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HMD를 쓰고 보게 되는 CGI영상을 개념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VR 에서의 공간디자인을 의미하는 디지털 씨노그래피에 대해 한번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구글의 틸트브러시는 오큘러스와 바이브에서 구동 할수 있는 페인팅 프로그램으로 실물크기의 그림을 3차원 입체 공간에서 콘트롤러를 붓삼아 그림을 그릴수 있는 툴입니다. 오늘날 와콤 타블렛과 같은 드로윙 패드의 정교함은 실제 드로윙을 거의 따라잡을 만큼 발전했지만 초창기의 와콤 타블렛은 그림을 타블렛으로 그릴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정교함은 많이 떨어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만약 틸트 브러쉬과 같은 VR 이미지 제작툴 들이 훨씬 정교해지고 쓰는 사람들의 기술수준도 향상해서, 수준급의 가상 조형 작업을 만든다면 이것은 무엇으로 불러야 할까요? (다른 3차원 CGI툴들이 당연히 사용되겠지만 드로윙 형식의 툴은 중요한 인터페이스가 될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가상의 조형물이 있는 가상의 공간은 무엇으로 불러야 할까요? 그리고 결과물은 어떠한 예술형태가 될까요? 틸트 브러쉬 같은 도구로 만들지는 않았다는 점만 제외하면 실제로 이러한 질문들은 VR에 대한 실험적 프로젝트들이 만들어지던1990년대 초반 논의되던 질문들입니다. 그중 당시 논의되던 가상적 씨노그래피(의미상 디지털 씨노그래피로 번역) Virtual Scenography 가 이 대답에 가장 가까운 개념이 아닐까 합니다.
씨노그래피는 아마 무대디자인 정도로 번역 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무대 디자인라고 하면 배우가 극의 중심이 되는 설정에서 뒤 배경을 지칭하는 뉘앙스가 강한데 씨노그래피 라고 하면 독립된 단위의 무대 자체를 설명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씨노그래피의 논의가 가장 활발했던 1930년대 이태리의 미래주의연극의 경우 기하학적 조형물과 조명 만으로 연극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사실 배우 없이 씨노그래피 만으로 구성된 형태의 연극은 미래주의연극의 궁극적인 형태이기도 했습니다.) 미래주의 연극과 VR과의 관련성은 꽤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다른 글을 통해서 집중적으로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1990년대 초반, 가상현실에 대한 여러 실험들이 행해지던 시기에 가상현실의 공간과 연극무대와의 관련성에 대한 논의들도 진행 되었습니다. 그 중 텍사스 대학교의 ieVR 이라는 연구소의 연극적 실험은 디지털 씨노그래피의 개념 정립에 중요한 의의를 가집니다. 아무튼 무대 위 공연 형태 + 가상의 3차원 조형물이 씨노그래피 의 구성인 것을 생각한다면 VR을 통해 구현된 가상 조형물을 Virtual Scenography라고 명명하는 것은 언어적으로 자연스러운 연결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캔자스 대학 연극학과의 교수이자 씨노그래퍼였던 마크레니는 'VR 극장' 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용어에 대한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100% 컴퓨터 알고리즘으로 구현된 영상을 VR로 불러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마크의 작업들은 무대만을 VR로 구현했기 때문에 완전한 의미의 '가상현실극장' 이라기 보다는 디지털 씨노그라피에 더 가깝다고도 할수 있습니다. 1990년대 초반 마크의 작업 뿐만 아니라 다른 대부분의 VR의 실험적 프로젝트들이 현실을 촬영하고 재현한 형태가 아닌 컴퓨터 폴리곤으로 이루어진 기하학적 형태가 주로 쓰였던 것은 상당부분 현실을 완전히 구현해 낼 수 없었던 기술적인 한계에 기인합니다.
아무튼 ieVR은두 중요한 작업들을 만들었습니다. ieVR의 최초의 연극적 실험은 무대의 스크린에 큰 영상 프로젝터로 영상을 상영하여 가상의 무대를 만드는 방식 이었고, 두번째 실험에는 오늘날의 ar과 같은 방식이 쓰였습니다. 두번의 실험에서 관객들은 HMD를 쓰고 무대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를 보았습니다. ieVR이 만든 최초의 공연이자 대표적인 작품인 The Adding machine 에서 구현하는 씨노그래피는 환각에 사로잡힌 주인공의 내면의 공간 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적일 필요가 없었고 공간을 표현하는 정도로 쓰였습니다.(물론 90년대 초반 초연된 작품에서 보다 2013년 버전의 공연은 훨씬 발전된 CGI 기술을 보여줍니다.)
지금은 제한적이지만 VR 콘텐츠들이 더욱 활발하게 제작 되고 또 지금은 없는 다양한 새로운 예술 형식들이 VR을 통해 만들어진다면 어떠한 직업군이 필요하게 될까요? 저는 디지털 씨노그래퍼 라는 새로운 직업군이 생겨 나리라 생각합니다.
이 직업에는 CGI에 대한 기술적 지식, 디자인적 감각, 그리고 공연예술의 이해 등 융합적 재능이 필요 합니다. 구글의 틸트 브러쉬는 현재까지는 이미지 제작 툴로써의 기술적인 완성도를 향상시키는 과정에 집중하고 있으며 3차원 CGI를 통해 만들어진 영상물이 어떠한 형태의 콘텐츠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많이 진행 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하지만 결국 완성도 있는 - 디지털 씨노그래피를 통해 만들어진- VR콘텐츠의 관건은 형식에 맞는 나레티브를 발굴해 내는데 달려있지 않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디지털 씨노그래피는 어떠한 나레티브를 가져야 할까요? ieVR의 연구는 결과적으로 VR기술을 기존의 연극 형태에 새로운 무대기술을 적용한 형태가 되었지만 본디 연구의 방향은 3차원 공간에서 VR을 활용한 예술이 어떠한 형태가 될것인가 에 대한 고민의 형태 였습니다. 저는 디지털 씨노래피를 통한 가상 현실 예술의 이야기 형식이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모습이 될 것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아마도 예술의 역사에서 기술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었던 기획중 하나가 실현되는 형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만약 그렇다면 ‘연극’ 이 공간적 제약으로 인해 구현하지 못했었던 예술형식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1930년대에 이태리를 중심으로 만들어 졌었던, 미래주의 연극에 쓰인 씨노그래피 -그 중 몇몇은 기술적인 한계로 디자인계획 으로만 남아있는- 은 그 내용과 디자인이 오늘날 디지털 씨노그래피와 매우 흡사합니다.
미래주의연극, 영화에서 쓰인 이야기 구조와 공간 구성이 디지털 씨노그래피와 접점이 있을것이라고 제가 기대하는 이유입니다. 다른 지면을 통해 조금 더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말한것 처럼 디지털 씨노그래피가 미래의 예술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서사 형태에 대해서 고민해봐야 합니다. 아래는 FANTASYNTH라는 디지털 씨노그래피 작품 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콘텐츠가 예술 작업으로 가치가 있다고 보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