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다르에서 장보기, 크로아티아 맥주 이야기
플리트비체에서 마음껏 숲의 기운을 받았다면, 이젠 바다내음을 맡을 차례.
바다로부터의 빛과 소리를 동시에 보고, 들을 수 있는 도시 자다르(Zadar)에 도착했다. 사실 자다르라는 도시의 이름마저 생소한 사람들이 꽤 많을 것이다. 크로아티아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건 방송의 힘이었다. <꽃보다 누나>를 보고 크로아티아 여행을 떠난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이고, 나 역시도 그들 중 하나니까. 하지만 여배우들의 크로아티아 여행 일정에 자다르는 없었다. 크로아티아 여행의 국민코스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도 자그레브를 시작으로 하여 플리트비체, 스플리트를 거쳐 두브로브니크에서 여행을 마친다. 꽃보다 누나들도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국민코스는 너무나 아쉽다. 유명하지 않기에 정보도 많이 없고, 그래서 기대도 전혀 하지 않았던 자다르. 여행이 끝난 지금은 크로아티아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도시가 되어버렸다. 자다르에 오기를 정말 잘했다. 정말.
고대 로마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휴양도시 자다르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지역의 주도이자 고대 로마시대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도시 자다르.
중세시대에는 로마 교황청에서 직접 관리했을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도시였던 만큼 긴 세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자다르 구석구석에서는 로마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유적을 찾아볼 수 있다. 게다가 푸른 아드리아 해를 그대로 품고 있는 항구도시로,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물론이고 특히 유럽인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는 휴양 명소이기도 하다. 그렇다. 아직까지 아시아인들에게는 낯선 자다르이지만 유럽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진정한 여유와 휴가를 즐길 만큼 유명한 도시이다. 시원한 파도가 들려주는 아름다운 하모니 '바다 오르간' 이 연주하는 묘한 음악소리와, 낮의 강렬한 태양으로부터의 에너지를 품었다가 해가 지고 컴컴한 어둠이 내리면 비로소 그때서야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태양의 인사'까지. 관광과 휴양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도시가 어디 그리 흔한 일인가.
짐 정리를 대충 끝내고 장도 볼 겸 가볍게 숙소 주변 산책을 나섰다.
푸른 바다와 등대, 낚시를 하는 사람들까지 딱 바닷가 도시의 전형적인 느낌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생각했던 것보다 꽤 많이 쌀쌀한 4월의 크로아티아는 한국 가을 날씨와 비슷했다. 그래도 차갑다는 느낌보단 시원함에 조금 더 가까운 바람이 내 뺨에 스친다. 플리트비체의 숲 속에서 느꼈던 공기가 초록초록한 맑은 느낌이었다면, 자다르에서 느껴지는 공기는 바다의 짠내가 아주 딱 기분이 좋을 만큼 약하게 섞인 푸릇푸릇한 느낌이랄까.
사실 자다르를 시작으로 크로아티아 여행은 전체적으로 바다를 빼놓고서는 이야기할 수가 없다. 내가 머물렀던 모든 도시들이 다 바다를 끼고 있으니 말이다. 아래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바다 특유의 짠내랄까, 습기를 가득 머금은 공기랄까 아무튼 해양도시스러움을 점점 더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자다르는 마치 바다 위에 떠있는 섬처럼 3면이 바다로 되어있는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바다스럽지도 너무 내륙스럽지도 않아 그냥 아주 딱 안성맞춤이었다. 적당히 관광할 수 있는 유적지도 있고, 음식 냄새가 아주 코끝을 자극하는 많은 레스토랑과 노천카페도 있고,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은 웬만큼 구비된 커다란 마켓도 있고, 바다라는 거대한 자연도 있으니 뭐 더 바랄 것이 없다.
천천히 산책하던 발걸음을 마켓 방향으로 돌려본다.
