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비

지르텍 시즌

by 이븐도



엄마에게 말할 수 없는 짓.






밖에서 먹는다. 밖에서만 먹는다. 열흘쯤 됐다.

효과가 꽤 있다.


환승을 두 번이나 해서 친구와 패왕별희를 보러 갔다. 떡볶이에 김밥을 먹고 설빙에서 빙수를 먹었다. 편의점에서 과자를 사서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봤다. 전시회 티켓 마지막 날이라 잠실까지 갔다. 벤치에 앉아 프로틴 드링크를 마셨다. 근무가 끝나고 집에 와서 비상구에 앉아 컵라면을 먹었다. 도시락통을 가져가 병동에서 먹었다. 오직 과자를 먹기 위해 밖으로 나가 공원에 앉아 구운감자를 먹었다. 초코송이는 가는 길에 다 먹었다. 러닝을 하고 돌아오는 길목의 수많은 식당들 중 하나를 갔다. 돈까스를 사 먹었다. 남은 돈까스는 그 다음날 그 공원의 흔들의자에 앉아서 먹었다.





이 방법으로 냉장고에서 사실 반 년은 넘긴 듯한 잔멸치볶음을 없앴다. 냉동실의 미역국과 유통기한이 1년 전으로 찍혀 있던 비비고 고등어를 먹어치웠다. 살이 좀 빠진 것 같고 스트레스가 줄었다. 병동에서 짬이 조금도 나지 않아도 예전처럼 화가 안 난다. 어차피 집에 가서도 안 먹을 거니까. 어디서든 먹으면 되니까. 우울이나 그 비슷한 고착 상태를 강화하는 게 먹고 자고의 반복이라고 느꼈다. 먹는 건 밖에서도 할 수 있지만 자는 건 못 한다. 그래서 하나를 치웠다.


햄버거가 먹고 싶어도 밖으로 나가야 하고 짬뽕이 먹고 싶어도 밖으로 나가야 한다. 끓인 라면은 못 먹는다. 정 먹고 싶으면 직원식당이라도 가는 수밖에. 과자 하나가 먹고 싶어도 나가야 한다. 비상구로 나가든 출근길에 먹든 한량처럼 공원에 앉아 있든.








미쳐 있을 땐 미쳐 있는 걸 모르는 것 같다. 작년. 생리가 다가오면 다리가 아픈 게 너무 짜증나서 인공지능에게 여자 운동선수들이 월경에도 불구하고 훈련이나 연습량을 유지하는 방법을 물었다. 어떻게 물어봐도 비슷한 답이 나와서 포기했다. 관건은 오메가 쓰리 섭취와 근력운동이었다. 먹기 싫었고 하기 싫었다. 후자는 그래도 핑계가 조금 있다. 나는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몸치인 탓에 어설프게 뭘 따라했다가는 몸이 더 망가지기 딱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땐 내가 그렇게 달리기에 진심인지 몰랐다. 돌아보니 그랬다.





무슨 그림자 그림 전시였다. 주말이었다. 그 전날에 앨범을 다 버렸다. 사진만 그득한 그것들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게 답답했다. 솔로앨범 두 개가 비닐포장도 안 뜯은 새 거였다. 버리기가 좀 그랬다. 딱히 감성적인 이유가 아니라 너무 새 거라서. 그래서 가는 길에 알라딘에 팔아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과자값이라도 나오겠지 싶어서.

종합운동장역을 지나는데 다시는 예전의 그런 기분으로 거길 찾을 일이 없을 것 같아서 기분이 좀 이상했다. 콘서트가 열리면 다 갔다. 팬미팅이고 솔로콘서트고 무조건 올콘.


몇십만원을 써도 아깝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비싼 건 비싼 거였고 좋은 건 좋은 거였다. 돈 때문에 그런가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승영언니는 내 아이디로 예매에 성공했다. 연말에 그걸 제출하면 내년에 환급받을 수 있다. 근데 그건 굳이 그걸 안 해도 받을 수 있는 돈이다. 그냥 받게 되어 있는 금액. 그럼 누가 공짜로 보내준다면 갈래? 하는 질문에도 답은 노. 나는 그전날이나 그 날이나 그 다음 날에도 출근을 해야 할 거고 그럼 피곤할 거였다.

다녀와 주는 대가로 돈을 더 준다면 모를까 갈 이유가 없었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시간이며 돈을 쓴 활동이 이렇게 수도꼭지 잠그듯 끝나 버리는데 걸리는 시간. 2년. 놀라웠다. 어떻게 그 땐 그랬지 생각했다. 미쳐 있던 게 맞았던 거지.





