가 예쁘면 찍는 게 다인 듯.


화재경보 대피를 통해서 한번 더 새삼스레 느끼게 된 것은 리더의 자질이다. 대피를 하는 동안 슈퍼바이저(혹은 다른 관리자급)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각 코너에 자리해 대피로를 알려주고 사람들이 안전하게 나가는지 체크하고 도와줬다. 나는 평소에도 이곳 슈퍼바이저들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껏 만난 직급 높은 사람들/리더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유병재 작가가 ‘병신멘토’를 설정하라고 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었는데, 사실은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저런 건 배우지 말아야지 라는 단점만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반면에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은 ‘저런 점들은 꼭 배워야겠다’ 싶은 것들이 많다. 아보카도 농장에서 일하던 슈퍼바이저(직급은 foreman이지만)는 비록 애들에게 욕은 좀 처먹을망정 (남자 백팩커 애들한테만 못되게 했다고 들었음) 일적인 면으로는 훌륭한 사람이었는데, 여기서 일하는 슈퍼바이저 및 관리자급 사람들은 일 적으로만 훌륭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챙길 줄 안다. 워커들 이름을 전부 알려고 노력하고, 그들이 오늘 어떤 컨디션인지, 이제껏 어떤 삶의 궤적을 그리고 살아왔는지 궁금해하고, 지루한/힘든 팩하우스 일을 하면서도 웃을 수 있도록 농담을 건네준다. 그리고 차별 없이 일을 준다는 것도 신기하다. 예를 들어 내가 하고 있는 일 같은 경우에도 커뮤니케이션이 좀 덜 필요한 팩킹보다는 영어 사용이 좀 더 능숙한 친구들에게 줄 것 같은데, 여기는 그냥 무작위로 사람을 뽑아간다. (내가 언제 그만두는지도 물어보지 않는다) 
 
 물론 그들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다. 집에 가서 세탁기 안에 양말을 뒤집어 넣어놨다가 혼이 난다든지, 팩하우스 2층 사무실에서는 완전히 다른 독재자의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그런 걸 문득 생각하다가 저렇게 훌륭한 리더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완벽하지는 않다는 사실이 떠올라, 나한테도 그런 것을 강요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덜렁거리는 점을 많이 지적받았었다. 꼼꼼한 척하고 모든 걸 완벽히 해내고 싶어 하지만 바꿀 수 없는 성격이라는 게 있다. 잠시 정신줄 놓으면 실수하고, 그렇게 실수를 하고 나면 나 자신에게 엄청나게 실망한다. 이게 나의 자존감 도둑이다. 이 등신아, 좀만 정신 차렸으면 될 것을, 하는 식으로 별것 아닌 것에도 나를 비난하고 완벽하지 못했던 자신을 깎아내린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는 것, 나에게 좀 더 관대하고 자비로워도 된다는 것을 뉴질랜드 키위 팩하우스에서 깨닫는다.
 



시즌 오프, 수고했어!


갈 때마다 다른 파파모아비치. 휴일 때마다 가서 도미노피자를 먹곤 했다.


마트에서 흔히 사 먹는 물렁한 키위는 이미 잘 익어서 먹힐 준비가 된 아이들이고, 우리가 팩킹하는 키위들은 아주 딱딱해서 수출되는 중간에 익는다. 물렁한 키위들을 골라내다 보니 시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하게 되었지만, 예상보다 시즌이 조금 길어져서 다행이었다. 마지막 일하는 날엔 아침부터 소풍 가는 아이들처럼 엄청 신나 했고, 라인 1/2 둘 다 점심시간에 맞춰 끝났다. 평소에 듣던 똑같은 사이렌(Grower change 때마다 사이렌을 튼다)인데 마지막이다 보니 다들 엄청난 환호를 터트리며 미친 듯이 마지막으로 팩킹! 


