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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혁란 Dec 07. 2023

오브프레드, 소유격 전치사
Of로 이름이 붙여진 여자

시녀 이야기(The Handmaid's tale)를 피 묻히면서 읽었다 

“내 이름은 오브프레드. 다른 이름이 있었지만 이제 그 이름은 금지됐다. 지금은 너무 많은 것들이 금지됐다.”My Name is Offred. I had another name, but It’s forbidden now. So many things are forbidden now. 


이렇게 처연한 자기소개를 본 적이 없다. 짧은 이름 소개 한 줄에 내 이름, 다른 이름, 그 이름이 다 들어있다. 원래의‘다른 이름’은 금지되었기 때문에 언급조차 못하고.  

새빨간 피의 색깔로 만든 옷을 제복으로 갖춰 입은 여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옆 눈으로 보면서 숨죽인 목소리로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데, 세상에. 모든 여자 이름이 오브Of로 시작한다. 성도 없고 중간이름도 없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괴이쩍은 작명법이다. 

오브프레드Offred, 오브글렌Ofglen, 오브워렌Ofwarren, 오브웨인Ofwayne, 오브찰스Ofcharles, 오브다니엘Ofdaniel, 오브엘리스Ofellis. 끝없는 오브의 행렬이다.  


아버지가 항렬에 따라 지어준 이름을 가슴에 달고 첫 등교를 시작했다. 그 이름을 몇 번이나 말하고 쓰고 불리고 살았을까. 영어이름은 미셸로도 줄라이라고도 지어보았다. 미셸은 좋아하는 비틀즈의 노래제목이었고 줄라이는 단지 ‘줄라이 모닝’이라는 노래가 좋아서 7월로 붙인 거였다. 싱할러를 조금 할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아말리라는 이름을 지어가졌고 탄자니아를 다녀와서는 은주리 사나로 불러달라고 했다. 은주리 사나Nzuri sana 라는 말은 스와힐리어로 ‘예쁘다’, ‘좋다’, ‘잘 한다’라는 뜻이라기에 덥석 받아 안았다. 네팔여행에선 네팔어로 여왕이 라니라기에 내 이름은 라니라고 천연덕스럽게 소개했다. 이런 모임에선 이렇게 저런 동아리에선 저렇게 별명으로 꽃 이름으로 영화주인공 이름으로 종횡무진, 금지를 명받은 적이 없었다.   


내 이름을 그때그때 바꾸어보는 것은 내 맘대로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수시로 바꿨다. 한시적으로 장소와 운율에 맞춰 의미가 있든 없든 자유롭게 이름을 붙여보는 건 오로지 나의 선택이어서 경쾌했다. 각종 카페에 가입할 때도 그때그때 마음에 잡힌 단어나 좋아하는 사물을 가져와 이름을 지어서 붙였다 떼곤 했다. 스스로 이름을 지어 자기소개를 하면서 적재적소, 정체성을 바꿔보고 살아보는 것이 설레고 좋았다. 내 이름들은 잠깐 부르고 기억하다가 가볍게 잊었다. 이름은 목숨 걸 만큼 중요하지만 때론 사소하기도 하니까. 요즘은 사주를 보거나 성명학을 공부해서 좋은 이름으로 개명을 하는 것이 꽤나 수월하다기에 정식으로 이름을 바꿔볼까 생각도 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 <시녀 이야기>를 읽기 전까지. 책을 다 읽고 드라마로 만들어진 핸드메이즈 테일The Handmaid’s Tale 수십 편을 모조리 보기 전까지는 이름 하나로 지옥이 펼쳐지는 세상이 있다고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아무튼 ‘말’과 ‘글’을 사용하는 것이 종의 특징인 인간으로 태어나 말과 글자를 배우고 익힌 후 보고 듣고 읽은 책과 드라마와 영화중에서 단언컨대 이것 <시녀 이야기>에서 본 세상이 제일 슬프고 무서웠다. 사람이 귀신보다 끔찍했다. 피가 솟구치고 사람이 토막 나거나 찢기고 터지는 고어영화, 사람을 잡아먹는 공포영화보다도 시녀 이야기가 더욱 잔혹했다. 죽을 것 같은 살 떨리는 공포가 아니라, 행여 보게 될까 두려운 유령이 아니라 차마 믿을 수 없는 환상이 아니라, 이야기속의 정치체계와 사람이 사람을 다루는 방식에, 특히 여자들의 존엄이 훼손되는 모습에 숨통이 조여들었다. 길리어드 권력층남자들은 여자에게 제일 먼저 말과 글을 금지한다. 신의 뜻에 합당한 허락된 구조의 말만을 뱉어야 하고 눈으로 글을 읽으면 손가락이 잘리고 입으로 글을 낭송하면 손목이 잘린다. 그다음에 여자의 돈과 직업을 빼앗고 이름을 함부로 붙인다.  


