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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C 최혜진 Jan 07. 2018

[그림책의 일] 클로드 퐁티의 전진하는 낯선 세계

클로드 퐁티는 1986년 『아델의 그림책, L’album d’Adèle』으로 데뷔해 30년 간 80여 권의 작품을 발표한 프랑스 그림책 작가다. 책 대부분은 절판되지 않고 현재진행형으로 여전히 어린이 독자에게 사랑받고 있다. 퐁티는 프랑스 초등학교 교사들이 수업 교재로 가장 많이 활용하는 작가 중 한 명이며, 평론가들이 연구 대상으로 사랑해마지 않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클로드 퐁티는 모국 프랑스에서의 명성에 비해 한국에서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에 출간된 퐁티의 책은 『끝없는 나무』(2001, 비룡소), 『나의 계곡』(2004, 비룡소), 『조르주의 마법 공원』(2007, 비룡소) 세 권 뿐이다.


물론 한 예술가에 대한 평가는 문화권에 따라 크게 갈릴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시장이 전반적으로 프랑스 그림책에 우호적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여전히 클로드 퐁티가 두 나라에서 만들어내는 온도차에는 의아한 점이 있다. 매해 한국에 번역 출간되는 프랑스어 서적은 800여 권 이상이고, 한국은 프랑스의 세 번째로 큰 저작권 수입국이다. 2011년의 경우 한국에 판권 수출을 한 프랑스 서적 848권 중 411권이 어린이 책이었다. 이토록 프랑스 아동도서에 열린 시장인데도 가장 프랑스적인 그림책을 만드는 작가로 평가받는 클로드 퐁티는 유독 장막 뒤에 숨어 있다. 그 이유는 뭘까.


이 글에서는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몇 가지 공통점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특히 독자가 이야기의 정체와효용에 대해 쉽게 단정할 수 없도록 하는, 더 나아가 극중 인물을 향한 가치 판단, 평가, 단언을 유보시키는 퐁티의 서사 전략에 대해 고찰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모호함보다는 분명함 안에서, 낯섦보다 익숙함 안에서, 불확실함보다 예측가능함 안에서 안심하는 독자들이 만들어낸 한국 아동도서 시장의 선호를 역으로 읽어낼 수도 있겠다.



1. 탈언어적 세계  


프랑스 서점 어디에서도 클로드 퐁티 책은 눈에 띈다. 목 좋은 서가에 놓여져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휙 둘러보아도 한 눈에 ‘아, 저건 퐁티 책이군’ 하며 알아챌 수 있다. 작가의 딸 아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데뷔작 3편 『아델의 그림책』(1986), 『끼어든 아델, Adèle s’en mêle』(1987), 『아델과 삽, Adèle et la pelle』(1988)을 발표한 이후 30년 간 고집스럽게 유지하는 표지 디자인과 그림 스타일 덕분이다.

1990년에 발표한 『페트루이으와 그녀의 아기들 120, Pétrouille et ses 120 petits』부터 그는 거의 동일한 표지 디자인을 선보인다. 표지 윗 부분에는 제목이 있고 아래엔 네모난 그림이 있다. 책이 달라져도 작가명, 제목의 위치와 서체는 같다. 또한 표지 왼쪽의 접지 부분부터 책등까지 별도의 색지로 감싼 것처럼 색을 입힌다.

무엇보다 중요한 구별점은 사각 테두리 안에 갇혀 있는 표지 그림 속 주인공과 등장 인물들의 낯선 외양이다. 아델 3부작 이후 클로드 퐁티 책에는 사람의 외양을 한 주인공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이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싶은 기이한 외양을 한 생명체가 있다.


