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편지 Letter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스텔 Jul 10. 2023

내게 쓰는 편지

혹은 30년 후의 내가 읽을 편지

*이는 과제 중 하나였으나 그냥 과제로만 묵히기는 어쩐지 아쉬움이 드는 글이어서 브런치로 발행합니다.


너랑 같이 지낸 게 벌써 37년이야.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어. 

생각해 보면 17살 즈음의 너는 30대 이후의 네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없었지. 

아득한 미래라고만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그랬을까. 요즘 너는 17, 18이었을 때의 너를 무수히도 원망하고 또 미워하고 있잖아.

왜 그렇게 대책 없이 살았는지, 뭘 믿고 그토록 해맑기만 했는지, 대체 너의 무엇을 믿고 그렇게나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는지, 엄마 말은 또 왜 그렇게 쓸데없이 잘 들어서 진학을 마다하고 취업했는지를 말이야.

그런데... 사실 생각해 보면 전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던 거야. 너는 그냥 그때마다 그 순간에 네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했고 최악 대신 차악을 선택하기 위해 애썼고 그 선택들이 지금의 너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 원망도 미움도 그만 멈추고 그냥 다독여주는 게 차라리 지금 네게 더 좋은 일이 아닐까 싶어.

어쨌든 너는 네 힘으로 사회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네 몫을 해내고 있고 경제활동을 하고 있고

가정을 책임지면서 네가 하고 싶은 것들, 욕망하는 것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애를 쓰고 있잖아. 상담 선생님이 그랬지. 너의 최대 강점은 바로 붙잡고 버티고 있는 힘이라고.

스스로가 만족스럽지 못하고 미워 죽겠고 혐오스럽고 사는 게 지겨워 죽겠어서 틈만 생기면 고통 없이 세상을 뜰 수 있는 법 따위를 고민하면서도 지금 네 삶을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내고자 애쓰는 그 힘이 네가 가진 가장 큰 힘이라고. 들으면서는 말도 안 된다고 냉소하면서도 집에 돌아가는 길에 그 말들을 곱씹으면서 정말 많이 위로받았다고 생각했잖아.

회사는 당장에 사표 쓰고 뛰쳐나오고 싶고 네가 원하는 일,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고 그게 안 될 것 같으니까 다 놔버리고 그냥 사라져 버리고 싶다며 극단적인 생각을 하면서도 너는 오늘을 버티고 내일을 살아갈 생각을 하면서 현실의 너를 가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니.

운동도, 다이어트도, 상담도, 뒤늦게 시작한 학교 공부까지도.

이것들은 전부 네가 만들어내고 있는 작은 성취감이라는 걸 너도 조금씩 깨닫고 있잖아. 세상에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사는 사람은 없다는 걸 너도 알 거야. 어떻게 사람이 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하기 싫은 건 하나도 안 하고 그럴 수 있겠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전 세계에서 몇이나 되겠어.

그러니까 지금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안에서 정말 노력하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 너는 이제 너를 미워하고 혐오하는 일을 그만뒀으면 좋겠어.


당장에 사랑하라고 하는 건 아니야. 그게 그렇게 쉽게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니까.

그저... 미워하기를 멈추고 가만히 끌어안아 주는 연습부터 해보면 어떨까 해.

이건 돈 드는 일도 아니고 딱히 힘이 필요한 일도 아니고 아주 약간의 용기만 있으면 되는 일이니까.

어디 고층 건물 혹은 한강 물에 뛰어드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잖아. 네가 원하는 게 정말로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잘 살고 싶은 거잖아. 충분히 그럴 수 있어. 근데 그러려면 지금의 너를 미워하는 일을 멈춰야 해. 네가 제일 잘 알 거야. 혐오와 냉소로는 그 무엇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백발의 할머니가 될 때까지 악착같이 살아보자. 

무뚝뚝하지만 농담 잘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했잖아. 그렇게 될 수 있을 거야. 

구원은 스스로 해야 해. 

꼭 살아서 30년 뒤에 다시 만나자. 

근사한 할머니가 되어 있는 너를 만나면 그때 다시 말해줄게.

잘 살아왔다고. 장하다고.

매거진의 이전글 2023년 ver. 유언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