특히 말과 글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소름 끼치는 무서운 부분은 <시녀 이야기> 속 길리어드에서 사용하는 말과 글과 행동이 도대체 단 하나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거였다. 언행불일치의 말들이 횡행한다. 그들이 사용하거나 허락한 말과 글은 표현과 형식만 번드르르 할 뿐 ‘어법’과 ‘문법’에 맞지 않는다. 맞지 않는 걸 넘어 간단히 틀렸다고도 말할 수 없는 가치전도의 추악한 세상이 거기에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말이, 문자가, 의미와 문법이 온통 뒤틀리고 뒤집어져 있는 곳이어서 말과 글로 무언가를 나누고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자비로운 하느님의 성경 속 말씀을 읽으면서 여성을 때리고 죽인다. 여성은 축복받은 존재라고 말하면서 학대하고 유린한다. 임신하고 출산하는 여성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면서 비하하고 혐오한다. 살 떨리는 진짜 공포는‘가임여성’이 겪는 참혹한 비극의 정도가 극도로 잔인한데 거기서 벌어지는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진짜 내 옆의 현실 같아서 찾아왔다. 


분명 ‘Tale’이니까 ‘이야기’일 뿐인데, 믿을 수 없는 다른 세상의 일 같은데, 눈앞에서 요즘 벌어지는 것처럼 비슷했다. 저것을 어디서 봤더라, 기시감이 들어서 아니, 현재 내 옆에서 벌어지는 현실과 기막히게 오버랩이 되어서 이 소설의 장르는 도대체 뭔가, 몇 번을 되짚어 봐야했다.     


특히 ‘시녀, 여자’에게‘이름 붙이기’는 너무 끔찍해서 기발할 정도다. 오로지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몸으로만 다뤄지는 시녀들에게 이름을 지어 붙이는 그들의 행위가 혀를 내두르게 창의적이기는 하나 생각해보면 참으로 나태하고 무성의한 발상이기도 하다. 아기가 태어나지 않는 곳, 남자나 여자나 태반이 불임의 증상을 겪는 곳에서 임신능력을 가진 여자라면 사실 가장 귀중한 존재다. 바보천치라도 그 존재의 귀중함을 알아챌 수 있다. 그녀들을 빼면 누구도 그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는데 임신 능력을 가진 여자들은 그 사실하나만으로 모두 잡혀와 ‘라헬과 레아센터, 일명 레드 센터’에서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다. 까딱하면 눈이 뽑히고 사슬에 묶이고 맞아 죽는다. 


