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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돈내산 외박 #1

2/3. 내가 개보다 나은 점

by 이븐도





두 가지가 남았다.

나 ADHD인가? 성인 ADHD. 버스에서 검색해 봤는데 대충 맞는 것 같았다. 굳이 테스트를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도시의 미친 인구 밀도와 인간 소외감 같은 것에 대해 떠들 자격이 없다는 것. 정말이었다.


또.. 음. 진짜 이렇게 쓰기 몹시 싫긴 한데 이런 나를 고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랑 놀아주는 사람들도 너무 감사합니다. 저는 평생의 빚을 지고 있는 것 같아요.

엄마, 엄마 말이 맞았어. 나 어떻게 돈 받냐고 했지? 대충 선견지명이었던 것 같아. 아니지, 키우는 내내 봤으니 당연히 알 수밖에 없던 건가.




첫째 날의 지난한 시간의 흐름을 담은 글이다. 꽤 길다.

하지만 나 혼자 여행을 떠나면 이렇다는 걸 스스로게 주지 시킬 필요가 있기에 서술한다.






이제야 인정하는데 사실 숙소에 들어가는 것부터 고난이었다. 강릉역에서 내려 아무 어려움 없이 206번 버스를 타고 정류장에 딱! 내렸을 때, 기분이 그렇게 좋았던 건 그다음부터 쭉 힘들 나를 위한 한 조각 은혜 같은 거 아니었을까.






버스는 늘 어렵다. 사실 귀찮다. 어딘가로 가야 할 때 숫자로 딱딱 표시된 지하철 출구를 찾거나, 그조차 싫으면 아무렇게나 걸으면서 살았다. 그럼 언젠가는 지하도나 지하철역이 나왔다. 내가 돌아다닌 반경이야 늘 뻔하기에 그러다 보면 어떻게든 집으로 가거나 목적지에 도착했다. 간단하잖아. 어플로도 간단하다. 어디서 어떻게 환승. 그냥 일자로 쭉 나온다. 그 시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방향이나 보면 됐다. 그 방향조차도 틀려서 나 또는 나와 만나기로 되어 있던 이들이 난감해졌던 적이 사실 꽤 많지만. 버스는 아니잖아. 스물여덟 먹고 또 인정하기는 싫지만 나한테는 어려운 게 맞다.


어디 횡단보도로 얼마나 걷고 어떤 지형지물을 찾고 어디서 내리고, 내려서 또 걸어야 한다. 어딘가를 가기 위해 버스를 타는 건데 그 버스를 타는 정류장을 찾는 것부터 루트가 필요했다. 그 정류장이 길 건너에 있는 건지 내 옆에 있는지부터 머리를 써야 했다. 머리? 머리라..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거니까 머리를 쓰는 게 맞다. 나한테는 그렇다.




나는 진짜 게으른 인간인 게 맞았다. 정말이었다니. 게으른 성정과 형편없는 방향감각이 부정적인 시너지를 내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여행. 어디에 뭐가 있는지 모르고, 찾기는 싫고, 찾아도 잘 가지도 못한다. 어휴. 이런.

에어비앤비 주인이 냉장고 그릇에 넣어둔 깨강정 두 개와 오란다가 아니었으면 나는 아사했을 것이다. 진짜 죽었을 리는 없고, 만약 정신적인 아사가 가능하다면 그랬을지도 몰라.



배고프면 주변 김밥천국이나 가지, 뭐. 편의점이나 가지, 뭐. 마트 있던데, 김밥 같은 거 사 오지, 뭐. 일단 캐리어부터 넣자. 그렇게 쫄쫄 굶었다. 꼴에 여행이니 좀 안 먹어본 걸 먹자 해서 딱 하나만 가져왔던 프로틴바는 진작 기차에서 먹었다.


숙소.. 지도상으로 분명 요 앞에 있는데. 백 미터 앞에 저 건물이 있는데 십 미터 앞에는 펜스가 쳐져 있다. 대체 어떻게 가라는 거야. 그렇게 건물을 앞에 두고 십오 분을 돌았다. 서울에서도 맨날 눈앞에 있는 걸 못 찾아서 휴대폰을 흔들면서 빙글빙글 돌았는데 여기서도 그러고 있었다.

