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 만에 찾아온 폭설과 '눈부신 고립'
나흘 내내 쉴 새 없이 눈이 내렸다. 한국에서도 이런 폭설을 경험한 적이 있었나? 옛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잘 잡히지 않았다. 아마 눈이 왔더라도 이토록 긴 시간 동안 줄곧 내리거나 마치 동화 속 눈의 나라에 갇혀 휴식과 자유를 만끽했던 묘한 행복감은 느껴본 적이 없었으니, 이곳에서 보낸 지난 일주일 간의 경험이 눈과 관련된 가장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아일랜드에 눈이 온다는 것은 특별한 사건이다. 혹여 헷갈리는 이들이 있을지 몰라 다시 강조하면 이곳은 '아이슬란드'가 아니라 '아일랜드'이다. 춥고 음습한 겨울 내내 찬 바람이 계속 불지만 기온이 영하로는 쉬이 내려가지 않고, 가끔 눈 비슷한 것이 오더라도 반짝 쌓였다가 마법처럼 금세 사라지거나 부드러운 눈보다 우박 같은 얼음 알갱이가 이따금씩 얼굴을 때릴 때가 더 많은, 즉 비가 많이 와도 눈으로 바뀌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 아일랜드이다.
며칠 전 밖에서 친구들과 뛰어노는 딸아이를 데리러 나갔다가 삼삼 오오 모여있는 동네 엄마들을 만난 적이 있다. TV에서 중계한 평창 동계 올림픽 장면을 보았다는 그들은 하얗게 눈으로 덮인 영하 15도의 한국이 무척 경이로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일랜드에서는 몇 명의 선수가 출전했냐고 묻자, 다섯 명의 선수들은 국적이 아일랜드이긴 해도 대부분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데다, 이곳은 동계올림픽을 준비할만한 기후와 환경이 안된다며 저마다 손사래를 쳤다.
이런 형편이다 보니 'The beast from the east'라 불리는 시베리아 한랭전선이 유럽을 위협하고 있다는 뉴스가 시작될 때부터 아일랜드는 들썩이기 시작했다. 늘상 내리던 비와 야수처럼 매서운 바람이 만나면 과연 얼마나 많은 눈이 쏟아지게 될지 기상 캐스터는 벌써부터 잔뜩 걱정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수도가 얼어서 빨래를 못하고 눈보라에 바깥출입이 어렵다는 한국의 한파 뉴스를 줄곧 들어온 우리 가족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들의 반응이 과하다는 생각에 여유 만만한 웃음을 지었던 것이 사실이다.
"엄마 어쩌면 내일부터 학교 안 갈 수도 있대."
본격적으로 눈이 내리기 하루 전날, 학교에 다녀온 딸아이가 불쑥 내뱉는 말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코웃음을 쳤다. 눈 한 송이 내리지 않고 바람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오후에, 학교에 가기 싫은 평범한 초등학생이 "혹시나"하며 던지는 뜬구름 잡는 소리가 분명했다. 몇 달 전 심한 폭풍으로 이틀간 학교를 쉬어본 적이 있는 녀석들은 줄곧 "폭풍아 제발 다시 한번 더 와줘"하며 철없는 주문을 외워온 터였다.
물론 오전부터 학교의 엄마, 아빠들이 공유하는 SNS와 톡방에서 신기한 사진과 문자들이 오가긴 했었다. 눈썰매 두 개를 단 돈 5유로 판매하고 있으니 사러 가보자는 공지부터, 이미 나는 한 개를 구입했다며 으쓱해하는 한 엄마의 문자에 부디 그 썰매를 잔디가 아닌 눈 위에서 사용하길 바란다는 농담 섞인 위로까지, 어느 때보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오후 6시쯤 되었을까, 1년 만에 다시 비자를 갱신하기 위해 우리 네 식구는 아일랜드 출입국 사무소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창밖으로 슬슬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사무실 안에 모인 나를 비롯한 각국의 외국인들은 신기한 광경에 밖을 내다봤고 그때부터는 믿을 수 없는 리얼 상황들이 지인들을 통해 문자로 날아왔다.
눈썰매를 사기 위해 쇼핑몰에 줄을 선 부모들, 이미 우유를 비롯한 유제품과 빵과 과일 등 마트의 진열대가 텅텅 비어 가고 있다는 뉴스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이거 실제 상황이야?" 여느 때처럼 찬 바람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나는 그들에게 계속 되물었다.
아이들을 겨우 재우고 잠자리에 누운 그때 띵동! 아이리시 엄마로부터 의미 심장한 문자가 왔다.
"Finally!!"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가 창문 커튼을 젖혀보니 흰 눈이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호들갑스러운 뉴스들이 하루를 휩쓸고 지나가버린 후, 눈은 아무런 소리 없이 그저 고요하게 깊은 밤의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드디어 8년 전에 사놓은 눈썰매를 꺼낼 수 있을 것 같아!"
그녀의 말은, 이렇게 쌓이는 눈이 내린 것이 8년 만에 처음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 해도 과연 학교가 문을 닫을까? 반신 반의 하며 나는 잠 속에 빠져들었다.
