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닿지 못할 마음에 대해
내가 이 편지를 쓰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너는 아마 모를 거야. 그리고 편지의 형태가 아닌 다른 좋은 방법은 없을지 한참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는 사실도 말이야. 자리를 따로 마련한다면 어떨까, 너무 정석적인 고백 말고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내 마음을 알게 된 네가 날 부담스러워하거나 피하면 그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것들을 수도 없이 생각하고 또 상상했어.
이 모든 걸 네가 굳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차피 부치지 못할 편지라면 이 정도 투정은 괜찮지 않을까 싶어. 난 끝내 이 편지를 네게 주지 않을 거고 너는 너를 향한 내 마음이 어떤 모양을 그리고 있는지 꿈에도 모를 텐데 뭐 어때 싶어.
이렇게 길게 한 사람을 바라보면서 좋아해 본 적은 연예인을 제외하면 네가 처음이야. 아주 짧게 감기처럼 스치듯 지나간, 흡사 깃털 같이 가벼웠던 짝사랑은 몇 번 있었어. 그리고 그 사랑들은 고백해 볼까 하는 고민까지 가기도 전에 사라지곤 했어. 그래서 나는 지금 내 모습이 굉장히 당황스럽고 낯설어. 보편적인 인류애와 특정한 사람을 향한 애정은 어떻게 구분되어지는가 고민한 적이 있어. 근데 지금은 무엇이 다른지 조금 알 것도 같아. 명징하게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말야.
짝사랑을 시작하면서 나는 나를 많이 돌아봤어. 지금 내 마음이 사랑이 맞는지, 계속 눈길이 가는 걸 보면 좋아하는 마음은 가득 채워져 찰랑이는 것 같지만 과거 몇 번의 짝사랑이 그러했듯이 금방 말라버리는 건 아닌지 이런 생각을 끊임없이 하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억울해지는 순간이 찾아와. 너는 내가 너를 마주할 때마다 머릿속에서 무슨 혼란을 겪고 있는지 꿈에도 모를 텐데 나 혼자 온갖 것을 상상하고 고민하면서 웃었다가 울었다가 난리 부르스가 따로 없지.
나는 MBTI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또 신뢰하지도 않아. 모든 사람이 인터넷에서 손쉽게 해 볼 수 있는 그 테스트는 사실 공식 MBTI가 아닐뿐더러, 정식 검사는 유료 서비스인 걸. 전문가가 해석지를 뽑아주기까지 하루, 이틀은 기다려야 하는 심리검사라서 우리가 아는 건 사실 유사과학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어. 그래서 나는 MBTI에 대해 질문하는 건 지양하려 하고 질문받으면 그냥 얼버무리는 편이야. 공식 검사지 역시 다 믿을 순 없겠지. 애초에 인류를 16가지 성향으로 구분 지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상황에 따라 조금씩 변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이런 나도 어쩔 수 없이 아이스브레이킹을 위해 굴복하고 말았어.
근데 뭐, 유사과학이든 공식 유료 검사지든 굳이 해보지 않아도 내 성향이 I로 시작해서 높은 확률로 NP로 끝날 것 같다는 건 알겠더라고.
갑자기 무슨 말이냐면 N의 가장 큰 특성이 뭔지 알아? 정신없는 상상력이래. 내가 너를 혼자 좋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내 전두엽은 유래 없는 활약을 펼치고 있는 중이거든. 온갖 것을 다 상상하고 있다는 걸 넌 그야말로 상상도 못 할 거야.
행복한 망상으로 시작해서 최악의 상황까지. 고백부터 결혼, 이혼까지. 달달한 로맨스부터 파국 결별 엔딩까지. 정말로 온갖 것을. 나는 머릿속에서 너랑 뜨겁게 연애하고 찐득하게 스킨십도 하고 개처럼 싸웠으며 세상에 배신당한 사람처럼 울었어. 어느 장면에선 너와 동거를 했고, 뭇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며 깨를 볶았어. 그러다 서로 안 맞아서 철천지 원수가 됐지. 다른 장면에선 너랑 결혼했고 바스락 거리는 이불의 감촉에 행복해하며 한 침대에 누웠어.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다른 이들을 긍휼히 여기고는 둘만 사는 세상인 것처럼 살다가 이혼 법정에서 변호사들 보기 낯부끄러울 만큼 밑바닥을 보이며 언쟁했어.
어때? 내 기가 막힌 스토리가? 여느 아침드라마 못지않지? 실컷 폭소해도 괜찮아.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상력을 뽐내는 내가 나도 제법 웃기거든.
그러면서도 네게 고백하지 않는 이유, 혹은 고백을 못하겠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내가 지독하게 소심하고 겁쟁이라서. 지금의 관계마저 깨질까 봐 무서워서. 그래서야. 그깟 게 뭐 무섭고 두려울 일이냐 싶겠지. 난 그래. 세상에서 한 다섯 번째 정도로 무서운 일이야.
그래서 상상력이 날이 갈수록 풍부하고 다양해지는 것 같아.
아직까지는 괜찮아. 상상만으로 재밌고 즐거워.
그럴리는 없을 것 같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거니까. 혹여라도 이 편지가 네 시선 끝에 닿는다면, 그런데 의심 가는 사람이 떠오른다면. 맞아. 나야. 아는 척해주면 무척 고마울 거야. 강제 고백하는 셈이니까. 하지만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라는 데에 내 지갑 속 만원을 걸 수 있어. 너랑 나는 이런 말투로 대화하는 사이는 아니거든.
안녕, 곧 또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