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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혜승 Mar 16. 2020

2. 색안경 끼고 보기

현대미술은 어렵다?

토끼굴에 떨어진 앨리스가 된 기분일 거야, 그렇지?

운명을 믿나?

영화 <매트릭스 The Matrix>(1999)에서 모피어스는

물잔 앞으로 네오를 이끌며 말한다.

빨간 약 줄까? 파란 약 줄까?

파란 약을 먹으면,

지금껏 그래 왔듯 믿고 싶은 걸 믿으며 살게 될 거야.

빨간 약을 먹으면,

원더랜드의 앨리스로 살게 되는 거지,

실체the real를, 진짜the truth를 마주하면서.    

빨간 안경 쓰실래요? 파란 안경 쓰실래요?

나에게도 선택의 기회가 왔다.

빨간 안경과 파란 안경 앞에서 눈동자가 흔들리던 나는

빨간 안경을 집어 들었다. 영화 속 레오처럼.


폴랫폼엘 아트센터에서 전시 중인《가능한 최선의 세계》(~5.3.)는 소설가 정지돈의 텍스트와 이은새, 정희민, 유영진 등 젊은 작가 10인의 시각 작품으로 구성된, 두 개의 세계를 제시한다. 세계는 예측 가능한 블루프린트와 예측 불가한 레드프린트로 나뉜다.

박아람, <두 해가 진 뒤>, 2019

우선 블루프린트는 AI가 통제하며 그래서 예측되는 세계다.

“AI는 가정법을 쓰지 않습니다. 단지 정보를 취합해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뿐입니다.”

“인생이 단단히 잘못된 거 같아요.”

“그런 건 블루프린트에 출력되지 않아요.”

“최고의 남편감이라고 했어요.”

“최고의 남편감인가 보죠.”

“바람을 피우는 게요?”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더 불행한 일도 많습니다.”

“기계의 관점이겠죠.”

“기계의 관점이 곧 우주의 관점입니다.

최하늘, <무언가를 기념하지 않고/ 역사가 없는 상태에서 조각하기>, 2019

레드프린트는 블루프린트의 밖, 다시 말해 세계의 예외다.

스무 살이 되는 해에 누구나 블루프린트와 레드프린트 중 한 곳을 선택해 살게 된다. 선택은 되돌릴 수 없고, 서로의 세계를 오갈 수 없다.

블루프린트 세계에선 아이의 미래도 예측된다.

“당신의 아이가 성인이 되면 레드프린트를 선택할 겁니다.”

블루프린트의 부모는 AI 예측에 절망한다.  

레드프린트의 세계는 그런 곳이다.

빨간 안경을 쓴 나는 블루프린트 세계에 먼저 발을 디뎠다.

색안경으로 세계를 엿본다.

보이는 걸 보는 게 아니다.

나는 붉은 눈으로, 붉은 세계를 보고자 했다.

본다는 건 투명한 행위가 아님을 말한 바 있다.

그 불투명한 행위를 사상가들은 저마다 해명하고자 했다.

변상환, <떡이 된 크로커다일>, 2019

칸트는 눈에 비친 인상을 정신 영역이 구성한다고 여겼다.

내 망막에 여리고 여린 색색의 잎들이 맺히면,

내 지성이 보편의 개념을 동원해 ‘꽃’을 구성한다.

후설은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본다고 했다.

내 눈동자에 길가의 꽃이 들어온들,

내 마음이 콩밭에 가있으면 그 꽃은 스쳐 지나갈 뿐이다.

메를로퐁티는 본다는 건 몸의 역사라고 했다.

머리가 꽃을 알지라도, 내 마음이 꽃에 닿을지라도

내 몸이 다가가지 않으면 꽃을 볼 수 없다.

그 꽃은 몸에 쌓인 역사가, 삶의 두께가 의미 짓는다.

내겐 기쁨이나, 다른 이에겐 슬픔인, 그리움인, 혹은 원망인 꽃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같은 꽃을 볼 수 없는 몸이다.

변상환, <Ⅱ주의 기록>, 2019. 7-9월

《가능한 최선의 세계》는 그런 해명들에 덧없음을 선고한다.

머리로 보고, 마음으로 보고, 몸으로 봤지만,

더 이상 맨눈이 아니라는 사실만 남았다.

신문, 라디오, TV로 시작돼 유튜브에 이른 매체의 진화로 세계는 넓어졌을까.

저마다 손에 든 핸드폰으로 브이로그를 전하는 시공의 해체가 도래했지만,

어차피 우리가 보는 세상은 이편 아니면 저편.

우리는 이제 색안경을 쓴 채 세계를 본다.

정지윤, <40관>, <8관>, 2019

우리가 보는 세계는 붉거나, 파랗다.

세계가 붉고 푸르고 노랗다 한들,

빨간 세상을 보고자 하는 이들은 빨갛게,

파란 세상을 보고자 하는 이들은 파랗게 보면 그뿐

그 누구도 실재에 주목하지 않는다.

눈물도 땀도 숫자로 대체된 지 오래.

우리는 몸이라기보다 시간당 얼마짜리 허상이다.

허상이 허상의 주관으로 세계를 구성하려 한다.

정희민, <과일>, <도넛>, <컵받침>...<테이블 위의 과일들>, 2018

빨간 색안경으로 본 블루프린트 세계는 공허하다.

형체도 없고, 고유색도 없다.

어차피 디지털 숫자 1과 0이 춤추는 넷망이다.

빨간 색안경으로 본 레드프린트 세계는 맹목적이다.

온통 붉어 정작 붉은 건 희석돼 투명해지고,

푸름만 짙게 그 이질성을 드러낸다.

파란 색안경으로 본 세계는 나의 감각 밖이다.

구체적 현실은 원더랜드의 고양이처럼

음흉한 웃음 뒤로 몸을 숨긴다.

유영진, <캄브리아기 대폭발>, 2017

콘크리트 구조물에 둘러싸여 일상을 살면서도

철근 하나가 툭 튀어나와 위협할 때,

비로소 구조물에 눈길을 주며 말을 건넨다.

그래, 이 도시에 너도 있었구나, 너도 실체라는 게 있니?

칸트를 따르면 사물 자체에 이르지 못하고,

니체를 따르면 사물 자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너도 나도 세계의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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