집에 와서 한 시간만 자고 일어나야지 했던 게 열두 시간이 된 날이 많아졌다. 저녁 여섯 시 사십 분에 일어나야지 했던 게 일어나 보니 아침 여섯 시고 뭐 그런 거. 밖에서 밥을 먹는 것의 장점은 먹고서 조금이라도 걷게 된다는 것. 공원은 1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십오 분은 걷는다. 오프 때 커피 한 잔을 들고 그 흔들의자에 앉아 왜가리를 쳐다봤다. 왜가리는 1시간 20분 동안 정말 아무것도 안 했다. 러닝할 때 한 번씩 한밤중 펜스에 앉아 있던 걸 봤는데 그 때와 달리 그들은 그 자세로 15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있었다. 저렇게도 살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다섯 시 반쯤이 되면 그 근방의 사무실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옆자리에 즐겁게 떠드는 엄마뻘 아주머니들이 앉아 있다 가기도 했다. 한 번은 도시락을 들고 나갔는데 누가 저러면 그네 안 무너지나 싶을 정도로 힘차게 벤치에 발을 굴러대고 있었다. 옆에 앉아 보니 발달장애가 있는 남자애였다. 이상한데 또 안 이상한 소리를 계속 냈고 그러면 그 옆 의자의 누군가, 누구누구야. 예쁜 말, 했다. 그러면 좀 잦아들다가 다시 시작. 발레스커트 같은 걸 입은 쪼끄만 여자애가 남자애랑 쪼끄만 축구공을 찼다. 나는 그걸 쳐다보면서 재채기를 하고 밥을 먹었다. 물새 소리와 저 멀리의 애들 소리와 또 무슨 풀벌레 소리인지 개구리 소리인지 모르겠는 걸 들으면서.








그래도 그 때 나 되게 행복했는데, 그거면 됐지 뭐. 다시 좋아할 수 있을까.. 같은 뭐 헤어지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을 좀 느끼다 잠실역에서 내렸다. 알라딘 간판을 멀리서 보는 순간 생각했다. 아. 이거 안 받아 줄 수도 있겠다,고.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예감이라기보단 데이터 산출값이라 그렇다. 이거 하나를 내고 팬싸인회를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어서. 당첨자들이 한 번에 백 장은 샀을 테니까.

종류가 다른 두 개 중 하나만 매입이 됐고 하나는 아예 받아주질 않았다. 적정재고 초과. 내가 살다살다 아이돌 앨범을 들고 가서도 이 말을 보다니. 은근히 무거워 도로 들고가기도 그랬다. 그래서 버려 달라고 했다. 하나당 3천원은 받을 줄 알았는데 천 원이 적립됐다. 쫄병스낵 하나도 못 먹는 돈. 살 때는 애정이었고 욕망이었으나 돌아서니 그냥 쓰레기였다.





어떻게 그 땐 그럴 수 있었는지 놀라웠다. 1월인가 12월인가 나중에 집에 처박혀 있을 나를 위해 예매한 전시는 생각보다 더 그냥 그랬고, 이제는 딱히 서울 어딘가를 기 쓰고 놀러다닐 필요도 없는 것 같았다. 집에 오는 길에는 야구 유니폼 입은 사람들을 잔뜩 마주쳤다. 팬심. 뭐 이리저리 좋은 말로 포장해봤자 그냥 잘생긴 사람들이랑 어떻게 엮여 보고 싶었던 게 그 시작점이었는데. 그래서 개개인 화보집은 안 버렸다. 그건 딱히 버리고 싶지 않았다.


선임 중에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왜 재밌어요? 라고 하면 화만 내서 딱히 이유를 알아내진 못 했다. 뭐길래 저렇게 유니폼을 사 입고 그러나 궁금했다. 티켓도 구하기도 힘들던데. 한 번 해봤다가 그 피말리는 기분에 다시는 안 하겠다고 생각했다.






패왕별희 14000원. 헤일메리 14000원. 지르텍 6000원. 그 때 얼리버드로 산 티켓 12000원쯤. 돈이 아주아주 많았다면 그래도 덕질을 그만뒀을까, 그러게 됐을까 생각했다. 달에 한 천 만원쯤 맘대로 쓸 수 있었어도 이랬을까 생각했는데. 음. 그랬으면 카메라 사서 온갖 스케줄을 다 따라다녔을지도? 그렇게 예쁘게 찍고, 편집하고. 얼마나 좋아.

