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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선 Jul 27. 2019

지니 미용실

샘의 글

나는 길치다. 지도에는 위에서 내려다 본 동서남북이 있고 내 앞에는 길이 하나뿐인데 보이지 않는 길 너머를 지도를 보며 찾아가는 과정을 나는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오랜 애인은 길을 찾아갈 땐 큰 이정표를 기억하라고 했다. 그러나 꽃집과 슈퍼와 은행과 교회가 즐비한 거리에서 나는 무엇을 이정표로 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나와 꽃집도 기억하고 슈퍼도 은행도 교회도 기억회로에 꾹꾹 눌러 넣고 돌아서는 길. 나는 아까 봤던 하모니 슈퍼가 나들 슈퍼였던 것 같아 그리로 갔다가 길을 잃곤 했다. 길 끝에 두고 온 애인은 영문도 모른 채 나를 한참 기다려야 했다. 그는 맥주집에서 직진하면 나오는 편의점을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길을 헤매다보면 덜컥 겁이 나는 순간이 있었다. 길은 길로 이어진다는 내 오랜 철학을 놓지 않고 서슴없이 골목을 걷다가 아 굉장히 어둡다 계속 어둡다, 길 너머가 보이지 않을 때. 비로소 내가 의심스러워져 뒤를 돌아보면 발자국도 없는 길은 아득했다.


그럴 땐 전화를 걸었다. 그는 길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내가 지금 어딘지를 모르겠어. 깜깜해

보이는 게 뭔데

골목 초입 저번에 화분 산 꽃집을 지나쳤는데 그 뒤로 길을 잃었어

직진하다보면 스페인 음식점 나와 맛없던. 기억나?

응 26000원짜리 시켜서 반도 안 먹었지

응 거기. 거기서 오른쪽으로 틀면 큰 길 나와. 같이 간 게 몇 번짼데 아직도 헤매냐    


가로등도 없이 즐비한 빌라들 사이를 걷다가 그의 말대로 맛대가리 없던 스페인 음식점의 불 꺼진 간판을 보면 그게 그렇게 반가웠다. 낮에는 안 그렇더니 밤만 되면 골목들은 정색을 했다. 무서운 가게들 사이 빼꼼 등장하는 아는 가게는 유일하게 다정했다. 와봤거나 빈정거렸거나 그 앞에서 싸우거나 울거나 웃어 기억에 남은 가게들. 아 여기 알지 알지. 그 때부터 친근해진 골목에 길이 보였다. 길을 찾는 방식이었다.     


오늘은 망원의 카페 부부를 찾아가려고 서서울농협 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렸다. 망원에는 자주 장을 보고 쥐포를 사먹고 한강도 가고 화분도 사러 왔었기 때문에 길이 익숙했는데 서서울농협 정류장은 처음이었다. 그와 버스, 지하철, 차를 타고 왔던 망원역 출발이 아닌 길은 또 낯설었다. 버스는 골목 한가운데 날 덩그러니 놓고 떠나버렸다. 골목은 깜깜했다. 지도에서는 도보 8분이랬지만 꼬치집은 많고 파리바게트도 세븐일레븐도 모두 하나 이상이었다. 나는 가만히 지도를 들여다보다가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감을 되살리는 편이 빠를 것 같았다. 시장만 찾으면 되는 일이었다. 또 여긴 우리 나와바리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혼자 보는 골목은 꽤 오래도록 낯을 가렸다. 큰 길에는 밝은 파리바게트와 세븐일레븐이라도 있었는데 들어선 골목은 빌라와 빌라뿐이었다. 어디 빠져나가지 말라고 빌라끼리 손을 잡고 방어벽을 친 듯 정말 빠져나갈 구석은 없었다. 선택지는 후진이나 직진뿐이었다. 한 5분 걸었을까. 바람도 거친데 골목에 불빛은 작은 붉고 높은 십자가뿐이었다. 빌라 숲 가운데 이정표처럼 우뚝 선 십자가는 기괴하고 무서웠다. 저건 이정표가 아니다, 발걸음을 재촉하는 내 뒤에 길이 그림자처럼 점점 길어지는 것 같았다. 이미 의심은 오래됐지만 뒤는 서늘해서 돌아볼 수 없었다.  


빠른 걸음이 뛰는 걸음이 됐을 때, 빛이 보였다. 이번엔 열린 가게의 환한 빛이었다.


지니 미용실.

아 여기, 알지 알지.     

저 미용실 봐봐. 저 미용실 커튼 열면 안에서 도박판 벌이고 있을 것 같다

좀 희한하긴 하다. 얼룩말 인형부터 셀로판지 붙인 것도

이런 주택가에서 미용실로 위장하고 성매매, 도박 이런 거 하는 거 아냐?

문도 닫혀있다. 미용실 간판만 걸어둔 건가

가까이 가서 보자    


낮에는 닫혀있던 지니 미용실이 밤에는 열려 열심히 머리를 말고 있었다. 문 열린 지니 미용실을 보자 골목도 다정해졌다. 지니 미용실부터 시장에 가는 길은 잘 알고 있었다. 정류장에서 카페 부부까지는 10분이 걸렸다. 나는 헤매지 않고 잘 도착했다. 골목에서 길을 잃을 때 전화 걸 사람은 사라졌지만 이정표가 늘어 나는 이제 길을 덜 헤맬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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