바닷가라 바람이 추웠고 슬슬 피곤해지려 했다. 스크린골프장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짐을 차에 넣던 아저씨들이 나를 쳐다봤다. 평일 대낮에 골프라니 팔자들이 좋으시군요 생각했다. 근데 내 팔자도 나쁘지는 않았다. 공간감각이 나빠서 그랬지. 아무튼 그래서 힘들었다. 새벽 세 시에 병원에서 먹은 삼각김밥 두 개가, 서울역에서 사람들을 보며 먹었던 방울토마토들이 다 소화되어서 몸의 기력도 다 마른 기분이었다.




편의점? 가까워 보였지만 걸어서 십 분이었고, 마트? 버스를 타며 지나왔고 당연히 거길 가기 위해서는 또 버스를 타야 했다. 김밥천국? 왜 나는 모든 동네에, 사람이 사는 동네면 그런 밥집들이 널려 있을 거라 생각했을까. 세탁소와 작은 피아노 학원은 있었지만 식당은 없었다. 여기 해변 동네 아니야? 어떻게 이렇게 없어. 그런데 또 편의점 음식을 먹기는 싫었다. 나는 정처 없이 걷다가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먹고 카페에 가고 싶었는데.. 여기서는 버스를 타야만 했다. 버스를 타고 정처 없이 떠돈다? 진짜 종점까지 가버리는 수가 있었다. 대체 나는 뭘 생각한 걸까.

역시 사람은 맞기 전까지는 모른다고. 깨강정과 오란다를 다 먹고 나서도 도무지 힘이 안 생겨서 쿠팡 배달이나 시킬까 했더니 당연히 내 집 주소로 되어 있었다. 주소까지 바꿔서 배달시킬래? 생각이 들어서 그냥 일단.. 나가자고 생각했다.






지도에 고래 카페를 쳤다. 버스가 정말 영원히 기다려야 왔다. 아, 다르구나. 정류장에 버스 도착 시간이 안 떴다. 시린 손을 꺼내 휴대폰으로 버스가 언제 오나 들여다봤다. 17분? 배차간격 왜 이래. 여기 관광지 아니야? 관광지니까 배차 간격이 짧아야 한다는 생각은 도대체 왜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낙담했다. 고민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아니, 과자는 바닷가에서 까먹으려 했는데.. 정말 도저히 배가 고파서 뭔가를 할 의욕이 안 생겼다.

도로 길을 건너 편의점에서 쫄병스낵과 자갈치를 샀다. 와중에 버스는 한 대 갔다. 쫄병스낵을 다 먹을 때쯤에 버스가 왔다. 지겨워서 자갈치도 뜯었다.


버스는 강릉고등학교 앞에 나를 내려줬다. 팔자 좋지. 과자나 먹으며 돌아다니는 관광지. 식당이 많았다. 문제는 다 순두부밖에 없었다. 순두부? 음, 그래. 그럼 뭐가 있어야 하는데? 나도 모르겠어. 나 뭐 먹고 싶지?

질문을 너무 늦게 했다. 짠 과자 두 봉지. 천 칼로리쯤을 채우기 전에 생각했어야 했다. 어쨌든 아무리 돌아다녀도 순두부밖에 없었다. 사방이 순두부를 먹으라고 밀어붙이고 있었다.




저항할 힘이 없었다. 여섯 시쯤이었지만 모든 식당들이 다 텅 비어 있었다. 이대로 자면, 나는 내일 달리기를 할 수 없었다. 소나무가 양옆에 깔린 길에 서 있으려니 머리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바람이 불었다. 아까 내린 비인가보다 했더니 흐린 하늘 사이로 보이는 햇빛에 빗방울이 잔뜩 비쳤다.

그래, 여행은 이런 거구나. 설령 숙소에서부터 비가 오는 걸 알았대도 우산은 안 가지고 나왔을 거다. 다음번에는 바람막이나 들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나는 내 손에 빈 자갈치 봉지와 접어놓은 쫄병 봉지가 있음을 알았다. 음식은 나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미안해졌다. 면과 순두부가 같이 들어 있던 짬뽕 비슷한 걸 먹었다. 엄청 매웠다. 나는 쿨럭대면서 그걸 다 먹으려 애썼다. 손님이 나밖에 없었다.

잘가요 내 소주웅한 사라아앙 해앵복했써어요,라고 노래가 나왔다. 먹방 하는 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구나, 생각했다. 항상 맛있게 먹어야 하잖아. 맛이 없었던 건 아니었는데 아무튼.. 그랬다. 주방장은 메가커피 아아를 마셨다. 유리창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세 명도 안 된 것 같다. 앉아 있으려니 비가 그쳤다. 어휴. 람막이나 들고 다녀야지.


