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추억 여행기
102. 찬우물 등목 하던 시절
7,80년대 시골에서는
집집마다 재래식 우물이나
펌프식 수도가 있었다.
먼저 재래식 우물은 마당이나
뒤편에 마을 주민 여러 명이
수십 미터를 파고 내려가
우물터를 만든다.
직접 큰댁에서
우물 뚫는 걸 봤는데
보통 일이 아니었다.
펌프식은 공기를 주입해
끌어올리는데
마중물을 넣어야 나오곤 했다.
우리 집 울타리 예쁜 옛날 집
우물은 펌프에서 바위를 뚫고 나온
시원한 우물물이 언제든
시원하게 뿜어져 나왔다.
사발꽃이 한가득 있던
우물터에는 아침마다
번갈아 가며 가족들이
스테인리스 세숫대야에 얼굴을 씻었고
늘 빨간색 대야에 물이 차 있었다.
서로 등목을 해주고
수박 참외를 넣어 놓기도 했다.
윗집 연수 할머니네 우물은
너무 차서 일부러
우리 집 수박을 그곳에 담가 놓기도
할 정도였다.
새마을 운동 때는
마을 우물물을 끌어내려
마을 중간쯤에
빨래터를 만들기도 했다.
지금은 상수도 때문에 사리질 위기에 처한
언덕 위 우리 집과 몇 가구 상수원인
동네 큰 우물터는
플라스틱 원구형 김치 담가놓는
천연 냉장고도 있었고
고단한 어깨 위에 져야 하는
물지게도 있었다.
중간쯤 어떤 집에서는
아이가 겨울에 빠져 죽기도 했던
슬픔도 우물 역사에 있었지만
대개 엄마들은
예쁜 꽃들을 심어 화단을 가꾸곤 했다.
어릴 적 발음이 이상해 진도고물이라 불리던
진덕 우물터는 얼마나 물이 맑고 넘치는지
우리 옆 동네 공공 우물은
언제나 맑고 수량도 넘쳤다.
마시기도 하고 논일하고 나서
손발도 닦는 누구에게나 곁을 내주는 우물이었다.
일전에 가보니 아파트 건설 현장이 되었고
우물은 애초에 폐쇄되었다.
놔두고 지켰다면
요즘 세상에 훌륭한 지자체 명소가 되었을 텐데...
하기사 인간의 욕심에
지하수도 곧 고갈되었을 터.
빌라와 상가가 들어서는
고향 동네 누구도 이젠
우물물을 먹지 않지만
기억 속에 찬 우물물이 마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