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일을 마무리하기까지 다섯 단계의 마음 변화
그런 일이 있다. 마음먹고 하면 며칠이면 끝낼 것 같은 일인데, 이유 없이 미루게 되는 일. 대체로 어렵거나, 그냥 하기 싫거나, 성취감을 느끼기 어려운 지루한 일이 그렇다. 나는 어려운 일을 해야 할 때 자주 일을 미룬다.
1단계, 막연한 두려움
어떤 일이 들어왔다. 이 일은 익숙해 보이지만 익숙하지 않은 그런 일이다. 늘 해왔던 프로세스대로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지만 묘하게 하기 어려워 보이는, 낯선 일이 있다. 그렇다고 일을 거절하진 않는다. 해봄 직한 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일을 덜컥 받고 나서 그 뚜껑을 열어 보면 막연한 두려움이 샘솟는다. 오 이것은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겠다.
2단계, 근거 없는 긍정
우선 힘차게 시작해본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니 두려워하기보단 해치워보자는 생각을 한다. 프로젝트 완주까지 해야 할 일을 정리하고 머릿속으로 대략 구성을 잡아 본다. ‘오. 나름 해볼 만한 일이다. 요렇게 저렇게 하면 쉽게 할 수 있겠네!’ 선무당이 왜 사람을 잡는지 아는가. 그것은 사람을 쉽게 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대충 알면 그 일은 참 쉽다. 쉬워 보인다. 학부생에서 석사 과정, 석사 과정에서 박사 과정으로 갈수록 그 분야가 더 어렵게 느껴지는 이치도 이와 같을 것이다.
3단계, 당혹스러운 난관의 연속
대략 구성했을 때와 다르게 실제 실무를 진행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힌다. 찰떡같은 이야기를 해줄 것 같던 취재원이 생각보다 필요한 정보를 잘 모른다든지 파고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 내용이 방대해 단시간 내에 생각을 구조화할 수 없다든지. 늘 계획했던 것과 다르게 새로운 어려움을 마주하고 예상했던 노동 시간도 길어진다. 그래서 누군가 그랬지. 계획은 늘 가능해 보이는 일정보다 1.5배 더 길게 잡으라고.
4단계, 회피와 좌절
어쨌든, 일은 마쳐야 하는데, 답이 나오지 않는다. 난관이 바로 해결될 생각을 하지 않으니 본능적으로 회피한다. 지금 당장 하지 않아도 될 일이 그렇게 재밌다. 돈 안 되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즐겁다. 헤비 콘텐츠 소비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 영상, 책을 섭렵하고 줄줄 외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 회피의 기간에 나는 그 누구보다 충실하게 콘텐츠를 소비한다. 다른 콘텐츠를 소비하며 정작 내가 만들어야 하는 콘텐츠를 외면한다. 그러곤 좌절한다. 잠자리에 들 때, 샤워할 때, 밥을 먹을 때, 맥주를 마실 때 모든 순간에 좌절이 함께 한다. 글도 못 쓰는 게 잠은 자서 무엇 하나. 일도 열심히 안 했는데 뭘 잘했다고 밥을 먹나. 야속하게 맥주는 참 맛있군.
5단계, 막다른 골목, 답을 찾을 것이다.
막다른 골목이다. 회피와 좌절을 반복하다 보면 나의 멍청함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아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하면 될 걸 왜 회피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는 거야?’ 사실 안다. 회피해서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사람이 아는 대로 행동할 수 있다면, 그건 더 이상 사람이 아니지. 신이지. 인간은 알아도 아는대로 행동하지 못해서 반성하고 그 반성에서 새로운 성찰을 얻는 고도화된 비효율성을 장착한 존재다. 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가? 아는 대로 행동하지 않고 행동하며 알아가기 때문이다. (제 생각입니다.) 단 음식이 몸에 안 좋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꾸역꾸역 달달한 것들을 입에 집어 넣고 건강에 적신호가 들어올 때가 되어서야 ‘아! 그러지 말아야 했구나.’를 알게 된다. 아침 일찍 일어나면 상쾌하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다. 아는 것과 다르게 일어나지지 않기 때문에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모르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서야 결국 ‘답을 찾을 것이다.’ 최면을 걸며 주어진 태스크를 어떤 식으로든 해결할 방법을 찾아낸다. 용케도 찾아진다. 그동안 회피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답을 찾게 된다.
프리랜서로 일할 때 대표적인 단점으로 흔히 ‘불안’을 말한다. 프리랜서가 가지는 불안 요소는 불안정한 페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주 새로운 클라이언트와 새로운 일에 적응하며 실패 가능성에 노출된 상태로 일해야 한다. 익숙한 일만 해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프리랜서는 일하는 매 순간에 위기가 함께 한다.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던 일이 예상치 못한 외부적 요인, 혹은 정보의 부족으로 인한 판단 미스로 한순간에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다. 때로는 나와 성향이 맞지 않는 담당자와 일하며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수도 있다. 일을 시작할 때 담당자의 성향을 100% 파악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아무리 자세한 과업 지시서를 읽는다 해도 내가 실제 수행해야 하는 일에 어떤 위기와 기회가 있을지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결국 프리랜서는 일을 선택할 때 일말의 가능성과 자신감으로 배팅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높은 능력치는 승률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겠지만, 내가 잘났다고 해서 모든 프로세스가 계획대로 부드럽게 진행되는 것도 아니다. 프리랜서는 혼자 일하는 것 같지만, 결국 누군가와 협업을 하게 되어 있다. 예상치 못한 난관은 늘 산재해있다.
두려움에서 긍정으로 회피와 좌절에서 막다른 골목으로 이어지는 일을 바라보는 감정의 변화는, 새로운 일이라는 산을 넘을 때 우리 모두가 겪게 되는 시행착오의 산물이다. 한번 겪었다고 해서 다시 겪을 필요가 없는, 빠르게 숙련되는 종류의 것도 아니다.
그런 일을 나는 지금 하고 있다. 내 능력이 부족해서 혹은 상황이 좋지 않아서 아니면 애초에 이 일이 단순하게 끝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이유는 많다. 아주 많다. 나로 기인한 것, 외부적 요인, 이해관계자 사이에 복잡하게 얽힌 서사 등등 이 일이 어렵고 잘 안 되는 상황과 이유는 널려 있다.
7년 차 프리랜서가 아직도 이런 시행착오를 겪는 이유는 비단 나 때문만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모르겠다. 하지만 다섯 단계로 내가 일을 회피하고 미루는 과정을 적으며 다시 확인했다. 어차피 5단계로 갈 거라면 좀 빠르게 가도 되지 않을까. 회피와 좌절의 단계에 쏟는 시간을 좀 줄여보면 어떨까. 어차피 당혹스러운 난관 단계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거나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으니, 내가 줄일 수 있는 단계가 있다면 좀 줄여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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