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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헌 Apr 20. 2022

여로(旅路)

소소한 추억 여행기

92. 동산의 추억, 1972


'동산'이란 말은 요즘 잘 쓰지 않는 단어이다.

마을 부근 작은 언덕 같은 걸 일컫는 말이다.


30여 호도 안 되는 작은 시골 

우리 마을에는

작고 동그란 뒷동산이 있었다.


쭉쭉 곧게 뻗은 해송이 대부분인데

3분의 1 가량이 잔디밭이었다.

동네 마을 스피커도 있었고

대개는 우리 코흘리개들의 놀이터였다.

가운데 처녀 우리 집 큰 사촌누이는 이제 70대 할머니가 되었다. 앞 잔디밭이 동산이고 동네 마을 스피커 나무 탑이 보인다. 

동네가 좁고 산이 많아 

평지가 따로 없으니

뛰어 놀 곳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남자아이들은 거의 매일 이곳을 찾았다.


봄가을엔 축구,

겨울엔 자치기 하는 운동장이었다.

동네 형은 뱀을 송림 사이에서 구워 주기도 했고

청자 버섯과 감 버섯도 나오는 곳이었다.


대보름날이면 마른 잔디를 긁어 

집에 달걀 꾸러미처럼 엮어

쥐불놀이를 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새마을운동 때 흔히 보던

동네 콩쿠르 대회도 여기에서 열렸다.

지금은 을씨년스럽게 변해버린 왼쪽 집 뒤가 바로 뒷동산 잔디밭이다. 집 뒤 소나무 사이에 콩쿠르 무대가 설치되었다.

동네 청년회에서 나무를 엮어 무대를 만들고

전기를 끌어 백열등을 환하게 밝히면

노래자랑 소리가 추석 저녁 온 동리에 울려 퍼졌다.


마침 우리 집은 이 뒷동산과 붙어있었다.

거의 우리 집 안마당 같은 곳이었다.

더구나 이 산은 우리 큰아버지 땅이니

우리는 어느정도 반주인인 셈이었다.

나는 거의 매일 이곳에 오른 셈이다.


멀거니 저 멀리 수평으로 지나는  

영동고속도를 쳐다보거나

공상과 상념에 잠기는 때가 많았다.


그 뒷동산이 이제는 아무도 찾지 않는

황무지처럼 변했다.


소나무는 베어졌고

개발의 발톱은 여전히 날카롭다.


동네는 아이들 목소리는 찾기 힘들고

있어봤자 학원에 바쁘다.


그 어린 시절 공을 차면 

언덕 밑으로 뛰어가 죽어 오기 바빴던,

콩쿠르 대회 관객 누나들의 

청 미니스커트가 

선연하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그곳이 차마 잊히겠는가.


개발과 욕망과 아파트의 심벌, 용인에도

흑백 동산의 추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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