손이 시려 휴대폰으로 길을 찾기가 싫었다. 아무데나 들어가려 했는데 그 아무 데나에 해당하는 모든 곳이 텅 비어 있어서 들어가기가 무서웠다. 그럼 카페가 아니잖아. 무슨 독서실도 아니고 주인이 저편에 앉아 있고 나는.. 또 영원히 반쯤 긴장한 채 멍을 때리는 척을 하고. 그래, 그러느니 차라리 가자 해서 시린 손을 꺼내 고래 카페를 찾았다. 숙소 때 같았다. 내 앞에 있는데 도무지 못 찾겠는 그런 데자뷰.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CGV로 가 달라고 했다. 그 고래 카페는 고래 카페가 아니었다. 아무튼 내가 인터넷에서 본 거기가 아니었고 심지어 열려 있지도 않았다. 전시들 입장 마감 시간은 지났고 숙소로 가기에는 아까웠으나 할 일을 찾기는 귀찮았고 이렇게 배부른 상태로는 뛸 수도 없었다. 영화관이 있을 정도면 키링이랑 휴대폰 케이스 파는 그런 잡화점 정도는 있겠지. 그런 데서 장갑 파니까 거기서 하나 사자고 생각했다.



택시는 엄청 빨리 달렸다. 나한테 길을 묻지 않았다. 용인과 수원의 경계에서 분당으로 가려 할 때 나는 열에 여섯 번은 택시기사가 나에게 묻는 것에 대답해야 했다. 어디로 가요. 어디가 빠르냐는 거지, 근데. 저도 잘 몰라요, 라고 말할 때마다 내가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하여튼 아저씨는 어디에 있냐고 묻지도 않고 부아아앙 출발했다.

CGV는 홈플러스 안에 있었고 그 건물 주변에는 어떤 못된 고양이의 아류작 같은 가게도 없었다. 홈플러스 아주머니는 내가 혹시 털장갑은 다 들어갔냐고 묻자 손 시리세요? 했다. 네. 오늘도 그리고 내일 아침에도 시릴 것 같아요,라고 속으로 대답했다. 저편 겹겹이 산에 쌓인 눈이 채 안 녹은 동네인데 장갑이 없다니. 하긴, 3월 말인데. 곳곳에 목련과 개나리가 얼굴을 터뜨린 걸 보면 번지수를 한참 잘못 잡은 건 당연히 내 쪽이었다. 그러니 아주머니가 그렇게 물었지. 테니스 칠 때나 쓰던 것 같은 얇은 스포츠 장갑뿐이었다. 여차하면 수면양말이라도 손에 씌워야겠다고 생각하고 마트 전 층을 다 돌았는데 없었다.




뭐, 그냥 가져온 양말이나 껴야지 어쩔 수 없었다. 발목에도 손에도 똑같은 줄무늬가 있으면 좀 웃기긴 하겠지만 뭐, 누가 보냐. 그리고 여기서는 정말로 그럴 것 같았다.

금요일 일곱 시 반, 대체 사람들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진지하게 궁금해졌다. 내가 호수공원으로 달려가는 십오 분 동안 마주치는 사람들이 내가 숙소에서 나와 지금까지 마주친 모든 인간들보다 많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시린 손은 뭐라도 씌워 놓으면 괜찮겠지만 배고픈 건 정말 어쩔 수가 없으니 지하 식품 매장에서 빵을 샀다. 집에 먹을 게 없다니. 내가 사 오지 않으면 먹을 수가 없다니. 아까처럼 문자 그대로 배고픈 상태로 삶에 대해 고뇌해야 한다니. 정말 라면 부스러기 단 한 톨도 없다니. 안 될 일이잖아?






식당에서 영화표를 예매할 때 좌석 96개 중 95개가 비어 있었다. 그런 주제에 자리를 고르려 하니 줄 전체가 예매 불가였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영화관 놈들. 장사도 안 되면서.

여하간 20년 전에 마지막으로 리모델링을 멈춘 것 같은 매표소에 앉아 강릉시와 수원시와 용인시와 분당구의 인구와 면적을 검색했다. 그래 봬도 강원도에서 인구가 세 번째로 많은 도시였다. 20만, 용인시와 수원시가 각각 100만이 넘었다. 20만과 100만. 사람들이 다 어디 갔나 생각하는 게 이상한 게 아니었다. 정말 없으니까 없는 거였다.