왠지 성수동이나 한남동에 이런 분위기 펍 있을 것 같쥬
마지막까지 고생하는 키 스탭들


끝나고 다들 정리하고, 사진 찍고, 밖으로 나가서 비비큐 파티를 기다렸다. 마지막 날이라고 팩하우스에서 비비큐를 준비해줬다며 가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근데 사실 지난번에도 점심시간에 구운 소세지와 양파, 빵 등을 준비해준 적이 있어서 나는 그 정도를 예상했는데 이번엔 정말 제대로 된 비비큐였다. 양고기/소고기/소세지/매쉬포테이토/코울슬로/구운양파/달걀반숙과 버터 바른 빵까지 준비된 완벽한 비비큐, 그리고 단짠 스낵들과 소다까지! 한 번도 스토리지 쪽에는 들어가 본 적 없는데 키위 빈으로 스탠딩 테이블을 만들어놓고 엄청 큰 스피커로 음악도 빵빵하게 틀어놓으니, 일부러 공장 스타일로 만든 펍처럼 느껴졌다. 음식도 정말 맛있었고 디저트로 과일 샐러드와 크림을 얹은 치즈케이크까지! 마지막까지 고생하는 팩하우스 스탭 전체에게 너무 고마웠다. 시즌 내내 고생한 워커들에게 제대로 대접해주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특히 라인 매니저는 정말 존경할만한 사람이었기에 마지막으로 정말 감사했다고 말을 전하고 왔다. 사실 시즌 오프 전에 이분이 나를 따로 불러서 너 시즌 끝나면 뭐해, 계속 여행할 거야? 우리가 시즌 후에 너한테 줄 일이 있는데,라고 했었는데 HR 담당자가 나한테 컨택을 안해서(ㅠㅠㅋㅋㅋㅋ) 마침 지겨워진 김에 그냥 떠나기로. 영화 제목처럼, 박수칠 때 떠나자.


물렁한 키위 많이 가져왔다 하핳


캠프그라운드로 돌아오는 하늘이 너무 아름다웠다. 운전 중이라 사진을 찍지는 못했지만 티푸키에서 머무는 6주 중 가장 아름다웠던 하늘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왜냐? 데이오프때는 항상 비가 왔고, 비가 오지 않는 날은 팩하우스에 갇혀있느라 하늘을 볼 시간이 없었으니까 (ㅋㅋㅋㅋ) 그렇지 않아도 너무 아름다운 하늘에,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약간 울적했다. 6주 동안 일한 건 푸케누이나 여기나 똑같지만, 푸케누이에서는 계속 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떠난 거였고 여기는 시즌이 종료돼서 다들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거니까. 하지만 지난번에 느꼈던 대로 내가 한 곳에 머물 수 있는 건 4-6주가 최대치인 것 같다. 일이 지겹기도 하지만, 익숙해질 때쯤 돼서 떠나는 것이 여행을 진정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하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 마지막 주에도 일하면서 계속 내가 뭔가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뉴질랜드 워홀 생활 5개월 차에 들어서다 보니 영어를 쓰는 환경일 뿐이지 내가 한국에 있는지 뉴질랜드에 있는지 잘 구별이 안 갈 정도로 여기 생활에 익숙해졌고, 모든 게 그냥 반복이었다. 5년 전 런던 생활을 할 때 중간에 느꼈던 향수병인가 라고 떠올려보니 한국이 그립지는 않은 걸로 봐서 그건 아니다. 그냥 한 곳에 정착해 일을 하며 안정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여행이 중단됐기에 빨리 떠나야 한다는 압박감, 떠나면 추운 겨울 또 다른 일거리를 찾기 힘들 거라는 불안함이 공존했던 복잡한 감정들인데, 역시 호르몬의 노예. 어쨌든 다들 너무 고마웠던 테푸케, 또 하나의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 2018년 워홀 중 블로그에 작성했고, 다듬어서 브런치에 다시 올리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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