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추억 여행기
92. 동산의 추억, 1972
'동산'이란 말은 요즘 잘 쓰지 않는 단어이다.
마을 부근 작은 언덕 같은 걸 일컫는 말이다.
30여 호도 안 되는 작은 시골
우리 마을에는
작고 동그란 뒷동산이 있었다.
쭉쭉 곧게 뻗은 해송이 대부분인데
3분의 1 가량이 잔디밭이었다.
동네 마을 스피커도 있었고
대개는 우리 코흘리개들의 놀이터였다.
동네가 좁고 산이 많아
평지가 따로 없으니
뛰어 놀 곳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남자아이들은 거의 매일 이곳을 찾았다.
봄가을엔 축구,
겨울엔 자치기 하는 운동장이었다.
동네 형은 뱀을 송림 사이에서 구워 주기도 했고
청자 버섯과 감 버섯도 나오는 곳이었다.
대보름날이면 마른 잔디를 긁어
집에 달걀 꾸러미처럼 엮어
쥐불놀이를 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새마을운동 때 흔히 보던
동네 콩쿠르 대회도 여기에서 열렸다.
동네 청년회에서 나무를 엮어 무대를 만들고
전기를 끌어 백열등을 환하게 밝히면
노래자랑 소리가 추석 저녁 온 동리에 울려 퍼졌다.
마침 우리 집은 이 뒷동산과 붙어있었다.
거의 우리 집 안마당 같은 곳이었다.
더구나 이 산은 우리 큰아버지 땅이니
우리는 어느정도 반주인인 셈이었다.
나는 거의 매일 이곳에 오른 셈이다.
멀거니 저 멀리 수평으로 지나는
영동고속도를 쳐다보거나
공상과 상념에 잠기는 때가 많았다.
그 뒷동산이 이제는 아무도 찾지 않는
황무지처럼 변했다.
소나무는 베어졌고
개발의 발톱은 여전히 날카롭다.
동네는 아이들 목소리는 찾기 힘들고
있어봤자 학원에 바쁘다.
그 어린 시절 공을 차면
언덕 밑으로 뛰어가 죽어 오기 바빴던,
콩쿠르 대회 관객 누나들의
청 미니스커트가
선연하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그곳이 차마 잊히겠는가.
개발과 욕망과 아파트의 심벌, 용인에도
흑백 동산의 추억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