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영화 '얼라이드'와 칼칼한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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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회사 같은 팀에 근무했던 한 고등학교 동문 후배로부터 문자가 온 적이 있다.
아무래도 내 네이X의 메신저가 해킹당한 듯하다는 내용이었다.
후배에게 메시지가 왔는데 돈을 빌려달라고 했단다.
그런데 그 후배는 곧바로 그것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판단할 수 있었단다.
왜냐면 그 메시지는 오자와 탈자 투성이었다고 하는데 난 정말 오자와 탈자를 싫어한다는 것을 그 후배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배 입장에선 오타 투성이 메시지로 돈을 빌려달라는 소리를 하는 해커와 나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봤던 거다.
그의 생각에는 오타 투성이 메시지로 돈을 빌려달라는 소리를 하는 건 내가 아니었던 거다.
▼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항상 두 가지를 생각한다.
하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맛있는 칼칼한 음식을 먹겠다는 것하고, 둘은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영화를 보자는 거다.
그냥 영화를 보기에는 너무나도 피곤한 것이 현실이었기 때문에 실눈을 뜨고 영화를 딱 한 편 보고 나머지 시간은 쿨쿨 자며 돌아왔다.
영화 얼라이드 ('16년작)는 제2차 세계대전 영화다.
시대적 배경이 1942년이고, 이 시간대는 프랑스 북부 항구 도시인 '디에프'로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했다가 실패한 시점이고, 프랑스의 나치 괴뢰정권인 비시 정부가 프랑스 및 프랑스령 영토를 지배하던 당시다.
연합군은 그 이후 횃불 작전 (미국과 영국이 1942년 11월 8일에 프랑스령 북아프리카를 침공한 상륙 작전)을 펼쳐 성공하지만 영화의 시점은 그 횃불 작전이 시작되기 이전이다.
우아~하게 낙하산 한 기가 고운 모래가 휘몰아치는 사막 한가운데 착륙한다.
마치 죽은 이가 착륙하는 것과도 같고, 매우 여러 번 왔던 사람이 착륙하는 것 같기도 하다.
마치 제 집 앞마당에 사뿐히 내려앉듯 그가 하늘에서 내려온다. 그것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다.
사막에 착륙한 사람은 캐나다 출신 영국의 정보국 장교 맥스 바탄(브래드 피트)으로 프랑스 비밀요원 마리안 부세주르(마리옹 꼬띠아르)와 부부 역할을 하면서 독일 대사를 암살해야 하는 임무를 맡는다.
되는 놈은 임무를 맡아도 이런 걸 맡는다.
아마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아닌가 싶다.
모로코의 한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두 사람이다. 다시 봐도 그림 같다.
임무를 수행하기 몇 시간 전, 그들은 뻥 뚫린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해가 뜨는 모습이나 보러 가자는 말을 하며 둘은 사막으로 향한다.
미리안이 말한다.
"우리가 임무를 수행하다가 죽게 되면 아무도 모를 거예요."
"그럼 우리 … "
▼ 이 영화는 로맨스와 스릴러로 구분한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이들 스파이가 가지는 신분이 과연 원래 그들과 일치하느냐를 묻는다.
'마리안 부세주르'가 과연 진짜 '마리안 부세주르'인지를 묻는다.
인터넷은 없다.
전화도 쉽지 않다.
주위 사람들은 영어, 독어, 불어를 섞어서 쓰고 있다.
마리안 부세주르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야 할 것이 많다.
그녀는 말이 많은 여인인가?
그녀는 어느 지방 사투리의 불어를 할 것인가? 파리? 퀘벡?
※ 나는 마리안이 맥스에게 파리지앵의 발음을 가르치는 장면이 참 좋다.
나는 불어는 모르지만 앙트와넷 이모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을 하던
앙트 앙트와넷 베통 네통 어쩌구 하던 마리안은 정말 예뻐 보였다.
그녀는 독일어를 알아듣기는 하는 것인가?
그녀가 영어를 할 때는 R발음을 H발음으로 내는 버릇이 있을 것인가?
그녀는...
그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영화의 주제 중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정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을 사는 내가 상대방에게 도대체 어떤 사람으로 인식되고, 기억되느냐에 대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을 살고 있는 나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정의할까?
지금은 인터넷도 있고, 휴대전화도 있으며 누구나 쉽게 사진까지 찍을 수 있다. 자신을 증명하기 훨씬 쉽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이 없거나 있더라도 사용하기 불편한 경우 어딘가에서 내가 무슨 일을 한 것이 과연 나였다는 사실을 누가 확인해 줄 수 있을까?
질문에 대한 답은 영화를 보면서 생각해 보시는 것이 어떨까 싶다.
▼ 출장 후 칼칼한 음식을 먹고 싶다는 일념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한 후배가 점심으로 '짤라' 어떻냐고 하길래 아무 말도 없이 따라나선다.
내가 이 곳을 처음 찾았던 것은 1999년 겨울이다.
연도까지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내가 첫 번째로 회사를 옮겨서 두 번째 점심을 먹으러 간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당시 태평로에 회사가 있었는데 같이 일하는 동료가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나섰던 곳이다.
밖에서 보면 여느 맛집과 같이 가게는 허름하다.
자리에 앉는 것도 줄을 서야 하지만 앉자마자 짤라 한 개와 김치찌개 4개를 주문한다.
당연히 사리 넣어야 한다. ^^
오늘따라 때깔이 좋다.
이곳 장호 왕곱창 김치찌개의 특징은 차가운 생김치와 뜨거운 김치찌개 속의 김치가 온냉의 조화를 아주 잘 이룬다는 점이다.
혹자는 김치찌개에 이미 김치가 있는데 김치를 왜 찾느냐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두 가지는 엄연히 다른 두 음식이고,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두 음식인지라 그 두 음식의 조화는 매우 중요하다.
찌개를 팔팔 끓이고는 적당한 고기를 아래 깔고, 김치를 위에 얹어 먼저 면사리부터 먹어본다.
이맛에 출장 후에 칼칼한 음식을 먹는다.
여느 때보다 세 배쯤은 더 맛나다. ^^
그렇게 일행은 저 김치찌개를 다 비웠다.
2017년 어느 봄날 내가 갔던 한 김치찌개 집의 모습은 이런 모습이다.
생김치의 시원함이 김치찌개의 후끈함을 달래주는 그런 맛을 낼 줄 아는 집이고, 김치찌개를 본격적으로 먹기 전에 애피타이저로 먹으면 정말 더 말할 나위 없는 짤라를 파는 집이다.
짤라가 뭔지, 장호 왕곱창이 언제부터 이곳에서 영업을 시작했는지는 잘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1999년부터 약 18년간 다닌 집이다.
이게 2017년 5월의 내가 좋아하는 김치찌개 집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
▼ 귀국을 하니 공기가 좀 많이 맑아졌다.
밥을 먹고는 아재 커피에 가서 아재들의 방식으로 결제를 부탁한다.
각자의 카드를 내고, 종업원이 뽑는 카드로 결제를 한다.
내 카드는 저 하늘색이라서 ^^
오늘은 다행히 그냥 마신다.
이런 아재의 모습이 2017년 5월의 내 모습이기도 하고 말이다.
By 켄, the 아재 in 남대문 ('17년 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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