키오스크에서 누가 티켓을 뽑았다. 차림을 보니 고등학생 같았다. 그녀와 나는 단둘이 상영관에 앉았다. 우에노 주리가 참 예쁘고 당황스러울 만큼 젊은 타카하시 잇세이의 얼굴이 흥미로웠지만 재미가.. 없었다. 나 원래 이런 류 좋아하는데, 이거 재개봉까지 한 건데.


상영관을 나와 워치를 켜자 30분이 지나 있었다. 들어가서 잠부터 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또 택시를 타기는 그랬다. 망할. 또 버스를 타야 한다니. 또 버스를 타기 위해 어딘가를 찾아야 한다니. 아아. 제발요.






나는 개였다. 동네 개.

동네 개처럼 동네를 하릴없이 돌았다. 그런데 그 동네를 잘 모르는 개라는 게 문제였다. 다행스러운 점은 내가 진짜 개보다는 나을 수도 있다는 것에 있었다. 십 년 전 국어 선생님이 보충수업 자료로 썼던 책에 이 비유가 나온다. 본인을 개에 비유했다. 털 안 날리고 약간의 욕구를 해결할 수 있고 데리고 다니기 편하댔나.


나도 그렇다. 털? 날리긴 할 텐데. 개만큼은 아니지만 그 책의 작가는 대머리였고 나는 대머리는 아니니까. 그래도 안 짖고 애완동물 출입 가능 가게를 골라 다니지 않아도 되고 약간의 말동무도 해줄 수 있다.

근데 대부분의 개는 주인에게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존재잖아. 나는 그건 아니지.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좀 나아진다. 아. 어딘가 여행을 갈 때 동무가 필요하다면 내가 개보다는 나은 점들을 생각하면 되니까. 강아지처럼 졸졸 쫓아다니되 짖지 않고 화장실을 알아서 잘 찾아가는 정도면 나쁘지는 않을 수도 있잖아?




낯선 동네로 들어온 개는 뱡향도 못 찾고 후각도 딸리는 주제에 지친 상태로 돌아다녔다. 여덟 시 반을 겨우 넘긴 도시는 너무 깜깜했고 가게들에는 대부분 불이 꺼져 있었다. 여덟 시 반, 금요일 여덟 시 반. 아무리 인구 밀도가 차이가 난다기로서니 눈으로 보고 느껴지는 건 달랐다. 버스가 너무 안 와서 그냥 강릉역까지 걸었다. 추웠다. 입김이 나왔다. 물론 그건 내가 경량패딩만 챙겨 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저편 산에는 슈가 파우더 같은 눈이 아직도 하얀 곳인데.


내일은 뭐 하지. 진짜 아르떼랑 수족관 가야겠다. 그날 그것조차 안 검색해 봤으면 나는 정말 영영 아무것도 안 했을지도 모른다. 나 정말 ADHD인가? 왜 이렇게 집중을 못 하지. 근데, 그렇다 한들 어쩔 거야. 흠.

뭐 그런 생각을 하며 깜깜한 버스에서 정말 신기하리만치 깜깜한 바깥을 보며 송정으로 돌아갔다. 강릉이 이런 데였나. 어떻게 이렇게까지 개미 한 마리 안 보이지. 없다기보단 눈에 안 보였다. 너무 어두워서.




숙소의 텔레비전에는 윤두준이 출연한 회차의 예능이 나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큰 화면으로 보니 낯서네요. 그리고 여전히 항상 그렇듯 너무 잘생기셨네요. 반가웠다.

사 온 깨찰빵과 식사빵을 냉장고에 넣고 잠옷을 꺼냈다. 캔맥주는 따지도 못했다. 졸린 건가? 아무튼 내일은 이러면 안 될 것 같았고 유럽이며 동남아며 제주도를 알차게도 다닌 주변인들에게 진정 신기한 감정을 느꼈다. 정말로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대단하구나. 여행에 당위 같은 걸 만들지 않고 싶어 했는데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내일은 좀 덜 개 같이 돌아다녀야 할 듯했다.




그래서 기억하기로 했다. 나는 개다.

그 동네 지리를 모르는 동네 개. 꼴에 한 곳에서 너무 같은 방식으로 사느라 타성에 젖은, 버릇 나쁘고 팔자 좋은 개. 지하철만 타느라 불평불만만 가지각색으로 할 줄 아는 개.

내 목줄을 내가 쥐어야 했다. 돈 주고 온 낯선 곳 아닌가.


그렇게 씻지도 않고 잤다. 닭이 울었다. 이럴 거면 왜 왔지 하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눈을 떴다. 다행이었다.




강릉역 가던 길.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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