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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수민 Dec 13. 2023

공개채용을 통해 기업들의 내정자 뽑는 문화에 대하여

공개채용을 통해 기업들의 내정자 뽑는 문화에 대하여


알고는 있었다. 공개채용을 통해 일부는 이미 정해진 사람을 뽑는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땅이 좁고 한정된 자원안에 정이 많은 집단주의 한국사회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혈연, 지연, 학연이라는 불가결한 필수조건을 가지고 있어야한다. 이미 많은 연구들에서 부모의 사회적지위, 경제능력에 따라 자녀의 학업능력과 직업과 미래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 나타나있다. 그리고 굳이 연구를 하지 않아도 한국사회를 살아가고 있다면 충분히를 넘어 뼈져리고 뼈아프게 알 수 있는 것들이다. 


민주주의 사회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은 눈에 보였던 봉건사회보다도 더 뚜렸해 졌고, 혈연, 지연, 학연으로 이루어진 그들만의 각각의 사회는 어느 누구도 넘나들거나 넘볼 수 없는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좁은 땅덩어리에 왜그렇게 많은 세계들이 많은지, 좁은 만큼이나 가까운게 아니라 더더욱 소통할 수 없을만큼이나 떨어진 섬들이 모여있는 사회같다. 누군가가 무심코 버린 물 한방울은 하나의 섬을 삼킬 만큼, 누군가 가볍게 치워버린 빵부스러기는 하나의 섬을 비추고있던 태양을 가릴만큼, 누군가에게 필요없어 떨어진 각질은 하나의 섬을 부숴버릴 만큼이나 각각의 세계의 크기는 천차만별이었다. 그것은 한국사회에서 수없이 자행되어 왔었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것을 과연 불평등이라고 부조리하고 부패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것이 한국사회를 이뤄왔던 역사이며, 자연스러운 문화이다. 그리고 그렇게 각각의 세계들이 어우러져 사는 것이 인생이고 삶이기에 나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태어나는 곳을, 부모님을 선택할 수 없는 노릇인데, 안타까운건 살아가는 세계조차도 선택할 수 없고 그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한 인간으로서의 새로운 생명의 한 존재로서 그 존엄성은 온데간데 없고 학연, 혈연, 지연의 그림자로 뒤덮여져 살아간다. 


과거의 여자들이 겪었던 보이지 않은 유리천장처럼 혈연, 학연, 지연으로 인한 유리천장이 사회 곳곳에 있었고 그것에 대한 특혜를 받는 사람들과 받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유리천장은 암묵적인 계급을 나누고 있었다. 자신에게 입혀진 혈연, 학연, 지연의 그림자로 그것이 본래의 자신인양 자신을 탐색하지 않고 자아를 형성하여 우월감 또는 열등감을 가지고 생각하지도 않아도 되었을 긍정적,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고, 그것으로 자신을 정의한다. 그것은 자신의 내적인 동기와 스스로 생각하여 정의한 것이 아닌 일말의 존엄성도 허락되지 않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처럼 그림자일 뿐이기에 알 수 없는 공허감에 허덕여, 남이 정해준 기준과 평균과 평범에 부합하려 애쓰게 되는 것 같다. 남이 정해준 그 기준들은 마치 절대 멈추지 않는 시간을 멈추게 하려는 것과 같은 노력이며, 기준에 부합한다고 하여도 단지 시계바늘을 자신이 잡아 놓고 시간을 흐르는것을 멈추게 했다고 착각했다는 것이며, 실체가 없는 구름위에 튼튼하고 화려한 집을 짓을 지으려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렇기에 한국사회는 자살율 1위, 출산율 최하위, 노인빈곤율 1위 라는 타이틀을 얻어낼 수 있었던게 아닐까 싶다. 인구수를 높이기 위해 출산율을 높여도 노인 빈곤율과 자살율을 낮추지 않으면 출산율을 높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다. 온전한 자신의 자아를 찾고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볼품없이 취급받고 때로는 사치가 되고 비웃음거리가 되는 사회에서 개인에게 덮여진 그림자 속에 텅빈 자아에는 비뚤어진 자부심과 질퍽거리는 분노와 역겨운 슬픔이 자리 잡고 그것은 곧 개인의 행동으로 나를 죽이거나 남을 죽이거나, 자책하거나 혐오하거나 그마저도 할 수 없다면 무기력감에 하루를 겨우 버텨내며 죽지못해 살아간다. 


