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하는 조직에 들어온 성장 회의주의자
#나를 찾아가는 기록들 5
2023. 12. 26
성장과 성숙이 회사의 주요한 인재상으로 설정된 이 곳에 성장하지 않기로 다짐한 내가 입사했던 건 어쩌면 예전 회사에서 느꼈던, 회색 분자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연장키로 다짐한 것 일지도 모르겠다.
지난 몇 년간 성장, 성숙, 동기부여, 목표 따위의 것들은 내게 많은 아픔을 남겨줬다. 달리는 와중에 넘어지고 일어나는 류의 힘듦과 어려움이라기 보단, 그 모든 것을 겪고 성장했다고 생각했던 나이지만 사회에 던져지고 보니 나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류의 좌절감이었다. 좌절의 첫 단계는 취업을 준비할 때 였고, 두 번째는 취업 후 였다. 나만의 논리적인 내러티브를 만들며 살아왔다고 생각했고, 마냥 전략적이지만은 아니었으나 꽤나 열심히 살아온 삶이었다. 꼭 들어가고 싶은 회사에 들어가는 그런 눈물나게 성공적인 취업은 아니었지만, 꽤 괜찮은 회사에 들어간 뒤에도 나를 달리게 하던 목표들은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발버둥 칠수록 멀어지는 것이 꿈임을, 짧지 않은 시간을 통해 깨달았고, 나는 꿈을 꾸지 않기로 했다.
동기부여와 목표, 성장, 성숙과 성과를 기대하며 사는 삶은, 높은 하늘을 보고 힘차게 날아오르다 ECC 유리벽에 머리를 박고 떨어져 죽어버린 새처럼,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삶, 심지어는 존재의 위기를 만들어버리는 그런 것들이었다. 이 것은 결코 에고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너무나도 열심히 쌓아올린 나의 경험치들이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알게 되고 나서 느끼는 그런 어둡지 않지만 너무나도 회의적 감정이었던 것 같다. 이 정도면 나 참 열심히 살았는데, 결국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하며 인생의 부질없는 속성을 깨달아가는 그런 애달픈 감정이랄까.
그 부질 없음을 깨닫고 나는 그냥 살기로 했다. 목표도 재미도 없이 그냥 살 줄 아는 그런 어른이 되기로 했다.
글은 참 회의적으로 썼지만, 그럼에도 나는 선천적으로 참 열정적인 사람이라, 일을 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생겨나는 재미와 열정과 행복이 있다. 나는 그런 잔잔한 감정들을 살려주고 싶다. 화전농처럼 불을 지르고 밭을 일구는 공격적인 상업적 농업이 아니라 그냥 자연 그대로의 우림을 사랑하고, 그 우림 속에서 잔잔하게 피어나는 꽃과 열매를 따 먹는 그런 것. 그냥 그렇게 살다보면 언젠가 풍성하고 우람하게 자라난 우림을 볼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