능력이 있으면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죄명이다. 낙태하고 사전피임약을 먹고 사후피임약을 먹으면서 임신을 피한 죄, 아기를 낳지 않은 죄. 신도 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가장 소중한 존재가 가장 하찮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녀들은 제일 먼저 지난 삶의 관계전부와 평생 쓰던 ‘이름’을 잃었다. 잃었다는 표현은 너무 긍정적이고 능동적이다. 그녀들은 이전의 삶과 이름을 빼앗긴다. 그리고 새 이름을 받는다. 아니, 받는다는 표현 또한 너무 희망적이고 공정해 보인다. 가임 능력이 저주에 다름 아니게 변해버린 그녀들에게 새 이름이 붙여진다(새 이름이라니 뭔가 새 출발 같고 유의미한 것 같지만 절대 그건 아니다). 


아무튼 새 이름은 아기 없는 높은 계급의 불임부부에게로 배치되면서 붙여진다. 불임부부의 집이 이른바 임지이고 유일한 임무는 출산이며 임기는 2년이다. 본명은 빼앗겼고 금지되었다. 시녀의 새 이름은 주인남자 이름 앞에 ‘Of’만 붙이면 그냥 끝이다. 소유격 전치사 오브. 저 처연하고 애달픈, 그러나 씹어뱉는 것 같은 분노의 자기소개를 하는 오브프레드가 배치된 집 남자이름은 프레드Fred. 다른 이름이 있었지만 사용이 금지된 여자는 그 순간 바로 오브프레드Offred가 된다. 프레드 워터포드는 길리어드를 만든 ‘야곱의 아들들’의 일원이고 권력자다. 그 덕에 가임여성 시녀를 배당받았다. 아기를 얻을 때까지 프레드는 수 명의 오브프레드를 들일 수 있다. 프레드란 이름과 그의 집에 들어오는 시녀의 이름도 변함없이 오브프레드다. 몇 번이고 여자의 몸만 바뀐다. 

여자들의 이름은 프레드에게 배치되면 오브프레드Offred, 글렌의 집에 간 여자는 오브글렌Ofglen, 워렌네 집에 가면 오브워렌Ofwarren, 오브웨인Ofwayne, 오브찰스Ofcharles로 붙여진다. 기한 내에 그 집에서 그 남자의 아기를 낳아야 하고 낳지 못하면 다른 집으로 가야한다. 이름은 또 바뀐다. 남자의 이름 앞에 오브를 붙인 초간단하고도 저주받은 이름을 달고 이리저리 휘둘리는 소유물이 되어 빠져나가지 못할 이름 지옥에 갇힌다. 


오브Of를 붙여 여자 이름을 지어놓고 그들의 소유물로 지칭하고 있는 것을 처음부터 알아채지는 못했다. 그저 주인공여자 이름을 집주인 ‘아내’가 처음 집에 왔을 때 ‘오브프레드’라고 부르기에, 번역본 책에 오브프레드라고 쓰여 있기에 그런가보다 했었다. 또 다른 오브ooo가 나오기까지는. 조금 더 읽다가 도대체 왜 이름들이 저런가, 궁금해서 스트리밍 서비스채널을 찾아가 <핸드메이즈 테일> 시즌 1 첫 번째 에피소드 자막을 한글과 영어가 동시에 나오게 바꿔놓았다. 시즌1을 다 보고난 후에야 자기의 아이를 낳아줄 여자의 이름에 소유격 전치사 오브를 사용한 거라는, 저들의 가공할 무작스러움을 알아차렸다. 


정말 끔찍한 작명방식은 오브프레드란 이름마저 유일한 단 한 명의 여자에게만 붙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프레드라는 남자의 집에 시녀로 들어와 오브프레드로서 아기를 생산해내지 못하는 이상, 수 명의 시녀가 다시 이 집에 들어와 변함없이 오브프레드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때문이다. 첫 번째 오브프레드, 두 번째 오브프레드, n번째 오브프레드. 그들은 차례와 얼굴을 구분하지 않는다. 목적과 도구로 온 것이지 사람으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뼈저리게 더 아픈 사실은 프레드 사령관네 집에 우리의 주인공 오브프레드 이전에도 또 한 명이 오브프레드가 있었다는 거다. 


