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은 생각하는 게 귀찮았다. 휴대폰을 들고 서로를 마주 보며 재잘거리는 희와 리를 보며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물론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셋이 함께 떠나는 첫 해외여행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의 무표정은 그들의 들뜬 마음에 쉽게 가려졌다.
돌이켜 보면 항상 같은 패턴이었다. 여행 가고 싶다고 말하는 건 언제나 희였고 그에 맞춰 장소와 맛집을 수색하는 것은 리였다. 원은 둘을 지켜보다가 숙소를 찾거나 이동시간 등을 확인하는 역할이었다.
원은 자신이 타고난 집순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집 밖을 나가기 싫어하는 파워 집순이. 집순이를 넘어서 침대순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직장만 아니라면 아예 집 안에서만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원이었다. 그런 원을 밖으로 끌어내는 건 같이 살고 있는 희와 리였다. 미리 약속하지 않은 외출을 싫어하는 원을 알기에 사전에 짧은 외출에서부터 긴 국내여행까지 먼저 말을 꺼내곤 했다. 셋 다 무계획형 인간이라 여행 가기 일주일 전쯤이나 여행 경로를 짜긴 했지만 말이다.
원은 어쩌다 셋이서 해외여행을 가기로 했었나 되짚어보았다. 내향인이지만 그래도 셋 중에 가장 외향적인 희는 친구와 함께 여러 번 해외로 여행을 다녀왔다. 리와 원은 희의 여행담을 듣고 사진을 구경하곤 했었다. 희는 친구들보다 자매들끼리 가면 더 편하고 재밌지 않겠냐며 해외여행을 제안했다. '처음 가는 해외여행, 제대로 가자!'를 외치던 희는 호주를 가자고 했다. 리는 코알라를 실제로 볼 수 있는 거냐고 깔깔 웃었다. 옆에서 슬쩍 웃던 원은 불안했다. 과연 의사소통은 될까? 영어로 대화해야 할 텐데 셋 중에 누가 영어를 잘하지? 여행경비는 충분할까? 직장 스케줄은 어떻게 하지? 짐은 어떻게 챙겨야 하지? 이런 걱정들이 하나둘씩 떠오르며 불안감이 점점 커져갔다.
그중에서도 가장 걱정스러운 건 장거리 비행이었다. 원이 지금까지 타본 ‘비행기’라곤 어렸을 적 아빠가 태워주던 다리 비행기가 전부였다. 나이가 들면서 고소공포증도 생겨 조금만 높아도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이 두려웠다. 육교 대신 좀 더 걷더라도 횡단보도를 이용하고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도 몸을 옆으로 틀어 시선을 피하곤 했다. 그런 원에게 비행기, 특히 10시간 넘게 하늘에 떠 있어야 하는 장거리 비행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언니, 걱정 마. 오히려 창문 밖을 보면 걱정거리가 다 사라질걸? 언니 풍경 보는 거 좋아하잖아. 언제 또 하늘에서 봐보겠어?” 장거리 비행을 걱정하는 원을 보며 희가 밝게 말했다. 원은 희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무섭긴 했지만, 그 공포가 전부는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설렘도 있었다. 평생을 살아온 이 나라를 떠나 TV에서나 보던 다른 나라로 갈 수 있다니,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원은 여행 준비를 하며 긴장과 기대가 교차하는 나날을 보냈다. 하루는 여행이 취소되길 바랐고 하루는 호주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매일 느끼는 양가감정에 원은 혼란스러웠다. 결국 출국 당일이 다가왔고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원은 천천히 눈을 감고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여러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지만 주사위는 던져졌다. 몇 시간 뒤면, 원은 하늘 위에 있을 것이다. 불안함을 잠재우려 즐겨보던 영상을 켰지만 집중이 전혀 되지 않았다. 차라리 모든 생각을 잊고 잠을 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원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공항은 사람들의 설렘과 들뜸으로 가득했다. 시끌벅적한 소음이 가볍게 귓가를 스쳤다. 모든 것이 낯선 풍경이었다. 다양한 언어가 오가고, 각양각색의 표정을 한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원은 자신도 그 사람들 사이에 녹아들 것이라 생각하니 설렜다. 사람들의 긍정적인 기운이 자신에게 용기를 주는 것만 같았다. 불안했던 일련의 과정들을 거쳐 탑승 게이트로 향했다. 원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자연스럽게 여행을 준비하고 떠날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들은 마치 집 앞의 마트를 가는 것처럼 편해 보였다. 언젠가 자신도 그들처럼 행동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준비됐어?"
탑승 게이트 앞에 다다를 때쯤 희가 원과 리의 팔짱을 끼며 물었다. 원은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더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원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했지만, 이 모든 과정이 새로운 시작의 일부임을 깨달았다.
"그래, 준비됐어."
게이트가 열리자, 원의 가슴이 다시 한번 크게 뛰었다. 자매들과 함께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하늘로 오르기 전 마지막 순간을 온몸으로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