근데 생각해 보니 달에 천만원 가지고는 안 될 짓인데. 스케줄 뜨는 곳 정보, 공항, 또 해외스케줄. 거기다 장비 값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럼 그 돈보다 더 쓸 수 있다면? 근데 그 정도 돈이면 그거 말고 다른 일에 쓰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래서 내리는 결론이다. 아. 끝났구나. 앞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잠정적으로 좀 끝났구나.


소비. 시간이나 돈이나 쓰고 나서 뭘 회수하려 해서는 안 되는 것 같다. 그게 안 아까우려면 그냥 집에서 나오지 말고 집근처만 걸어다니며 사는 게 최선이겠지. 사람도 아예 안 만나고 돈벌이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패왕별희는 친구가 보여줬고 나는 빙수를 샀다. 헤일메리는 병원 복지포인트로 영화권을 사서 봤다. 지르텍? 그 정도야 뭐. 그러니까 돈을 아예 안 쓴 건 아니다. 그 땐 달에 몇 십만원도 안 아까웠는데 어째서 지금은 그야말로 천 원도 아까워져 버렸는지.





감정을 다 거세해 버릴 수 있다면 좋기야 할 것 같다. 사는 게 편하겠지. 목욕탕도 아니건만 비상구에서 젓가락과 밀폐용기가 부딪혀서 울리는 소리에 현타를 느낄 필요도 없으니까. 근데 이게 최고다. 정말 최우선의 선택이다. 집에서 그 굴레에 다시 얽히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이 편이 낫다.








헤일메리는 돈이 아깝지는 않았으나 그냥 그랬다. 마션의 마크 와트니가 관념적 이상형이었다. 이런 인물을 만들어낸 작가면 얼마나 더 멋진 캐릭터를 만들어냈을까 생각했는데 별로였다. 인물은 매력이 없는데 이야기의 줄거리도 약했고 곁가지는 많아서 번잡했다. 라이언 고슬링은 잘생겼고 화면이 예뻤고 음악을 잘 쓴 것 같았다. 근데도 그냥 그랬다. 그래도 그 핑계 삼아 밖에 나갔으니 충분했다.


패왕별희는 재밌었다. 친구와 나는 탄수화물과 당을 잔뜩 때려넣은 채 세 시간이나 앉아 있어야 하는 처지를 걱정했으나 기우였다. 영화를 보고 느낀 거?

살아남으려면 세 가지를 하지 말 것. 사랑에 빠지지 말 것, 고집부리지 말 것, 약 하지 말 것. 청데이는 그냥 부자 오타쿠인 원대인과 사귀면서 살았으면 좀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원대인도 죽어버리게 됐지만. 원랜 아, 돈이 최곤가? 라고도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지만 그 사람마저도 시대의 흐름 속에서 사라져 버렸기에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병원은, 똑같다. 어차피 계속 해야 하는 출근. 아픈 건 그들이지 내가 아니라는 뻔한 생각을 왜 이번 주에야 하게 됐는지 그게 가장 놀라웠다.

안 아픈 사람들이 훨씬 많은 걸지도 몰랐다. 사실 세상에는. 내가 하도 떽떽거리자 그 낙상 초고위험군 고집쟁이 할아버지는 남에게 피해를 주니 너무 그러지 말라고 했다. 순간 무슨 말인가 싶었다. 옆으로 혼자 돌아눕지도 못하면서 화장실은 홀로 가려고 하는 87세 노인의 말이었다. 그 때 좀 반성 같은 걸 할 뻔했다. 화나고 빡치면서도 어쨌든 내가 너무했나, 무례했나 생각했다. 그러나 그를 화장실에 데려다 주고 그가 기저귀와 바지를 제대로 추어올리지 못해 변기에 빠져 있는 속기저귀를 빼내면서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고 느꼈다.





균형 잡는 게 제일 어렵다. 나는 아직도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모르는 채로 살지 뭐. 알면, 그렇게 쉬웠으면, 안 힘들었겠지.


싫긴 싫다. 착해지려면 그들이 해 달라는 대로 해 줘야 한다. 교오양 있게 남으려면 그러면 된다. 그럼 그들은 꽂고 있는 관이 안에서 엉망으로 비틀리거나 빠지거나 넘어지면서 난간에 부딪히거나 바닥에 엎어져 중환자실로 가야 한다. 착하게 굴 수 있는 건 여건이 될 때 면회를 오는 그들의 가족이다. 내가 아니라.

그리고 나는 그들의 가족이나 친지가 아닌걸.

일하는 사람이다. 돕는 사람. 치료를 돕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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