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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돈내산 외박 #1

1/3. 아무 생각이 없어서 아무 생각이 없는

by 이븐도





기사 아저씨는 캐리어를 보자 앞자리 앉으세요, 했다. 좋았다. 버스 앞자리에 앉으면 더 큰 화면을 독점하는 느낌이다. 옆에 앉은 아저씨는 대뜸 캐리어 몸통을 두들기더니 좋아 뵈네요, 튼튼하겠어.라고 했다. 글쎄요, 더 굴려 봐야 한다고 대답했다. 바퀴도 몸체도 잔뜩 고난을 겪어야 튼튼한지 어쩐지 알 수 있는데 오늘은 일렀다. 부산에서 나를 짜증나게 했던 캐리어를 버리고 새 걸 샀다.


아저씨는 외국 가세요? 했다. 아니요. 강릉 가요. 아하. 짐이 많으시구나. 아하하. 아저씨가 안전벨트를 맸다. 나도 따라 맸다. 익숙한 길을 빨간 버스가 달렸다. 앞으로 법무부 호송 차량이 지나갔다. 내 십새끼들의 행방이 궁금해지려 할 때 금곡동을 지났다. 출퇴근 때마다 저 멀리에 보이던 건물이 지나갔다. 응, 안녕. 당분간 안녕 안녕. 옆자리 아저씨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아마존으로 뭔가를 열심히 고르고 있었다.




판교를 지나고 양재를 지나고 한남동을 지났다. 형광조끼를 입은 경찰관들이 비싼 아파트인지 빌라를 둘러싸고 있었다. 세상이 시끄러웠다. 지나온, 지나가는 곳들을 혼자서 또는 같이 갔던 일들이 생각났다. 생일카페 가던 날, 친구와 치킨을 먹은 날, 나 혼자 나갔던 또 어떤 날들. 또 뭐 했더라. 하여간 크고 작게 뭔가 떠오르다가 말았다. 아저씨는 을지로에서 말 한 마디도 없이 쑥 내렸다. 내리면 인사라도 해야 하나 생각했는데 그냥 내리시길래 혼자 무안해질 뻔했다.






서울역에 도착했다. 혼자 여행을 가려고 서 있긴 처음이었다. 역사 안에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사람들이 스토리웨이에서 보리차와 에너지드링크를 사서 나왔고 과자와 샌드위치를 들고 서 있었다. 롯데리아와 뚜레쥬르에는 줄 선 사람이 꽉 차 있었다. 카카오샵을 구경했고 지갑을 지켰다. 배가 고팠으나 어차피 기차에서는 내내 앉아 있기만 할 거니까 그냥 가방의 방울토마토를 먹었다.


사람들이 가게에서 나오는 장면은 세상 가장 재밌는 구경 중 하나다. 비 오는 날 사람들이 들고 있는 우산 색깔을 보는 것만큼 재밌다. 각기 알록달록한 캐리어를 끌고서 손에는 음료 컵을 들고 어딘가로 갔다. 기차역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뭐 좀 잘 안 되면 어떤가 싶었다. 뭐가? 나도 몰라.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좋았다.




기차를 탔다. 용산역을 지날 때 건너편의 지하철을 비웃어 줬다. 도 안녕 안녕. 용산을 지나자 양지바른 곳에 개나리들이 피어 있었다. 사람들이 다 코트며 패딩을 아직 입고 있어서 사실 좀 두려웠는데 살짝 위안이 됐다. 더워져서 외투를 손에 들고 다녀야 하는 것만큼 귀찮고 사람 은근히 지치게 하는 일도 없다고.


강가의 비싼 아파트들과 건물들을 지났다. 하이라이트 멤버들이 사는 성동구를 지나 청량리에 도달했다. 여기랑 여기가 이렇게 가까웠나. 물론 나는 기차를 타고 있지만.

청량리역을 지나자 휘경동이 나왔다. 또 다른 출퇴근을 하던 곳. 얼핏 보이는 건물들이 그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았다. 항상 떠나고 싶었고 딱히 미화된 추억조차 없는 듯한데 어쨌든 기억 속에 분명 존재하는 곳. 괜히 신기했다. 근데 4년이나 됐어. 과장 좀 보태서 2주 전 같은데.






엄마 아빠가 대전에 있을 때는 기차를 엄청 자주 탔다. 수서역이든 서울역이든 많이도 갔고 나는 내가 그때 늘 심신이 지쳐 있어서 기차가 좋은 줄 알았다. 아니었다. 어딘가에 도착해서 무엇이 되었든 할 일을 하기 전에, 가장 적절하게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시간이잖아. 게으른 내게 딱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알아서 간다. 풍경도, 지역도, 내가 지나온 시간도. 딱히 집중할 필요도 없는 영상이, 장면이 차창 바깥과 의식을 지나갔다.




눈을 뜨니 원주였다. 원주를 지나니 횡성이었고 미세먼지가 심해져서 뭐가 보이질 않았다. 강원도, 공기 좋은 거 아니었나. 이래서야, 원.. 하는데 슬슬 머리가 아팠고 이를 부딪혀 입모양으로 우 아 우 아 하면서 침을 삼키고 있으려니 눈이 안 녹고 뭉쳐 있는 밭들이 지나갔다. 개나리는 안 보인 지 오래였다. 겹겹이 산이었다.


아, 맞다. 강원도. 잘 모르지만 익숙해져 있는 것보다 더 큰 산들이 잔뜩 겹쳐 있었다. 귀가 먹먹했다. 그리고 더 헐벗은 것 같은 산들에 하얗게 눈이 씌워져 있었다. 어, 이 느낌 아닌데. 낯선데. 이게 바로 .. 북부의 침엽수?! 하는 생각을 했다. 평창을 지나고 있었고 저편에 보이는 땅은 잔뜩 젖어 있었다. 그리고 눈발이 날렸다. 좌석 저쪽에서도 누가 사진을 찍었다. 설마 강릉에도 눈 오나, 이런.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도 사진을 찍어 누구에게 보내는 것 같았다. 몸을 좌석에 한껏 붙이고 눈이 오는 걸 쳐다봤다.




여찬리라는 곳을 지나자 다시 목련이 피어 있고 벚꽃이 곳곳에 핀 주택들이 보였다. 강원도구나, 진짜. 땅이 축축하고 산이 크고 집들이 드문드문 있는 서늘한 동네.

사실은 이대로 좀 더 앉아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어폰이나 꽂고 계속 반수면 상태로 돌고 싶었다. 좋았다는 얘기다. 그렇게 정말 도착했다. 바다와 무계획과 찬바람이 나를 기다리는 곳으로.




쏘 어메이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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