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연, 이적 <어느 날,> x 홍나리, 안승준 <어느 날, 우리는>
그림책 작가는 다른 장르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다루어야 하는 회화적, 서사적 요소를 파악하고, 그것을 적절하게 조율해 심상을 표현한다. 수많은 선택지 가운데 작가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요소들의 합을 즐긴다는 면에서 그림책의 독자는 작가가 내어놓은 생각의 오솔길을 뒤따라 걷는다. 작가가 무엇을 표현하고 성취하고자 했는지, 그 목표를 위해 무엇을 선택하고 배제했는지 찬찬히 굽어보며 그림 사이사이, 글 사이사이 스민 고민의 흔적을 줍는다.
다른 예술 분야처럼 그림책 역시 공들여 읽은 만큼 보상받는다. 30~40쪽짜리 아이들용 책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그림책은 딱 그만큼의 얼굴을 보여주고, 진지한 감응과 지혜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그림책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선물을 안긴다.
김승연 그림, 이적 글의 <어느 날,>과 홍나리 그림, 안승준 글의 <어느 날, 우리는>을 함께 읽으면서 오랜만에 그림책의 넓은 품을 느꼈다. 두 책을 따로 읽을 때는 발견하지 못한 생각거리가 비교해서 읽으니 우르르 딸려 나왔다. 비슷한 목적지를 설정한 것처럼 보이는 두 대의 차량이 각각 어떤 경로를 택해 자신만의 여정을 만들어가는지, 그 길이 얼마나 같고 다른지 차례로 살펴보는 기쁨. 멀고도 가까운 두 그림책 읽기의 즐거움을 나누려 한다.
두 책을 책꽂이에 꽂아놓고 책등을 보면 '비슷하다'는 첫인상을 가질지도 모른다. 제목의 유사성 때문이다. 두 책 모두 죽음을 다루고 있다는 점도 비슷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표지에서 느껴지는 시각적 인상은 확연히 다르다. <어느 날, 우리는>의 배경은 하얗고, <어느 날,>의 배경은 까맣다. <어느 날, 우리는>에는 색이 없고, <어느 날,>에는 색이 있다. 결정적으로 <어느 날, 우리는>은 '선'으로 그린 그림책이고, <어느 날,>은 '색면'으로 그린 그림책이다.
<어느 날, 우리는>은 그림이 서사를 전부 끌고 가는 글 없는 그림책이다. 말미에 간단한 글(창작의 출발이 된 노래 'We will see someday'의 가사 일부)이 나오긴 하지만, 영화가 모두 끝난 뒤 등장하는 짤막한 자막처럼 앞서 독자가 거쳐온 감상의 여운을 조금 더 길게 늘여주는 역할만 수행한다.
이야기는 특별할 것 없는 주택가에서 시작한다. 동네에서 따로 떨어져 걷던 주인공과 고양이가 서로를 발견하고, 눈길을 마주치고, 거리를 좁히다가, 시간을 두고 찬찬히 친근해져서,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장면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바뀐다. '관계 맺기'에 대한 책일 거라는 짐작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산산조각 난다. 한참 동안 얼어붙어 있던 장면. 죽음의 등장이 갑작스럽기도 했지만, 죽음을 시각화한 방식이 충격적일 정도로 새롭고 설득력 있었기에.
<어느 날, 우리는>이 죽음을 그리는 장면에서 우리가 만나는 건 꼬마 정령처럼 생긴 '생'이다. 생명, 살아있음, 생기, 에너지, 온기...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느낄 수 있는 그것.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생'은 적절한 때가 되면 거처를 떠나 다른 곳으로 향한다. 고양이에서 나무로, 나무에서 새로, 새에서 고래로, 고래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민들레로, 그리고는 민들레 홀씨가 되어 도심을 사뿐사뿐 날아다닌다.
<어느 날, 우리는>의 매력과 독특함은 죽음을 '부재'로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품 속에서 생은 돌고 돌뿐, 세계의 어느 구석도 누락되거나 상실되지 않는다. 죽음은 이동이고 움직임이다. 순환이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모습이 되어 만나도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이러한 세계관을 담아내는 조형적 도구로 작가는 연필(샤프)의 흑심으로 그린 선을 택했다. 나는 이 선택에 환호했다. 선이 무엇이기에? 선은 '점이 움직인 자취'다. 길이와 움직임이 있지만 폭이나 넓이는 없다. 형태의 본질을 표현하는 데 선만큼 경제적인 도구는 없다. 외곽선으로 면, 공간, 형태는 물론 복잡한 유기 생명체까지 재현할 수 있다. 홍나리 작가는 <어느 날, 우리는>의 고양이를 20~30획의 선으로 그렸다.
