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질투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잘난 체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버릇없이 행동하지 않고
이기적이거나 성내지 않으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
고린도전서 13:4-7
사랑한다는 것에 대하여. 남녀 간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사랑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리고 자신이 자라오면서 누군가에게 받았던 사랑의 방식을 토대로 다시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고 누군가와 사랑을 한다. 보통은 무의식적으로 받은 대로 사랑을 한다. 단편적인 예로는 물질적인 것으로 사랑을 받아왔다면 시간이 지나서도 사랑에 대한 표현을 물질적으로 하거나 한다. 물질적으로 사랑을 받고 표현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다. 물질적인 사랑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사랑의 방식에는 정답이 없다. 하지만 나의 사랑의 방식을 상대방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예의와 배려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 예의가 없는 사랑은 폭력이라고 어디선가 들었다. 그리고 사랑이 강요가 된다면 그것 또한 폭력이 된다. 남녀 간, 친구 간, 부모자식 간, 형제남매간, 직장동료 간, 지인 간, 더 나아가 직업, 취미, 물건, 반려동물 등등 까지도 우리는 수많은 모든 관계와 상황 속에서 사랑을 나누고 표현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랑의 방식은 정말 많이 다양하다. 부모자식 간의 사랑과 친구 간의 사랑은 다르듯이 말이다. 하지만 모든 사랑의 방식의 기초가 되는 것이 있다면 ‘존중’이 아닐까 싶다. 존중이전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인정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방식이 다를 수 있음을 알아야 하며 부모자식 간의 사랑을 직장동료에게 똑같이 원할 수 없듯이 서로가 현재 어떤 관계인지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사람마다 각자가 정의하는 사랑의 의미도 다르다. 그리고 자기가 정의한 사랑과 실제로 자기가 사랑을 하는 방식도 많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기가 받은 사랑의 방식대로 사랑을 하기도 하지만 자기가 받고 싶은 사랑의 방식으로 사랑을 하기도 하고 그리고 반대로 자기가 받은 사랑의 방식으로 사랑받지 못하면 사랑이 아니라며 부정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행위만큼이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깊이 알아볼 수 있는 거울은 없는 것 같다. 수많은 관계와 상황 속에서 사랑을 통해 사람들을 많이 알 수 있었다. 나의 사랑의 방식은 늘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사랑의 방식에 대한 정의는 사람들마다 극명하게 바뀌었다. 누군가는 속 깊고 따뜻하다고 아늑하다고 하고 편안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차갑다고 냉정하고 이기적이라 했다. 다른 사람이 내린 나의 사랑의 정의에 대해 너무 제각각이라 그렇게 의미를 두진 않았다. 내가 알 수 있었던 건 그런 말과 생각을 통해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었고 그 사람의 사랑의 방식으로 그 사람의 결핍과 상처를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계속 보게 되는 와중에 반대로 나의 사랑의 방식은 어떤 것이었고,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는 어떤 결핍과 상처가 있는지 돌아보았다.
가장 먼저 내가 받았던 사랑의 방식은 어떤 것이었나 돌아본다. 내가 받았던 사랑 중에 큰 하나는 ‘기다림’이었고 첫째로 받았던 사랑은 경이와 감탄이었다. 그리고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따뜻한 것이었고 시기적절했고 무조건적이었고 세심했고 섬세했고 편안했다. 어떤 수식어가 들어간 화려한 말보다 아주 농후하고 여유롭고 깊은 행동으로 사랑을 받았다. 가족으로부터 참 상처도 많이 받은 것 같았는데 돌아보니 상처만큼이나 그 이상으로 사랑을 참 많이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는 것 같다.
할머니는 내가 사람을 죽여도 내편을 들어줄 만큼이나 사랑을 해주셨다. 아주 어렸을 때는 화장실에서 씻으면 추울까 봐 안방에 큰 다라를 두고 따뜻한 물을 담아 조심히 세심하게 씻겨주셨다. 그리고 내가 스무 살이 넘도록 밤에 화장실 가기 불편할까 봐 요강을 두시고 나의 대소변을 치워주셨고 자기 전에는 목마를 때 물 마시라고 머리맡에 물을 놓아주셨고, 많은 말을 하시지 않으셨지만 묵묵하게 사랑을 해주셨다. 할머니네 가면 차소리만 들으시고도 버선발로 뛰어나오셔서 환영해 주셨고 헤어질 때면 본인의 시야에서 사라지실 때까지 잘 가는지 지켜봐 주셨다. 이건 아주 단편적인 할머니의 사랑이다. 모든 게 다 사랑이었다.