본명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이전의 오브프레드인 한 여자는 임기 동안 아기를 낳지 못하고(낳지 않고) 옷장 가장 깊숙한 곳에 누워 ‘그놈들에게 짓밟히지 마. 그들에게 짓밟혀선 안 돼. Do not let them grind you down’는 라틴어 한 줄을 새겨놓고 샹들리에에 목매달아 죽었다. 본명을 뺏기고 오브프레드가 되어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어서 몸에 붙은 낯설고 더러운 새 이름을 없애버리는 방법을 택했다. 아기가 태어나는 것이 국시일 만큼 중요하다면서 아기 낳을 능력을 가진 사람을 그다지 함부로 대할 수 있다니 씨를 가졌다는 남자권력자들의 어리석음의 끝은 어디일지 가늠할 수 없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사물이든 세상 만물에 이름을 짓고 이름을 붙여주고 부르고 불러 주는 행위란 서로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최상의 의미 부여이고 애정표현이다. 이름을 지어 호명하고 지칭하면서 관계의 결속이나 마음의 밀도를 보여줄 수 있는 고도의 정성이 깃든 의례이기도 하다. 소유격 전치사 오브를 달랑 남자 이름 앞에 붙이면서 소유물로 표시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극도의 가부장제남성사회 남성권력자들의 머릿속 회로의 뒤엉킴을 한눈에 보여준다. 그들의 작명방식은 저열하고 천박하고 폭력적이어서 여성 존재의 존엄과 자존을 일거에 무너뜨린다. 본명을 뺏어 못 쓰게 하고 새 이름을 임의로 제 이름 앞에 소유격 전치사를 붙임으로써 존엄한 한 존재를 무화시키고 환멸에 빠질 수 있게 만든 걸로 보면 가히 미친 천재라고 할 수도 있겠다. 


여자들은 ‘그 남자의 것’이라는 뜻의 이름 하나를 사용해야 함으로써 단박에 급전직하 나락으로 떨어진다. 소유주가 표시된 가증스런 이름이 2년마다 바뀌어 불리어질 때 고유한 한 이름을 가진 인간존재로서의 품격을 잃을 수밖에 없다. 여자들은 모멸과 치욕을 견디며 스스로 우린 번식용 가축일 뿐이라거나 We are breeding stock, 우리는 첩조차 아니라거나 We aren't concubines, 우린 그저 다리 달린 자궁일 뿐이라고 자조하고 체념하게 된다. 

We are two-legged wombs.


첫 번째 오브프레드가 죽은 자리에 새로 배치되어 온 오브프레드에게 아내는 이렇게 묻는다. 이전 사령관하고는 잘 안 됐어? Old what's-his-name didn't work out? 이전 사령관의 이름을 모르니 Old what's-his-name이라고 묻는다. 오브톰이든, 오브존이든, 오브 밥이든 오브짐이든 그 남자의 것이란 이름에 붙었던 때에 아기를 못 낳아 주었냐는 물음이다. 

