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꿈의 설계 - 베가펑크의 유토피아>의 2장
“수첩에서 펑크 레코즈까지, 나 아닌 것들이 나의 일부가 될 때”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대부분은 주저 없이 두개골 안, 뇌의 복잡한 신경망 속에 있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스마트폰의 메모장, 인터넷 검색창, 심지어 낡은 수첩에 적어둔 희미한 기록들은 단순히 외부의 도구일 뿐일까, 아니면 우리 마음의 일부가 될 수는 없을까?
이 도발적인 질문에 철학자 앤디 클라크(Andy Clark)와 데이비드 찰머스(David Chalmers)는 '그렇다'고 답하며 '확장 인지 이론(Extended Mind Thesis)'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이론의 핵심 주장은 급진적이다. 인간의 마음과 생각의 과정은 두개골이라는 생물학적 경계에 갇혀있지 않으며, 때로는 외부 환경의 사물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난해한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이 제시한 유명한 사고 실험, '오토와 잉가'의 이야기를 잠시 들어보자. 잉가는 건강한 기억력으로 박물관의 위치를 떠올려 그곳으로 향한다. 반면,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오토는 새로운 정보를 모두 수첩에 기록해 둔다. 그에게 수첩은 단순한 기록 장치가 아니라, 그의 기억 그 자체다. 미술관에 가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을 때, 그는 망설임 없이 수첩을 펼쳐 주소를 확인하고 길을 나선다.
클라크와 찰머스는 묻는다. 오토가 수첩을 통해 정보를 얻는 과정이, 잉가가 자신의 생물학적 기억을 떠올리는 과정과 기능적으로 다르다고 말할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가? 그들은 없다고 답한다. 이 이야기의 논리적 근간을 이루는 것이 바로 '패리티 원칙(Parity Principle)', 즉 동등 대우 원칙이다. 이 원칙의 핵심은 간단하다. 어떤 과정이 만약 머릿속에서 일어났다면 우리가 주저 없이 '인지 과정'이라 불렀을 것이라면, 그것이 머리 밖에서 일어나더라도 똑같이 인지 과정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 일어나는 '장소'가 아니라, 그것이 수행하는 '기능'이다.
하지만 모든 도구 사용이 마음의 확장은 아니다. 클라크와 찰머스는 외부 도구가 진정으로 마음의 일부가 되기 위한 엄격한 '결합 조건(Coupling Conditions)'을 제시했다. 그 도구는
언제나 쉽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하고(지속적 접근성)
그 정보는 의심 없이 자동적으로 수용되어야 하며(신뢰성)
그 내용은 과거에 사용자 스스로가 저장한 것이어야 한다(과거의 수용 이력)
일회성으로 사용하는 계산기는 이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지만, 오토의 수첩은 완벽하게 만족한다.
사실 마음의 경계에 대한 질문은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20세기 프랑스 현상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장님의 지팡이' 비유를 통해 비슷한 통찰을 제시했다. 처음 지팡이를 쥔 장님에게 그것은 외부의 물체에 불과하다. 하지만 사용에 능숙해지면, 그는 더 이상 지팡이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의 촉각은 손끝에서 지팡이 끝으로 확장되어, 이제 그는 지팡이 끝으로 땅의 질감을 '직접' 느낀다. 지팡이는 외부의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감각하는 몸의 일부가 된 것이다.
메를로퐁티가 지각의 확장을 이야기했다면, 클라크와 찰머스는 인지의 확장을 이야기한다. 장님에게 지팡이가 감각의 연장이듯, 오토에게 수첩은 기억의 연장이다.
펑크 레코즈는 바로 이 '오토의 수첩'과 '장님의 지팡이'가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지점이다. 베가펑크의 마음과 펑크 레코즈는 마치 늘 열린 문을 사이에 둔 두 방처럼,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지만 항상 하나로 작동하는 '결합된 시스템(coupled system)'인 것이다.
물론 이 급진적인 주장은 철학계의 거센 반격에 부딪혔다. 비판자들은 마음이 두개골 안에 국한된다는 '두개골 내부주의' 입장에서, 확장 인지 이론이 중요한 구분을 흐린다고 주장한다.
철학자 프레드 애덤스와 켄 아이자와는 어떤 과정이 '인지적'이려면 고유한 '인지적인 것의 표지(Mark of the Cognitive)'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뇌 속 신경 활동은 그 자체로 의미를 형성하는 ‘비파생적 표상(non-derived representation)’이지만, 수첩의 글자는 반드시 ‘마음’이라는 해석자가 있어야만 의미를 갖는 ‘파생적 표상(derived representation)’이라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외부 대상이 인지 시스템과 '인과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시스템의 '구성적 일부'가 된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결합-구성 오류(Coupling-Constitution Fallacy)'라고 비판했다.
또 다른 철학자 로버트 루퍼트는 더 경험적인 반론을 제기한다. 그는 생물학적 기억과 수첩의 기능이 미세한 수준에서 보면 전혀 동등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인간의 기억은 기존의 기억이 새로운 기억 학습을 방해하는 '부정적 전이' 현상을 보이지만, 수첩에 새 정보를 적는 것은 기존 정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처럼 확장 인지 이론을 둘러싼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론의 창시자인 클라크와 찰머스조차 스스로 한계를 그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확장된 인지(extended cognition)'는 가능하지만, 주관적인 느낌이나 경험을 포함하는 '확장된 의식(extended consciousness)'은 뇌 안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오토의 수첩은 그의 '믿음'의 일부는 될 수 있어도, 그의 '의식적 경험'의 일부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철학적 논쟁은 펑크 레코즈와 같은 시스템이 현실화될 때 우리가 마주할 '자아'의 경계 문제를 정확히 예고한다. 오토에게 수첩이 그러했듯, 우리는 이제 디지털 수첩을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수첩이 스마트폰으로 진화하고, 그 스마트폰은 다시 클라우드와 연결된 탐색기의 형상을 띤다. 이 확장의 끝에, 우리는 펑크 레코즈라는 무한한 외부 기억의 장치를 만난다. '나'라는 존재의 경계는 어디에서 멈추는가?
어떤 결론에 도달했을 때, 그것이 나의 고유한 추론의 결과인지, 아니면 시스템이 나의 의식에 맞춰 최적의 통찰을 '제공'한 것인지 스스로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순간. 나의 기억과 경험, 고유한 사유 방식마저 외부 시스템의 흐름에 녹아든다면—그때 나는 무엇으로 '나'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 무한한 지식의 바다에 접속한 나는 확장된 존재일까, 아니면, 천천히 녹아 없어지는, 희석된 그림자일까. 확장된 마음의 시대— 빛은 무한의 지식이지만, 그 그림자는 ‘나’라는 경계의 소멸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