플리트비체에서는 호텔에 머물렀는데, 자다르에서는 아파트에 머물게 되었다. 취사가 가능하다는 장점을 살려 오늘 저녁은 현지 마트에서 장을 봐서 해 먹기로 결정을 했다. 우리나라에도 대표적인 대형 마트가 몇 군데 있듯이, 크로아티아에도 콘줌(KONZUM)이라는 이름의 대표 슈퍼마켓이 있다. 자그레브와 같은 대도시에는 디오나(Diona)와 프레흐라나(Prehrana) 혹은 오스트리아 체인슈퍼마켓인 스파(SPAR)나 빌라(Billa)도 있다. 비록 아담한 크기의 자다르이지만 콘줌은 여러 군데에 있으니 여행객들은 각자의 숙소 근처의 콘줌을 이용하면 편리할 듯하다. 지점마다 모두 다르겠지만 대략적인 영업시간이 월~토요일은 오전 7시부터 오후 9시까지, 그리고 일요일은 오전 7시~오후 1시라고 한다. 한국의 대형마트에 비해서 일찍 영업을 시작하는 만큼 일찍 문을 닫으니 영업시간을 잘 고려하여 사전에 미리 장을 봐 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한국의 슈퍼마켓과 똑같이 생겼다.
빨간 바구니를 옆에 끼고서 천천히 매장 안으로 몸을 들이밀어본다. 마치 이곳에 사는 사람처럼, 이곳이 내가 살고있는 동네인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가장 먼저 보이는 과일 및 채소코너. 여기가 한국인지 크로아티아인지 분간이 잘 안 갈 만큼 팔고 있는 종류도 상품을 진열해둔 느낌도 정말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이질감보다는 동질감이 더 느껴졌던 자다르에서의 장보기. 단지, 가격표를 볼 때에만 이곳이 크로아티아라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달까. 휴대폰 계산기를 열어 열심히 환율을 적용하여 계산을 해가며 장을 본다. 전체적인 물가는 한국보다 엄청 싸지도 않고, 서유럽 국가에서 느끼는 것만큼 비싸지도 않다.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보다는 상대적으로 약간 더 저렴하다는 표현이 더 맞는 듯하다. 채소나 과일 종류는 한국과 비슷한 느낌이고, 주류나 육류 그리고 해산물은 훨씬 저렴한 편이다. 한국에서도 마트가기를 좋아하는 나는 여전히 외국에서도 마트 쇼핑은 너무나 즐겁다. 상대적으로 맥주 종류가 적은 한국에 비하여 가까운 일본도, 먼 유럽도 늘 맥주 종류가 다양하다는 점이 가장 나를 흥분시켜주는 점이기도 하다. 난 맥주를 아주 사랑하는 사람이라 여행지에선 1일 1맥주가 아닌 1식 1맥주를 즐긴다. 그런 나에게 다양한 선택권을 주는 유럽의 슈퍼마켓 주류 코너는 파라다이스인게지.
크로아티아어로 맥주는 피보(Pivo)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일반적인 식당을 예로 들었을 때 메뉴판 마지막에 [주류]라는 글자 아래로 소주, 맥주, 막걸리, 탄산음료까지 한 번에 쭉 쓰여있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액체 종류가 많아서인지 조금은 다름을 볼 수 있다. 똑같은 술이라 할지라도 와인은 와인코너에, 맥주는 맥주 코너에 그리고 탄산음료나 에이드와 같은 비알코올류는 보통 음료코너에 나뉘어서 적혀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니 크로아티아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와인은 Vina, 맥주는 Pivo라는 사실을 살짝 염두에 둔다면 메뉴판 읽기가 조금은 쉽지 않을까.
크로아티아 맥주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맥주는 1697년에 생긴 오주스코(Osjecko). 라스토케 편에서 잠깐 소개를 했었는데, 술맛이 약간 나는 레모네이드라고 내가 표현했던 레몬맥주가 바로 크로아티아 1위의 맥주 생산업체인 Osjecko(크로아티아 어로는 오스예츠코라고 읽는다)에서 만든 맥주이다. 그 뒤를 이어 카를로바츠코(Karlovacko) 사의 레몬맥주도 아주 인기가 많다고 한다. 레몬 맛이 아니어도 오렌지, 라임 등의 맛도 있고 과일맛이 없는 일반 맥주도 물론 있다. 한국인들에게는 2위 기업인 카를로바츠코 사의 맥주가 더 인기라고 하는데, 개인적인 취향으로 난 오주스코에 한 표 던진다.
자다르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지 않아 가볍게 오늘 저녁 한 끼에 필요한 만큼만 장을 봤다.
