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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강 작가의 독일삶 Jan 21. 2022

만날 인연은 다시 만난다

 깡마르고 작은 몸이지만 다부져 보였다. 보통 양로원의 노인들 중에 가장 자립도가 강한 사람을 들라고 하면, 의사나 간호사 혹은 선생님 출신이라고 말하고 싶다.


슈바츠 할머니는 간호사 출신이다. 그분은 구십이 넘었지만, 자신의 몸에 한해 남의 도움을 되도록 받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일까? 양로원에서도 늘 그는 혼자다. 비록 몸은 나이가 들어 불편하지만, 되도록 혼자서 옷을 입고 밥을 먹고 짧은 외출도 한다. 내가 보기에 양로원 노인 중 최고의 삶의 질을 누린다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다 하니까.


하지만 그녀는 상당히 깔끔한 성격이다. 근무자들은 슈바츠 할머니 방에서 벨이 울리면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녀는 이것저것 쓸 데 없는 요구사항이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인데 남의 손을 빌린다는 것. 예를 들면 리모컨 위치, 커튼의 모양, 조명의 강약 조절 등.

그래서 근무자들은 벨이 울리면 몇 십 분이 흐른 후에야 들어가곤 한다. 왜냐하면 분초를 다투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빨리 달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몇 번을 겪은 후 마치 양치기 소년처럼 벨이 울려도 그저 그러겠지, 하며 달려가지 않는다.

내가 곰곰이 유추해 본 바로는 슈바츠 할머니의 행동은 외로움의 표출이다, 외롭기 때문에 자신이 할 수 있음에도 누군가 와주길 바라는 것. 자신의 몸에 손대는 것은 질색이지만 그래도 방에서 다른 이의 온기를 느끼고 싶은 것이다.


언젠가 슈바츠 할머니가 있는 양로원에 근무하러 간 적이 있다. 앞서 말한 적 있는데 나는 내가 사는 도시의 양로원이나 병원 여러 곳을 방문하며 일을 한다. 물론 처음 간 곳도 많지만 한 번 정이 들면 양로원이나 병원 측에서 계속 오기를 요구하기도 한다. 뭐, 일을 잘한 탓도 있겠지만 한 번 와본 사람이 와야 일처리가 빠르기 때문이다.     

 그날 양로원에서 근무할 때였다. 슈바츠 할머니의 벨소리가 울렸다. 난 영문을 모르기에 습관처럼 달려갔다.


 “어디서 왔어요?”


할머니가 입을 떼었다.


 “한국에서 왔어요. 한국 아시나요?”

왜냐하면 대부분 나이 든 분들은 한국을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하지만 슈바츠 할머니는 달랐다. 갑자기 표정이 밝아지며 나에게 말했다.

 “미숙. 미숙.”

 “네? 누구요?”

 “미숙, 미숙을 알아요. 아...그녀도 당신처럼 한국에서 왔지요. 간호사로. 아주 조그맣고 귀여웠지.”

슈바츠 할머니는 파독 간호사 미숙을 알고 있었다, 문득 내가 알고 있는 미숙,이라는 어르신을 말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나와 미숙은 아주 잘 아는 사이다. 언젠가 내가 희곡을 쓴 연극의 배우로서 활약하기도 했다. 나는 얼른 카톡 프로필에서 미숙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슈바츠 할머니는 사진을 가리키며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미숙을 안다고 하니 할머니는 신이 난 모양이다. 미숙에 대해 ‘아주 똑똑하고 지적인 여성이었다’고 회고했다. 벌써 40년도 넘은 일이라고 했다. 한국 이름은 발음하기도 힘들고 더더욱 기억하기도 어려운데, 40년 동안 보지 않았는데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마음의 거리가 좁혀졌는지 슈바츠 할머니는 쉴 새 없이 말을 건넸다. 물론 기운이 없어 긴 이야기를 할 수 없었고 나 또한 일을 해야 했다.


퇴근 후 곧바로 미숙 어르신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며 슈바츠 할머니가 어르신을 기억하고 있노라,고 말해주었다. 미숙은 정말 반가워했다. 슈바츠 할머니는 미숙이 처음 독일에 와서 근무한 병원의 수간호사였다고 한다.      


미숙이 처음 독일에 올 때는 스물 두 살이었다.

파독 간호사로 온 것은 가난이 이유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도피였다. 그녀는 한국에서, 원하지 않은 남자에게 시집을 가라고 성화인 부모님께 ‘독일 보내주지 않으면 수녀가 되겠다’고 협박한 뒤 파독 간호사로 올 수 있었다. 미숙 어르신은 지금 칠십이 넘었지만 여전히 당차고 똑똑한 분이다. 한국에서도 대학병원 간호사로 근무한 경력이 있었기에 아는 게 많았다. 독일에 와서 부당하게 대우하면 참지 않았다. 전문 간호사로 일한 경력이 있는데, 언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청소만 시키는 것에 항의했다고 한다. 한 번은 걸레를 주며 청소하라고 하기에 양동이를 냅다 던지고 나왔다는 이야기도 했다. 물론 병원 일자리는 많았기에 자신감도 있었던 터다.      


당시 슈바츠 여사는 같은 병원 같은 과 수간호사로 일하며, 미숙에게 병원이나 일 관련해 가르쳐줄 의무가 있었다. 그녀는 미숙의 솔직하고 당찬 모습이 맘에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미숙이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감싸주며 사랑을 아끼지 않았다. 미숙이 독일인 남편과 결혼하고 첫 애를 낳았을 때도 꽃다발을 들고 찾아온 이였다.


하지만 당시 슈바츠 여사는 병원 내 억울한 일을 겪게 되고 그 길로 간호사의 옷을 벗었다. 물론 남편이 워낙 부자였기에 돈을 벌 이유도 없었다고 한다. 이후 미숙과도 연락이 두절되었는데 이번에 나 덕분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고 둘은 좋아했다. 미숙은 나에게 소식을 들은 후, 곧바로 슈바츠 할머니가 있는 양로원을 찾았다고 한다. 미숙은 그곳에서 이산가족 상봉 보다 더 찐한 만남을 가졌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삶은 느끼는 자의 몫’이라고 했다. 느끼고 살아 있자는 말이다. 모든 생명 있는 것은 결국은 썩지만, 마음에 그리움과 정을 가진 자는 결코 내면이 썩지 않고 오래 남는다. 그들은 서로에게 말했다.


 “이렇게 살아있으니 만나지네요.”


세월이 흘러도 가슴에 남아 있다면, 언젠가는 만날 사람은 만난다는 생각이 든다. 난 인연의 다리를 연결해준 것 같아 뿌듯한 마음에 이 일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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