엄마도 아이들이 학교에 갔다 와서 엄마가 집에 있어야 편안해할 것 같아서 늘 집에 계셨었고, 학교 갈 때는 잘 다녀오라며 안아주고 뽀뽀해 주셨다. 남편을 여의고 일찍이 돈벌이를 하러 나가야 해서 그러지 못할 때는 늘 아침을 차려놓으시고 쪽지로 국 데워 먹어라, 사랑한다 남겨놓으시고 계란 프라이를 해놓으시고 케첩으로 늘 하트나, 스마일을 그려놓으시곤 하셨다. 공부할 환경을 만들어주면 알아서 공부할 거라고 책상과 책들을 사놓으시고 공부하라 한 번도 닦달하거나 강요하시지도 않으셨다. 더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하시며, 커서도 어릴 때 상처주어서 부족한 엄마라서 미안하다 이야기하셨다. 내가 방황을 크게 할 때도 말없이 아파하시며 묵묵히 기다려주셨다. 엄마의 사랑을 이야기하려면 생을 다할 때까지도 부족할 것 같다. 다 사랑이었다.
아빠가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기억이 옅어지고 있지만 아빠의 사랑은 엄마에게서 듣거나 문득문득 떠오른 것이 있다. 워낙 사랑에 서투르신 분이었던 것 같다. 자세하게 다 이야기할 순 없지만 아빠도 참 사랑이 많으셨던 분이셨다. 초등학생 때 단 둘이 아빠랑 시장에 순대국밥을 먹으러 갔는데 아무 말 없이 나에게 순대랑 고기를 넣어주시는 걸 보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엄마가 좋아하는 도토리묵을 사들고 가시는 걸 보고. 사랑을 알지만 이게 아빠가 할 수 있는 사랑의 표현이었구나 이제는 알게 되었다.
동생에게도, 친구에게도, 직장동료에게도, 나는 참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 사람마다 사랑의 방식은 다르지만 내가 느낀 사랑의 바탕은 늘 ‘존중’이었고, 역시 그 존중도 기다림이라는 마음이 있기에 가능한 거였다. 그래서 내가 크게 받았던 사랑의 방식은 ’ 기다림‘이었고 무례하지 않았고 사려 깊고 편안했고 다정했고 너그러웠다. 가끔은 나의 잘못에 대해서 따끔하게 이야기해 주었지만 그마저도 배려와 예의 있게 해 주었고, 마지막엔 늘 존중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사랑을 하는 것과 동시에 사랑을 스스로 느끼는 것, 나는 그런 사랑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었고 나 또한 그런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의 사랑의 방식과 내가 내린 사랑의 정의를 돌아보고 나니 사랑을 나누는 관계는 각자의 사랑의 모양과 크기가 들어맞아야 된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게 들어맞지 않는다고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자기의 모양과 크기에 맞는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게 제일 좋은 것 같다. 물론 잘 맞는다고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아니다. 내가 배우고 받은 모든 사랑의 기초는 존중, 예의, 배려이다. 내가 하는 행동과 말이 예의가 있나, 배려가 있나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나의 사랑의 방식에 대하여 다른 사람의 판단이 제각각임을 보고 깨달았다. 나의 사랑의 모양과 크기는 누군가에게 벅찼을 수도, 따뜻했을 수도, 차가웠을 수도 있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배운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랑받으려 애쓰지 않고 내가 받은 사랑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했고, 그 방식으로 사랑으로 느꼈다.
성숙한 사랑은 자기가 받았던 사랑의 방식을 돌아보고 곱씹고 곱씹어 가장 좋은 것으로 상대방이 소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사랑을 함으로 사랑을 느끼는 것, 너무 뜨겁지고 차갑지도 않고 따뜻하고 아늑한. 그런. 존중이 있다면 신뢰는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었다. 또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 넘어져도 힘들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건 내가 강해서가 아니고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내가 존재하는 삶의 전부였다.
그러므로
믿음, 희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남아 있을 것이며
그중에 제일 큰 것은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3:13
그리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십시오.
고린도전서 16:14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줍니다
베드로전서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