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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호 Sep 01. 2019

콩국수 이야기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박찬일 셰프의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를 아침 출근길에 나눠서 읽었다. 복잡한 지하철에서 회사 이메일 대신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순간적으로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오늘 해야 할 미팅, 처리해야 할 일, 당장 답해야 하는 것들... 다 떠나서 여기 나오는 음식을 먹으러 가고 싶었다. 한 번은 볶음밥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점심에 중국집에 가서 볶음밥을 먹기도 했다. 대단한 이야기가 남겨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의 추억과 함께 풀어져 있는 음식 이야기는 꽤 매력적이었다.


박찬일 셰프가 책에 남긴 이야기처럼 나도 추억거리를 하나 남겨본다.

어렸을 적 외가에 가서 많이 놀았다. 초등학교 때는 항상 토요일이면 오전 수업이 끝난 후 외가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가끔은 저녁도 먹었던 것 같다. 외가 포함 우리 집은 이삿날에도 중국집을 시켜먹는 일도 거의 없으며, 나가서 밥을 사 먹는 일은 정말 드물었다. 이사를 다 하고 가스 연결한 다음에 밥을 해 먹거나, 어머니가 미리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밥을 해두셨다. 이렇게 항상 집에서 밥을 해 먹었고 다른 생활은 내 머릿속엔 없었다. 그래서 어렸을 적 식당을 보면 누가 저기 가서 사 먹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외할머니는 요리 솜씨가 좋으셨고, 비 오는 날에는 김치전에 수제비를, 여름에 더우면 열무 국수나 비빔밥을, 김장날엔 당연히 보쌈과 겉절이를, 겨울엔 집에서 직접 빚은 만두를 냉동실에 넣어 두고 떡만둣국을 해주셨다. 할머니 집 앞 땅에다 묻던 김장독과 집구석에 있던 메주는 아직도 가끔 생각이 난다.

어머니도 요리 솜씨가 좋으신 편이었지만 항상 외할머니 음식이 조금 더 맛있었다.


그중 여름에 먹을 수 있는 별미는 바로 콩국수였다.

내가 점심에 갔을 땐 이미 불린 콩이 준비되어 있었다. 콩 외에 다른 것은 넣지 않으셨다. 넓은 다라에 누런 콩이 들어가 있었고, 위에 뜨는 콩들을 건져 내셨던 기억이 있다. 불린 콩을 삶고 식힌 다음 믹서기에 갈았다. 외가에 있던 믹서기는 누런 색이었고 믹서기에 많이 넣을 수 없었다. 많이 넣으면 믹서기가 동작하지 않았다. 지금의 믹서기처럼 곱게 갈리지도 않아서 콩물은 그다지 부드럽진 않았다. 나중에 먹다 보면 입에 꺼끌꺼끌한 콩이 느껴졌다. 그래도 믹서기로 최대한 갈아서 콩물을 만들면 이 콩물은 믹서기 열 때문에 뜨거웠고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서 콩물에 얼음을 올리는 일은 내 역할이었다. 여러 명의 음식을 하려고 계속 갈다 보면 열이 나서 믹서기가 동작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한두 번에 나눠서 콩물을 만들었다.


요즘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레시피와 다르다. 고소함을 위해서 깨를 넣기도 하고, 두유를 넣기도 하는데 이런 건 없다. 단순하게 콩만 갈아 넣은 하얀색 콩물을 쫄깃한 면과 함께 먹었다. 오이를 넣어주셨는데 오이가 별로 조화롭다는 생각이 안 들어서 먼저 오이를 골라서 먹어버리고 콩국수를 즐겼다. 콩국수를 즐길 때 내가 가장 좋아하던 건 굵은소금이었다. 고소한 콩물에 굵은소금을 넣으면 빨리 녹지 않아서 짠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자꾸 소금을 넣다 보면 국물이 많이 짜게 되고 이러면 다시 콩물을 달라고 해서 콩물을 많이 먹었던 기억이 난다. 어른들은 내가 너무 짜게 소금을 자꾸 넣는다고 잔소리하셨지만, 적당히 짭짤한 콩물이 난 참 좋았다.


집에서 이렇게 콩을 갈아서 해먹은 건 20년 전 외가에서 먹은 게 마지막이다. 몇 년 전에 갑자기 생각나서 두부를 사다 갈아서 해먹은 적이 있었는데 전혀 비슷한 느낌이 아니었다. 최근엔 마트 두부 코너에서 콩국수 국물을 따로 팔길래 해먹은 적이 있다. 비싸긴 하지만 유통기한이 짧아서 할인도 자주 하는 편이라 할인하면 가끔은 콩국수 용도가 아니라 그냥 우유랑 같이 마시는 용도로 사 와서 먹곤 한다.


집에서 먹던 것과 다르지만, 가장 맛있게 먹은 콩국수는 진주회관 콩국수이다.

 을지로로 회사를 다닐 때 점심시간에 지하철을 타고 진주회관 콩국수를 먹으러 가곤 했다. 한 끼에 12,000원이나 하는 가격이고 멀어서 다른 사람에게 같이 가자고 이야기하기 어려워서 혼자 갈 때도 있었다. 진주회관 콩국수는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지만 크림 같은 국물이 인상적이다. 진주회관은 지나갈 때마다 틈이 나면 종종 들른다.


외가에서 먹던 특별한 음식을 떠올리면 콩국수 생각이 난다. 이제는 연세가 많이 드셔서 못해주시지만 콩국수를 먹으면 또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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