레몬맛과 자몽맛 두 가지 모두를 맛보고자 오주스코 맥주를 두 병, 아침에 빵과 함께 마실 애플주스도 샀는데 주스마저도 다양한 크로아티아의 슈퍼마켓에서 그냥 감에 의존해 맛있게 생긴 느낌의 주스를 골랐었다. 결과는 매우 성공적. 100% 리얼 사과가 들어갔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입에 맛있다면 그거로 충분한 거 아니겠는가. 어쨌든 정말 맛있는 애플주스였다. 그리고 오늘의 저녁 메뉴인 스테이크를 위해서 버섯과 양파도 구매했다. 버섯은 그냥 평범한 버섯이었으나, 양파가... 정말 눈물이 나게 이렇게 심하게 매운 양파는 태어나서 처음이다. 엄청나게 딱딱해서 손질이 어려운 것은 물론이오, 눈물 나게 맵다. 한참을 울었네, 허허. 주전부리용 과자도 한 봉지 골라보았고, 물론 주인공인 스테이크용 소고기도 샀다. 크로아티아에서 육류를 구입하기는 정말 누워서 떡먹기다. 글자를 몰라도 전혀 문제 될 것은 없다. 모든 육류가 담긴 팩 위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으니 말이다. 소고기는 소 그림이, 돼지고기는 돼지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게 전부가 아니다. 어떤 부위를 잘라서 담아놓은 것인지까지 색상으로 표시가 되어있다는 점. 요리조리 잘 살피며 소의 등심을 골랐고, 그렇게 해서 오늘 저녁의 메인메뉴는 크로아티아 산 소고기 등심 스테이크 되시겠습니다.
나의 여행 동반자는 열심히 스테이크를 굽고 난 한국에서 가져온 밑반찬들을 꺼내고 수저를 놓으며, 오늘은 한식과 크로아티아 현지식의 조합이라며 신나게 식사준비를 하고 있는데 창밖으로 서서히 해가 저물기 시작한다.
너무나 아름다운 자다르의 일몰이다. 자다르가 크로아티아에서도 매우 서쪽에 치우쳐진 위치에 있는 도시이기도 해서 특히나 일몰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고 하던데 그 멋진 풍경을 사랑하는 이와 함께 볼 수 있음에 감사한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오지 않는 자다르지만 들른다 하더라도 플리트비체에서 스플리트로 내려가는 길에 잠깐 머물다 가던지, 아니면 스플리트에서 당일치기로 왔다가는 여행객들이 많다. 그렇게 짧은 시간만 허락하기에는 황홀하기 그지없는 자다르의 일몰. 조금 더 가자면 이런 밤 풍경은 처음이다 싶을 정도로 온몸이 짜릿해져 오는 자다르의 야경도 보지 않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너무 아쉽다. 정말이지 시간을 일정을 쪼개고 또 쪼개어도 자다르에서 도저히 숙박까지 하기엔 일정이 여의치 않다 하시는 분들도 조금 늦은 시간까지 반드시, 꼭, 자다르에 머무시기를.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선물 같은 일몰로 하루를 마무리하시길. 크로아티아 여행을 준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조언해주고 싶은 여러 가지 팁 중의 하나이다.
어느샌가 수평선 아래로 해가 숨어버렸다.
해는 떠있는 순간에도 우리에게 빛을 선사해주지만 지는 순간에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을 주고, 바다밑으로 사라지고 난 순간에도 붉게 물든 여운을 남긴다. 멋진 노을을 사랑하는 나의 여행 동반자와 함께 나란히 숙소 테라스에 서서 바라본다.
오늘도 너무나 "행복하였노라"라고 이야기 나누며 우아한 와인 잔 대신 오주스코를 따른 평범한 맥주잔으로 건배를 한다. 왠지 이곳은 우아함보다는 평범함이 더 어울리는 장소니까. 평범하다는 건 그래서 더 마음을 열기가 쉽고, 친근하고, 아늑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아무런 기대도 없이 왔던 크로아티아의 작은 한 도시가 그렇게 서서히 나에게 평범하게 다가온다. 아쉽지만 아쉽지 않은 자다르에서의 행복한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