  


분명 눈, 코, 입, 팔, 다리를 가지고 있지만 현실의 인식 체계 안에서 어떤 범주로 분류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낯선 갈색 계열의 동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표지 그림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이건 코끼리야’, ‘이건 쥐야’, ’이건 사람이야’ 라는 식으로 그를 언어화하거나 명료화하여 지각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주인공의 외양을 보고 어떤 인상을 품어야 할지도 단박에 정리되지 않는다. 예쁘다고 해야 할지, 못생겼다고 해야 할지, 사랑스럽다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보통 동물을 주인공으로 한 그림책은 동물의 외양을 사실적으로 전달하기보다 해당 동물이 가장 사랑스럽게 보일 수 있도록 외양을 도식화한다. 도식화된 동물 그림은 단숨에 보는 이의 호감을 끌고, 독자로 하여금 그의 편에 서게 만든다. 이러한 전략을 사용하지 않는 클로드 퐁티의 생명체들은 독자에게 무조건적인 호감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런 정서적 거리감 혹은 객관성을 형성하는데는 표지 그림을 둘러싸고 있는 테두리도 큰 역할을 한다. 클로드 퐁티 작품에서 표지 그림은 주인공과 함께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간의 주요 배경, 조연 역할을 하는 인물도 함께 보여주는 책의 요약본 역할을 한다. 테두리 안에 존재하는 표지 그림은 흡사 창문 너머의 풍경처럼 보인다. 구경하는 사람으로서의 거리감이 확보된다. 독자에게 호감을 요구하지 않는 낯설고 기이한 생명체가 우글거리는 세계를 프레임 이쪽, 안전한 영역에서 구경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 세계의 범주로 분류하고 지각하기 어려운 외양을 가진 퐁티의 주인공들은 이름에서도 탈언어적 면모를 보인다. 클로드 퐁티 작품 속 인물의 이름은 언어유희의 결과물인 경우가 대다수다. 일례로 태어날 때 부모님으로부터 “못생겼네 Oh, qu’il est laid”라는 소리를 들은 주인공 이름을 발음 나는 대로 적어서 ‘오킬렐레’라고 짓거나, 이쪽저쪽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두 주인공에게 불어로 ‘이쪽으로’를 뜻하는 ‘par ici’와 ‘저쪽으로’를 뜻하는 ‘par là’를 축약해 ‘파르시와 파르라’라고 이름 붙이는 식이다. 사랑한다는 핑계로 폭력을 행사하는 괴물이 나오는 책은 ‘내 사랑’을 뜻하는 ‘Mon Amour’를 살짝 비틀어서 『모 나무르 Mô-Namour』(2011) 라고 제목을 붙인다. 현실 언어 체계에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누구나 쉽게 그 뜻을 추측할 수 있는 단어들을 클로드 퐁티는 숨 쉬듯 지어낸다. 그의 작품 속에서 언어유희는 셀 수 없을만큼 자주 등장한다. 안타깝게도 프랑스어를 제외한 다른 언어로의 번역이 불가능하며, 억지로 번역한다 해도 반짝이던 고유한 재치와 맛이 살지 않는다.  


이렇게 외양도 이름도 기존 범주에 쉬이 속하지 않는 퐁티의 주인공은 유일한 단독자로 존재할 뿐 어떤 이상화된 가치를 대표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클로드 퐁티는 ‘아름답다’, ‘매력적이다’, ‘배려심 많다’, ‘선하다’ 등과 같은 가치 평가의 단어를 주인공을 설명하는 문장 속에서 사용하지 않는다. 표지를 열고 이야기의 첫 장을 펼치면 그저 중립적인 아델이, 페트루이으가, 오킬렐레가, 파르시와 파르라가 거기 있을 뿐이다.


