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추억 여행기
93. 공부의 시간, 1972-1984
무한경쟁 '공부'가 지고 지선인 나라에서
성적은 지표가 되고
혹은 평생의 멍에가 된다.
나는 사실 공부 별로 안 하고
적당히 성적 받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갈고닦아야 하는
중고등 성적이 우하향 곡선이 되었다.
5,6살에 이미 숫자와 한글을
대충 깨우치고 갈 정도의 머리였지만
진짜 공부머리는 별로였던 셈이다.
단순 지능으로 하는 실력,
즉 국민학교에서는 곧잘 했다.
우등상(학술상이란 이름으로)도 받았고
과목 수준 자체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내가 성적에 회의가 든 건 국민학교 6학년 때.
나와 옆자리 박아무개는 키가 작아 앞자리였는데,
우리 둘은 생긴 것이나 성적도 고만고만했다.
어느 날 시험을 보는데 반 모든 학생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커닝을 했다.
우린 그걸 한심하게 쳐다보며
양심껏 시험을 봤고 결국 손해를 봤다.
그때 사회의 부조리를 처음 심각하게 느꼈다.
문제는 그것보다
내 옆자리 친구가 중학교에 진학하더니
갑자기 일취월장 학교 탑이 된 것이다.
곧 범접 못할 전교 일등이 되었다.
몇 년 만에 홍해 갈라지듯
그는 수재, 나는 그저 그런 보통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도 같이 진학했는데,
시골 고등학교 유일무이 서울대 합격으로
동네와 가문의 영광이 되었다.
중학교 때부터 나를 괴롭힌 건 수학이었다.
대개 예쁜 수학선생님 보고 공부 열심히 한다는데
멋진 수학 여 선생님을 좋아했는데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건가 보다.
그나마 나를 지탱한 건 암기과목이었다.
당시 나는 만화에 미쳐있었다.
교과서와 공책에 만화만 그렸다.
그걸 보고 담임이 나를 미술부에 추천했지만
고등학교 형들이 이젤로 두들겨 패는 걸 보고
멘털 약한 나는 곧 도망 나왔다.
밴드부나 미술부 할 것 없이
왜 그렇게 몽둥이 찜질의 아수라장이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아무튼
중고등 시절 그저 그런
반에서 10등 내외 성적이 유지되었다.
자랑할 건 개근상 밖에 없었다.
12년 개근!
그래 공부 못하면 성실하기라도 해야지.
가정형편이 대학 진학을 꿈꿀 수 없어
더더욱 공부도 포기하게 되었다.
내가 공부라는 방법론을 새롭게 깨우치게 된 계기는
공장을 그만두고
단 몇 개월 재수학원을 다니면서부터.
8개월 아예 머리를 안 썼더니
암기과목 모든 문제가 머리에 쏙쏙 박혔다.
그리고 기적이 찾아왔다.
단 석 달만에 4년제 갈 성적을 받았다.
"공부란 게 집중력이구나."
"책상에 앉아있다고 공부가 아니구나~"란 걸 깨달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자신감'을 처음 갖게 되었다.
정말 공부가 재미있어진 것은 40대 초반,
박사 공부를 하면서부터.
"아!! 공부가 이렇게 재미있었다니!!"
그러니 지금 내가
2,3,40대 학부, 석박사 친구들에게
공부 왜 안 하니,
공부를 즐겨라~라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본인도 겨우 늙어서야
공부의
재미를,
방법론을,
겨우 깨우쳤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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