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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강 작가의 독일삶 Feb 10. 2022

지옥체험을 위한 1순위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기사라 불리는 황제 막스밀리안 1세. 그는 독일 르네상스의 시발점이 된 인물이다. 전 생애에 걸쳐 전쟁을 벌였고, 영토확장 계획에서 간접적으로 도운 여성들과 결혼했던 전략결혼의 대가다. 그는 사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 매장되었다. 그의 화려했던 생에 반해 삶의 마지막은 초라했다. 손에 피를 많이 묻힌 삶 때문에 죽기 전 지옥에 가는 것이 두려웠다. 


1519년, 대장암 말기였던 그는 생의 마지막 여행지로 오스트리아 린츠를 택했고, 죽기 전 유언을 남겼다. 죽은 후, 자신의 시체에 매질을 하고 모든 머리카락과 치아를 뽑으라고 명령한 것이다. 그는 마지막 회개의 뜻으로, 자신의 육체를 피폐하게 다루고 재와 석회를 뒤집어쓴 후에야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중세시대의 죄를 씻는 또 하나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방법으로 자신의 지은 죄들을 씻을 수가 있을까? 

그에게 지옥은 몸서리치게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인간이라면 누군들 가고 싶겠는가. 하지만 신학적 연구들을 통해 조용히 언급되어지는 것은 지옥은 이 땅에서부터 시작이라는 것이다. 다음 세상의 리허설이 바로 이 세상이라는 조언들은, 어떻게 이곳에서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땅에서 지옥의 삶은 체험하기가 아주 쉽다.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아주 넓은 길이다. 바로 살면서 늘 상대방을 의식하고 비교하면 된다. 그것이 지옥 체험의 1순위다.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 장 폴 사르트르. 1964년에 노벨상 수상을 거부했다. 문학에 등급을 매길 수 없고 개인에게 주어진 영예는 싫다,가 이유였다. 그가 결벽주의자여서가 아니다. 그에게는 단지 인생의 본질보다 실존이 우선했다. 


언젠가 플럭서스(전위예술) 예술가인 백남준의 일화를 들은 적 있다. 백 작가는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했고, 이미 전위예술가로 유명세를 떨쳤다. 바이올린을 켜다가 갑자기 쾅하고 바이올린을 내던지질 않나, 공연 도중 자신의 넥타이를 가위로 자르는 등, 규범에 예속된 이들에겐 생경한 장면이었을 것. 하지만 그것은 모두 공연 퍼포먼스였다. 한 번은 그의 예술적 감성에 감동한 요셉 보이스가 전시회를 제안했다. 하나는 백남준 개인전시회, 하나는 그룹 전시회를 하자는 것이다. 그때 백남준이 수락했다면 더 유명해질 수 있는 찰나였다. 하지만 그는 개인전을 단번에 거절하고 그룹전에만 참여했다. 사르트르와 비슷한 철학에서였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지키고 싶었던 거다.      


전위예술이라고 하니, 떠오르는 뉴스가 있다. 2016년에 독일 뉘른베르크 신박물관에 플럭서스 예술가인 아더 퀘프케(Arthur Koepcke)의 전시회가 열렸다. 그를 사랑하는 개인 수집가가 대여한 전시품이었다. 퀘프케는 70년대에 이미 세상을 떴지만 그의 유명세는 여전해서 그 작품은 8만 유로에 달했다. 작품은 퍼즐퀴즈를 조각내어 붙인, 보통사람이 보기엔 아주 허접한 전시품이었다. 그때 양로원에서 단체 관람을 온 노인들 중 90세의 할머니가 그 퍼즐퀴즈에 볼펜으로 답을 기입하며 전시품을 훼손한 사례가 있었다. 결국 재판까지 갔는데, 재판석에서조차 할머니는 당당했다. 


 “그건 내가 작품을 망친 게 아니라 예술가의 생각을 완성시켰을 뿐이라오!”


할머니는 자기 덕분에 작품이 더 유명해졌고, 덩달아 가치도 올라갔을 거라고 덧붙였다고 한다. 난 이 사건을 들으며 제도와 시스템에 묶이지 않은 독일 할머니의 당당함이 부러웠다. 분명 치매나 정신적 문제가 없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남을 의식하지 않고 소신있게 발언했다는 소리다. 당시 사건을 뉴스에서 읽으며 타인의 의식 속에 갇혀 있던 나에게 도전이 되었다.     

다시 사르트르로 돌아가보자.

사르트르는 그의 희곡작품 <닫힌 방>에서 명언을 남겼다. 


 “타인은 지옥이다”     


연극 속에서 죽은 세 사람이 한 방에 갇힌다. 그들이 하는 일은 서로를 괴롭히는 것이다. 서로를 규제하고 감시하고 통제한다. 타인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창문과 출구가 없는 방에 그들은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문이 잠깐 열리지만, 그들은 나가지 않는다. 이미 출구 없는 방에 적응되어 버린 것이다. 연극을 통해 사르트르는 말하는 것 같다. 이미 타인에게서 자신의 본질을 보았고, 그 본질에 매몰된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는 현상의 지옥을 빠져나올 수 없다고. 

그의 희곡을 읽으며 역시 희망과 행복도 학습이고 인생에 늘 창밖이나 출구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은 햇빛이 거의 없다. 태양 한 줌이라도 떠오르면 많은 사람들은 반가운 벗이 온 것처럼 버선발로 발코니로 뛰쳐나간다. 


 “오 존네!(오 태양!)"

그들에게 태양은 다른 시선을 보여주는 창밖이자 출구다. 

내가 일하는 양로원에서는 햇빛이 비추면 노인들이 창가로 모여들거나 휠체어를 끌고 정원으로 간다. 물론 햇빛 때문만은 아니다. 누군가 오지 않을까 희망 때문이다. 창살 없는 감옥에서 그들의 찾는 방문객은 햇빛과도 같은 존재다. 누군가 오리라는 희망 때문에 창밖을 바라보고 태양에게 시선을 보낸다. 오늘 오후에 딸이 오겠지, 아들이 오겠지 그렇게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사르트르의 말에서 ‘타인은 지옥’이라는 표현은 맞기도 하고 또 틀리기도 하다. 타인 안에서 희망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지옥이 아닌 천국으로 변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나는 생의 초월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늘 딸은 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은 절망만 불러온다. 하지만 내일은 오겠지 하는 희망은 사랑을 동반한다. 

세상은 우리가 보이는 것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린아이의 미성숙함에서 보이지 않는 발전 가능성을 보고, 힘든 오늘에서 흐릿하지만 밝은 내일을 희망할 수 있다. 다른 삶을 살 가능성, 즉 희망을 놓치지 않을 때 가능하다.      


프랑스 사제였던 샤를 드 푸코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진정한 가치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그의 모습으로만 한정하고 축소시킨다면 그에게로 향해야 할 우리의 사랑이 중단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더 나은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그의 가능성도 함께 중단됩니다.“     


인간은 타인의 갇힌 시선 속에서는 영원히 자신의 행위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을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출구 없는 방처럼 영원한 지옥 속에서 인간은 무의미한 행위만을 할 뿐이다. 타인의 시선에 갇혀있는 자들은 지금 지옥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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