단순한 본질, 점이 움직인 자취... 선이라는 조형 언어의 특징은 '죽음은 이동이자 순환'이라는 <어느 날, 우리는>의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 특히 다섯 개의 곡선으로 꼬마 정령을 그린 페이지를 보면 연필이라는 재료가 가진 힘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어느 날, 우리는>이 흑심으로 그린 선을 매우 잘 활용한 작품이라는 또 다른 증거는 슬픔을 경이로움으로 치환해내는 클라이맥스 부분에 잠시 등장하는 색연필이다. 앞서 색을 극도로 절제했기에 증폭되는 효과. 작은 폭죽이 터지듯 소박하게 지면을 점령한 색깔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라는 커다란 마음을 얹어보게 만드는 즐거운 페이지다.
<어느 날, 우리는>처럼 <어느 날,>도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동네 모습으로 책을 포문을 열지만, <어느 날,>의 속지에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대요"라는 문장이 숨은 부제처럼 적혀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설정에 대한 안내를 듣는 셈이다. 죽음이라는 책의 본론을 최대한 뒤로 지연시켜 놓은 <어느 날, 우리는>과는 다른 선택이다.
<어느 날,>은 할아버지의 죽음을 자신의 일상 안에서 받아들이는 한 아이가 화자로 등장한다. 아이의 독백이 글이 되고, 독자는 자연스레 아이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자리에 서게 된다. 글 없는 그림책으로 특별한 화자 없이 진행한 <어느 날, 우리는>에서 독자는 관찰차, 목격자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어느 날,>에서는 아이의 심경을 자꾸만 상상하게 되는 공감자가 된다.
<얀얀><여우모자>에서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던 김승연 작가 특유의 개성은 <어느 날,>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색연필로 만들어 낸 포근한 색감, 그리고 질감. 김승연 작가 그림에 포근한 정서를 덧입히는 것은 일차적으로 색감이지만, 사이사이 자리 잡은 직물의 질감 묘사도 큰 역할을 한다. 트위드 재킷의 도톰함, 헤링본 니트의 헐렁함, 잘 다린 셔츠의 바삭함 같은 것이 살아있는 그림. <어느 날,>의 할아버지 직업이 양복점 재봉사인 점, 표지의 까만 배경이 털실과 단추가 날아다니는 우주로 묘사된 점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대요. 현관 앞 신발장엔 아직 할아버지 구두가 세 켤레나 놓여 있는데."로 시작하는 <어느 날,>의 글은 하나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바로 '부재의 확인'이다. 익숙한 일상 공간인 집 현관, 식탁, 동네 약수터, 거실에서 아이는 할아버지의 부재를 확인하고 빈 공간을 응시한다. 아이의 일상은 아이보리 색조로 그려지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대요"라는 독백이 반복될 때마다 까만 우주 공간에서 귀엽고 즐겁게 양복점 일을 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등장한다. 상상 같기도 하고 꿈결 같기도 한 장면. 펼침면 단위로 책을 보면 '아이보리 색면의 세계 - 검정 색면의 세계'로 분리되는 것이 확연히 드러난다.
<어느 날, 우리는>에서 죽음이 이동이고 움직임이었다면 <어느 날,>에서 죽음은 분리이다. 흥미롭게도 김승연 작가가 선택한 조형 언어는 '면', 그중에서도 '색면'이다. <어느 날,>의 그림을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신기할 정도로 그림 속 사물과 인물 각자가 서로의 영역을 지키고 있다. 색종이를 오려서 붙인 콜라주처럼, 혹은 가위로 오려놓은 종이 인형처럼 배경, 건물, 벽, 바닥, 가구, 소품, 사물이 납작한 평면으로 존재한다. 폭과 넓이를 가진 존재들이 함께 모여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세계.
두 책의 작가가 선택한 조형 언어-선 vs. 색면-에 대해 사유하면 사유할수록 두 작품이 죽음을 바라보는 세계관과 형식을 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죽는다는 건 이동하는 걸까, 분리되는 걸까? 저마다 답이 다를 것이다. 모든 예술가에게는 자신의 작품을 지금과 같은 꼴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그림책의 그림 역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