클로드 퐁티 이야기는 대부분 주인공의 집, 특히 아이의 방에서 서사가 시작되는데 이 방 역시 우리가 여타 그림책에서 흔히 보아온 그것처럼 질서정연하거나 포근하고 부드러운 정서를 머금고 있지 않다. 오히려 난장판에 가깝다. 침대 시트는 정리되어 있지 않고, 서랍은 튀어나온 옷가지들로 정신이 없으며, 온 바닥에 책과 장난감, 생활 용품이 늘어져 있다. 어린이 책의 그림을 통해서 어른들이 은연 중에 아이들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이상화된 가치-깨끗함, 명랑함, 질서정연함, 밝음-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림 속 대상은 모두 경계가 검은 선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만화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지금까지의 속성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퐁티는 현실을 재현하거나 현실 세계의 논리나 가치를 전달하는데 전혀 관심이 없다. 그는 ‘사실주의적’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 작가다. 2015년 취재 차 그의 아틀리에를 방문해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우리가 쉽게 현실이라고 이름 붙이며 묘사하는 내용이 얼마나 현실에 가깝냐고 질문하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 아는 것을 봅니다. 저에게 상상은 허황된 게 아니라, 현실을 해석하는 또 하나의 설명입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지각하려면 이미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의미 체계를 기준 삼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사실은 우리가 아는 것의 결과다. 아는 것이 변하면 다른 것을 본다. 클로드 퐁티는 이 지각의 한계와 빈틈 위에서 논다. 현 사회와 출판계에서 두루 사용하는 도식(schema)을 거부하기 때문에 그가 창조해낸 인물들은 묘하고 낯설다.




2. 오른쪽을 향해   


퐁티의 서사는 주인공이 익숙했던 세계-집, 자기 방, 동네-에서 급작스럽게 낯선 세계로 이동하면서 시작된다. 나무에서 떨어져 무서운 잎사귀 괴물이 사는 동굴에 빠지거나, 산책을 나갔다가 괴물에게 잡아먹히거나, 부모님과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다 교통사고가 나서 혼자 외딴 곳으로 날아가거나, 급작스런 심경 변화로 “모험을 떠나야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부모님이 계신 집을 나서기도 한다. 보통 이야기가 시작되고 한두 페이지 이내에 주인공이 낯선 환경에 처해질 정도로 모험은 빨리 찾아온다.


많은 경우 주인공의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 요인으로 인해 모험을 떠나게 되는데도 클로드 퐁티는 주인공의 놀란 심경을 전하는데 지면을 할애하지 않는다. 타의에 의해 부모님과 헤어져도, 괴물에게 잡아 먹혀도 주인공은 당황하거나 울거나 자리에 주저앉지 않는다. 미지의 세계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주인공의 이동과 함께 퐁티 서사는 본격화되고, 현실 세계의 논리가 전혀 통하지 않는 환상 세계가 펼쳐진다. 거북이가 하늘을 날고, 중력이 사라지며, 하늘에 씨를 뿌리면 나무가 위에서 아래로 자란다. 주인공이 땅에 발을 심으면 그의 머리와 손끝에서 잎사귀가 자라고, 땅에 씨앗을 심으니 우뚝 솟은 산이 자라난다. 여정 중 불가능한 일은 없다.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예측 불가능한 장애물을 만나서 늘 어딘가로 굴러 떨어지고, 쫓기고, 새로운 인물과 조우하게 된다. 주인공은 그때 그때 자신이 닥친 상황에서 나름의 해결책을 찾아내 다음 상황으로 이동하고 또 장애물을 만났다가 겨우 해결책을 찾아 이동한다. 변화된 상황으로의 이동은 대부분 독자가 페이지를 넘기는 리듬에 맞춰져 있다. 그렇게 책장을 계속 넘겨가며 긴 여정이 이어지고 결국은 집으로 상징되는 원래 속했던 익숙한 공간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이 퐁티가 대부분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그려내는 서사다.


  

이런 이유에서 주인공은 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한다. 책 전반에 걸쳐 오른쪽을 향해 계속 전진하며, 책장을 넘길 때마다 주인공이 처한 상황적 배경과 장소가 달라지기 때문에 전진의 속도감이 크게 느껴진다. 퐁티는 주인공의 이동을 분할된 면을 활용해 극대화한다. 퐁티 작품의 레이아웃은 거의 동일하다. 그는 그림 위에 글을 올리지 않는다. 그림은 사각 프레임 안에 배치되고, 글은 프레임 하단의 하얀 여백 위에 놓여진다.