우리의 주인공 오브프레드도 이전에는 다른 이름 오브000이었다. 거기서 아기를 2년 안에 아기를 낳지 못했다. 오브프레드가 된 것은 시녀로서 두 번째 배치다. 그녀는 이제 프레드Fred의 소유격 Of가 되었고 두 번째 배치기 때문에 이번 임기 안에 아이를 낳지 못하면 시녀의 삶만큼이나 고통스런 식민지로 추방돼 핵폐기물을 치우며 살다가 거기서 죽어야 한다. 오브프레드는 프레드에게 한 달에 한 번, 배란기 때마다 ‘의례’라는 이름으로 정기적 강간을 당한다. 오브프레드Offred는 찢기고 부서지는 몸과 마음으로 죽음을 생각하면서도 첫 번째 오브프레드처럼 죽을 수는 없다. 탈출을 할 수도 없다. 그들이 뺏어가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딸 해나가 인질처럼 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 딸을 찾아서 구해야한다. 그녀는 본명으로 살 수 있는 날을 생각하면서 참담한 매일매일 책과 말과 사랑이 가능했던 지난날을 다시 살 수 있기를 절박하게 꿈꾼다. 그녀는 책과 글을 다루는 도서관과 출판사에 일했던 여자다. 말에 대해 글에 대해 농담하기를 가장 좋아한 사람이었다. 오브프레드는 커피와 담배와 술과 신문이 자유롭던 시절을 통곡하며 그리워한다. 실수할 자유, 잘못할 선택이라도 가능했던 그때는 사라졌다. 지금 시녀로서는 오로지 건강한 몸을 유지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출산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여성은 오로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기독교적 교리와 가부장제적 교조에 맞게 ‘생육할 몸’만 남았다. 눈이 없어도 발이 없어도 손이 없어도 심지어 ‘얼굴’이 없어도 그들은 상관치 않는다. 단지 ‘여자의 몸’ 만 있으면 되었다. 몸 속의 자궁과 난소의 기능만 필요했다. 정자를 받아 열 달 동안 넣어 키울 번식기계로서의 몸, 오로지 그것만. 지성, 감정, 아름다움과 사랑, 계급이나 종족까지 아무 상관없는 그저 임신출산이 가능한 여자의 몸만 취해 아이를 얻고 여자는 버리면 되었다. 아기를 낳아도 그 세상에서 ‘엄마’가 되지 못한다. 

‘불임이던 아내’가 엄마가 된다. 그러니 여자들에게 ‘이름’이란 뺏어도 되고 지워도 되고 바꿔도 되는 것, 자기이름을 붙여 부르면 되는 것, 그들이 여자개인에게 이름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리 만무하다.  

언젠가 한 외국 부대사가 시녀들을 이용한 출산장려정책의 우수성을 보기 위해 프레드 사령관네 집에 초청받아 왔다. 외교관 부대사는 여자다. 그녀는 돌연 이름을 묻는다. 오브프레드, 본명이 뭔가요? 이전에 쓰던 이름이요. 오브프레드는 본명을 밝혀 이 참상을 보여주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히지만 말하지 못한다. ‘그 이름은 이제 쓰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때 프레드 사령관이 대신 설명한다. ‘시녀들은 이름을 물려받습니다. 가장의 이름을 사용하죠. 오브워렌, 오브프레드 등등. 그들의 신성한 신분을 상징합니다. 시녀는 국가를 위해 아이를 낳습니다. 오프레드도 저희의 감사한 마음을 알겁니다.’


‘오브프레드’라는 이름의 그 여자 ‘나’의 본명은 531페이지 책의 마지막까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녀의 본명이 ‘준June’일 거라는 추측은 오로지 1장에 딱 한 번 나오는 다섯 여자의 목숨을 건 자기이름 소개 덕분이다. 정신개조용 가스라이팅과 번식기계로 개조해 생각 없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높은 권력자의 아기만 낳을 수 있게 훈련시키는 레드센터에서 딱 한 번. 임지에 배치되기 전 단 한 번. 소유격 전치사가 사용된 이름이 붙기 바로 전. 진짜 이름을 알아야 죽었어도 애도할 수 있기에. 


“그들이 쳐다봐 주기만 한다면, 말을 걸어볼 수만 있다면, 그러면 뭔가 주고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에겐 아직 몸이 있으니까. 그게 우리가 꿈꾸는 환상이었다. 우리는 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서로 속삭이는 법을 배웠다. 흐릿한 어둠 속에서 ‘아주머니’의 눈을 피해 팔을 뻗어 허공을 가로질러 서로의 손을 만질 수 있었다. 머리를 바짝 붙인 채로 옆으로 돌아누워 서로의 입을 지켜보며 입술을 읽는 법을 터득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침대에서 침대로 이름을 교환했다. 

 

알마재닌돌로레스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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