태어나면서 나라를 부모를 혈연, 학연, 지연을 선택할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나라, 부모, 사회탓만 하기에는 그런 세상 속에서도 자신의 세계를 바꾸는 사람들은 항상 있었고,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주어진 세계 속에서 나의 태도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그 선택의 폭 마저도 때로는 정해진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을 뚫을 수 없는 것도 인정해야하는 슬픔도 있다. 영화 서울의 봄을 보고 느낀 답답함과 안타까움, 슬픔과 분노는 사실 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지금도 참 많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었다. 


살아보니 인생은 필연보다 우연에 좌우되었고 세상은 생각보다 불합리하고 우스꽝스러운 곳이었다고, 그래서 산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사소한 즐거움을 잃지 않는 한 인생은 무너지지 않는다고 어느 정신과의사 선생님의 말씀처럼 그런 세계와 세상 속에서 사소한 즐거움을 잃지 않는건 온전히 개인의 몫이며 사소한 즐거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참 찬란하게 슬픈일이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알콜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수없는 신체적폭력과 언어적, 정서적 폭력으로 인해 수많은 상처와 트라우마로 얼룩진 나의 난자한 세계는 이 한국사회에서 별로 환영받지 못했고, 시작부터 혈연, 학연, 지연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너무나도 차가운 시선과 더러운 대우를 당연시 받아야했다. 나와 같은 상황 속에서, 나보다 더한 상황 속에서 태어나고 살아간 사람들도 참 많다는 걸 안다. 차마 글과 말에 담을 수 없는 추악하고 더럽고 억울하고 비참하고 아프고 슬픈 상황들로 삶이 가득한 삶들을 너무나도 많이 알고 있다. 


생각보다 세상은 많이 불공평 했고, 누가 정한지 모르는 그런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에는 글렀다는 걸 일찍이 알았고, 피하고 싶고 역이고 싶지 않은 존재이기에 그런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는걸 애써 가려가며 아무렇지 않은 듯 평범하게 사는 척하는걸 배워버렸다. 비참한 건 그것에 익숙해진 나머지 남이 먹고 맛없다고 땅에 뱉어버린 음식물이나 먹고 토한 토사물을 호화스러운 만찬이라며 한껏 꾸며 인스타에 올려 자랑하며 세상은 살아갈만 하다며 자위하고 난 후 이후에 음식물쓰레기와 토사물이었다는 걸 알게되고 씁쓸하게 웃어보여야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회에서 나는 사소한 즐거움을 찾아 살아간다 하여도 자녀를 살아가게 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평범한 척을하며 살아가던 와중에 어쩌다가 알게된 지인에게 제안이 들어왔다. 자기가 들어갈 자리인데 양보해주겠다며. 어디 언제 공채가 뜰테니 지원하라며. 그리고 그 대가는 내가 차마 감당하기 힘든 것들이었고,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걸 보고 그동안 받아왔던 더럽고 차갑고 추악한 대우들이 떠올랐다. 그런 대우가 익숙해졌기에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건 아무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끝내 나에게서 원하는걸 얻을 수 없다는걸 알게 되었는지,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걸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었는지 그 제안을 철회했다. 


알고 있었다. 기업이 공개채용을 통해 내정자를 뽑는 문화를 말이다. 사장님들 사이에서 오고가는 이야기들 속에서 많이 들었다. 하지마 듣는 것과 내 눈앞에 펼쳐져 직접 격는 것의 온도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동안 좋은 기업에 가기 위해 피나도록 죽을만큼 노력했던 시간들과 탈락통보를 받고 너무나 좌절스러웠던 시간들이 스쳐지나갔다. 나 뿐만아니라 내 주변의 친구들과 사람들의 자신의 존재가치와 존엄을 애써 지켜가며 무력감과 우울과 비참함과 싸우며 희망을 잃지 않고 쌓아온 시간들이 떠올랐다. 공개채용을 통해 내정자를 뽑는 문화는 그렇게 준비해온 사람들의 노력을 넘어 사람의 존엄을 기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개인의 노력과 자격을 무시하고 기업의 투명성과 공정성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내정자를 뽑는 것이 기업의 필요한 것이라면 차라리 대놓고 하는게 더 나은 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나같이 아무런 힘도 없고 소시민으로밖에 살 수 없는 평범도 사치인 사람에게 글로라도 표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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