퐁티가 한 면에 세 장의 그림을 동시에 담을 때가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 분할된 면들의 배경 공간은 동일하다. 한 컷으로 이어 그려도 무방한 하나의 배경이지만 주인공은 나뉘어진 컷들에 각각 등장한다. 덕분에 주인공의 이동이 도드라진다.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에 있는 하얀 여백은 그려지지 않았기에 우리가 볼 수 없었던 시간, 주인공이 전 프레임에서 이번 프레임으로 오기까지의 움직임을 상상하게 만든다. 서사적 이동을 상상하게 만드는 빈 공간인 것이다.


작고 어린 주인공의 모험 서사를 그린 그림책은 대개 클라이맥스에 다다르면 난관에 부딪힌 주인공의 정서를 묘사하는데 집중한다. 색, 질감, 얼굴 표정에 집중하는 구도 등을 통해 독자가 주인공의 위치에 자신을 이입하고 주인공의 심경에 공감하게끔 이끄는 드라마틱한 그림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퐁티는 출발과 도착을 제외한 중간 여정, 그러니까 책 분량의 90%에 해당하는 서사 내내 고집스러울 정도로 주인공의 움직임에만 집중한다. 정서 묘사에 그림을 할애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등장 인물이 어떤 상황에서 눈물을 흘려도 그가 느끼고 있을 갑갑한 심정을 색이나 질감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는 게 아니라 ‘그가 운다’는 행위만 인식할 수 있게 한다. 감정의 고조가 없기 때문에 그의 책에선 특별히 클라이맥스라고 부를만한 지점을 알아차리기도 힘들다.

앞서 클로드 퐁티의 주인공은 독자에게 무조건적인 호감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작가가 고집스럽게 정서 묘사가 아닌 행위와 움직임을 보여주니 주인공들은 다양한 상황 안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독자 역시 과잉으로 감정이입을 할 수 없다. 주인공의 심경과 상황을 쉽게 평가하거나 재단하지 못한다. 퐁티는 왜 이토록 독자의 판단을 유보시키는 것일까?



3. 시간적 이동이 만들어낸 성장 서사   


인터뷰 중 그가 했던 트라우마에 대한 언급이 이해를 도울 것 같다. “예전에 부모님과의 불화로 오랫동안 거식증을 앓다가 거의 회복되어 이제는 다른 환자를 돕는 젊은 여성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상황이 너무 고통스러웠던 그녀에게 거식증은 죽지 않고 버티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거식증은 회복으로 가는 과정이자 해결책이지요. 시간이 지나 더 이상 거식증에 기댈 필요가 없을 때 빠져나와서 다음 단계로 나아간 것입니다. 좌절이나 상처가 트라우마가 되지 않게 하려면 ‘나는 과정 중에 있는 거다’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클로드 퐁티 작품의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독자가 단편적인 상황만을 보고 주인공에게 크게 감정이입을 해서 그의 처지를 쉽게 재단하고 판단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퐁티의 주인공들은 독자에게 함부로 호감도 동정도 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은 어려움에 처해진 듯 보여도 책장을 넘기면 이야기는 다른 국면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 시간이라는 장을 넘겨가며 좋은 일과 나쁜 일을 마주하게 되는 삶이 그렇듯. 지나고 나면 좋고 나쁨에 대한 평가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퐁티의 주인공들에게서 느껴지는 단독자로서의 존재감에는 아마도 이런 작가의 삶의 태도와 세계관이 녹아있을 것이다. ‘내가 삶이라는 여정의 어디쯤에 와 있는지, 내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전진하는 퐁티의 주인공들과 그들의 씩씩한 성장기는 우리를 알 수 없는 여정 가운데로 이동시킨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이 이어지는 삶 속에서 앞서 겪은 사건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또 때로는 섬세하게 이미 부여된 의미를 조정해가는 존재.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만의 이야기, 단 하나의 플롯을 만들고 있는 존재인 시간에 대해 사유하게 돕는다. 그 사유의 끝에서는 언제나 이런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 괜찮아. 그러니 이제 다시 오른쪽을 향해, 전진.




* <창비어린이> 2017년 가을호 평론란에 실린 '클로드 퐁티의 전진하는 낯선 세계' 초고입니다. 편집된 게재본과는 조금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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