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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텔 Mar 26. 2023

2023년 ver. 유언장

미리 써보는 유서


언젠가부터 1년에 한 번 혹은 분기마다 한 번씩 유언장을 작성해 본다. 지금은 많이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유언장은 자필로 써야 그 효력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주로 일기장에 손글씨로 썼고, 어떤 때는 낱장에 써서 일기장에 끼워두기도 했다. 그런데 유언장에 대한 법적 효력이 중요한 이유가 살아생전 내가 지니고 있던 재산을 가족에게 혹은 혈연관계가 아닌 누군가에게 물려주고자 할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 가장 크지 않을까. 그런데 나는 뭐 남길 유산이랄 것도 없고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물건도 없고 뭘 많이 소유하고 있지는 않아서 아무렴 어때 싶어 져서, 그래서 올해 상반기에는 손 좀 덜 아프려고 키보드로 써보기로 했다. 재산증여가 아니더라도 자필로 쓰라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지만, 한 번인데 뭐 어때.


*


갑자기 무슨 유언장이냐 싶으신가요. 나한테는 갑자기가 아니지만, 그래도 이 글을 읽을 이들은 당황할 수 있으려나. 나는, 그래요. 사람일이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물론 이런 생각을 아예 안 하고 사는 게 가장 좋은 일이긴 할 거예요. 하지만 이미 생각나기 시작했다면, 근데 이 생각들을 없앨 수 없다면 어떤 식으로든 내가 마음이 편한 쪽으로 준비를 하고 있는 게 낫지 않겠는가 싶어요.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나의 우울증과도 연관이 아주 없진 않겠죠. 그러나 우울증은 증폭제의 역할만을 했을 뿐 아주 오래전부터 난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종종 하곤 했어요. 그 증거는 초등학교 때 제일 친했던 친구와 쓰던 교환일기장에서 찾아볼 수 있어요. 친구에게 남기는 고민상담란에 죽음을 생각하면 너무 무섭다고 써놨더라고요. 그 어린애가 대체 뭘 알고 죽는 게 무섭다는 말을 써놨을까요. 어디서 뭘 보고 무서워졌을까요. 그때는 죽는 게 무서웠는데 요즘은 죽고 싶어지는 순간이 가끔 있다는 게 놀라운 변화네요.


나는 할머니가 될 때까지 살고 싶기도 하고,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는 지금 그냥 여기서 생을 마감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매일같이 혼란스러워요. 이대로 자연스럽게 시간이 흘러 먼 훗날 할머니가 될 수도 있지만 오늘 당장 사고로 어떻게 될 수도 있는 게 사람인데. 사람의 일이란 정말이지 한 치 앞을 알 수 없어서 아무 탈 없는 지금 내가 내 의지로 사라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지는 거예요. 이런 생각들이 말도 안 되는 것처럼 읽히실까요? 그렇대도 어쩔 수 없겠죠.


그 언제가 됐든 내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게 되지 않는다면, 근데 그게 갑작스러운 일이라 미처 주변 정리를 하지 못했다면 나는 이걸 읽을 지인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몇 가지가 있어요.


1. 내가 쓰는 모든 전자기기에서 내 소셜미디어를 모두 삭제해 주길 바라요. 온라인에 남아있는 내가 쓴 글과 함께 계정을 없애주길 부탁하고 싶어요. 인스타그램도, 트위터도, 브런치도, 네이버 블로그도, 포스타입까지. 모두요. 그리고 손으로 쓴 일기장 역시 다 버리거나 태워줬으면 좋겠어요. 내 흔적을 최대한 세상에 덜 남기고 싶거든요. 편지로 써서 타인에게 건네준 것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겠지만요. 그리고 나면 스마트폰과 태블릿 PC, 노트북 등등 모든 기기들을 포맷해 주세요. 공기계로 만들어 팔아도 돼요.


2. 내가 만든 곰인형들이 몇 개 있어요. 나이가 어린 조카들에게 줄 수 있도록 우리 엄마에게 말해주면 좋겠어요. 그러고도 남는다면 당신들이 하나씩 가져도 괜찮아요. 죽은 이의 것이라서 가지고 있기 불편하다면 버려도 돼요. 근데 그냥 버리면 너무 슬프니까 태워주세요. 불을 피워도 괜찮은 곳에서요. 만들 때 정말 열심히 만들었거든요. 혹은 팔아도 돼요. 근데 그 수익금, 우리 엄마에게 주겠다고 약속해 줘요. 그럼 팔아도 돼요. 얼마에 팔아야 할지 모르겠으면 내 핸드폰에서 관련 인물 연락처를 찾아서 물어봐주세요. 알려주실 거예요.


3. 내가 가지고 있던 책들... 그리 많지는 않지만 개중에 읽고 싶은 책이 있다면 가져도 돼요. 중고서점에 팔아도 돼요. 혹은 어디다 기증해도 괜찮아요. 그냥 버리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돼요. 책은 밖에 두면 필요한 이가 가져가기도 하니까. 파지를 모아 되파시는 분들께 드려도 괜찮겠네요.


4. 모아놓은 돈이랄 게 없어서 너무 민망하지만 내 명의로 된 티끌 같은 저금, 우리 엄마한테 전달될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어요. 엄마는 전자기기를 다루는데 어려워하고 잘 못하시는 데다가 은행/주민센터 방문을 약간 난감해하세요. 엄마의 형제분들이 도와주실 수도 있지만 솔직한 말로 난 그분들에게 그리 좋은 감정은 없어서 믿지는 못하겠어요. 그래도 엄마랑은 1촌이니까 또 다를 수 있겠지만요.


5. 혹여 내 죽음으로 다른 이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정신건강의학 담당 선생님이라던가, 상담선생님 같은 분들이요. 그분들은 어떻게든 제가 이 땅에 발 붙이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셨고 응원해 주셨거든요. 모든 문제는 결국 나에게 있는 거예요. 나 하나로 끝났으면 좋겠어요.


6. 내 장례식이 열린다면, 그래서 나의 마지막을 보러 올 거라면 부디 국화꽃은 들고 오지 말아 줘요. 난 국화꽃을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국화꽃이 아닌 꽃이라면 뭐든 괜찮아요. 다만 난 라일락과 수국을 가장 좋아해요. 그냥 알고 있어 달라고요. 살아있는 사람 소원은 못 들어줘도 죽은 사람 소원은 들어줄 수 있잖아요. 무리한 부탁도 아니고요.


당장 생각나는 건 이 정도예요.

부탁하고 싶은 건 나의 부재가 당신들에게 슬픔으로 남지 않길 바라고,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거예요. 내가 뭐 그렇게 대단씩이나 하겠어요. 그래도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 봐. 미리 말해두는 거예요.

그리고, 완전히는 말고 적당히 잊고 잘 살아주세요. 그러다 한 번씩 어제 먹은 저녁밥 떠올리듯 그렇게 가볍게 떠올리고 다시 잊어줘요. 그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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