이른 새벽 6시, 알람보다 스쿨버스 기사의 문자가 먼저 나를 깨웠다. 아마도 오늘 학교는 문을 닫을 것이고, 자신은 버스를 운행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또다시 어린아이처럼 창가로 뛰어갔다. 동네는 하얗게 변해있고 모든 자동차들은 수북하게 쌓인 눈 이불을 덮은 채 잠들어 있었다. 뒤이어 학교의 교장이 보낸 메일과 문자, 아이들의 반톡 방에 공지가 연달아 쏟아졌다. 역시나 학교가 문을 닫을 것이라는, 딸아이의 바람과 주문이 현실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일단 우리 가족은 눈사람 만들기로 몸을 풀기 시작했다. 이유가 어찌 됐건 학교에 안 간다는 건 아이들이나, 새벽부터 도시락을 싸고 하교 후에는 눈밭을 헤치고 애들을 데리러 가야 하는 엄마에게나 굿뉴스였다. 학교 친구들도 신이 났다. 언덕이 가까운 곳에 사는 아이들은 죄다 눈썰매를 끌고 나가 뛰어놀고 있다는 소식을 시시각각 전해왔다. 동네 개들까지 신나서 눈썰매를 끌고 다닐 지경이었다.
오후가 되자 폭설로 인해 '레드'경보가 발령되고, 더블린을 비롯한 대부분의 아일랜드 지역은 마비가 되었다. 버스와 루아스는 물론, 공항의 비행기까지 모두 운항이 중단되고, 학교는 금요일까지 문을 닫는다는 메시지가 날아왔다.
갑작스레 주어진 홀리데이(?)에 기쁘면서도 며칠간의 눈으로 이토록 심하게 모든 것이 중단된다는 사실이 의아했다. 체코에서 이민 온 한 엄마 역시, 자기 나라였다면 하루 만에 도로의 모든 제설작업이 끝나고 차들이 다닐 수 있을 텐데 모두 손 놓고 있는 듯한 이 상황이 신기하다고 했다.
"우리는 이런 큰 눈에 익숙하지 않아. 이건 정말 자주 있는 일이 아니거든. 그래서 평소에 제설작업과 같은 대비책을 위해 큰돈을 많이 쓰지 않았어. 그러니 모든 것이 더딜 수밖에 없어."
아이리시 엄마의 얘기를 들으니 그제야 조금 이해가 되었다. 실제로 그녀의 남편은 이런 길고도 심한 폭설을 그가 어린아이였던 1982년 이후로 처음 본다고 하니, 정말 30여 년 만에 일어난 사건 아닌 사건이었다.
게다가 우리 동네처럼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마을에서는 대부분 대중교통보다는 자가용을 이용하는 가족들이 많다 보니 바로 집 앞의 길만 막혀도 오갈 곳 없이 고립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일어나자마자 창밖을 살피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눈을 어제보다 더 쉴 새 없이 쏟아졌고, 뒷마당에 쌓인 눈 때문에 문을 열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발목까지 닿던 눈은 어느새 종아리까지 성큼 올라와 있었다. 아이들은 더 신이 났다. 시끄럽게 뛰어노는 동네 아이들의 소리에 맞춰 우리 아이들도 완전 무장을 하고 뛰어나가 눈싸움에 합류했다. 덕분에 온 집안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장갑과 점퍼로 물바다가 되었다. 눈썰매를 사놓지 않은 것과, 우리 동네에는 그것을 탈 만한 언덕이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어찌 됐든 아이들에게는 하얀 천국이 따로 없었다.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문득 문정희 시인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의 구절들이 떠올랐다. 눈 속에 갇혀 몸뿐만 아니라 운명까지 기꺼이 묶여버리고 싶다는 그 노래에 나 역시 기꺼이 동참하고픈 마음이었다.
그런가 하면, 아이리시들의 재치는 눈 속에서 빛을 발했다. 일상이 마비된 와중에서 어른, 아이 모두 신기한 눈사람이나 조형물을 만드는 재미에 흠뻑 빠졌는가 하면, 마치 크리스마스가 다시 온 듯 정리했던 전등을 다시 꺼내 집집마다 밝히는 이들도 나타났다.
눈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폭풍 '엠마'와 폭설이 만나 더 심한 눈보라를 일으키고 있다고 뉴스에서는 심각하게 보도를 했다. 아일랜드뿐만 아니라,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 폴란드 이탈리아 등 다른 유럽의 국가에서도 갑작스러운 눈과 추위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쯤 되니 슬슬 주방을 살피며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사흘 정도 먹으면 쌀은 떨어질 것 같고, 라면과 짜장라면은 두세 끼 먹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식빵과 우유는 이틀, 그 외에도 스파게티와 토르티야, 밀가루 등 이것저것을 동원하면 닷새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더블린에 살게 된 후부터 한꺼번에 장을 많이 보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다 보니 며칠만 마트에 가지 않아도 이런 일이 생기곤 한다. 일단 냉장고가 너무 작고, 빵들은 3일만 되어도 곰팡이가 피는 상황이라 이것저것 쌓아둘 수가 없다. 주말에 한인마트에 배송 주문을 하려고 했던 계획도 무산되고 말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다급한 것은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화장실의 휴지였다. 걱정되는 마음에 딸아이와 함께 집에서 가장 가까운 편의점에 가보기로 했다. 마트보다는 가격이 비싸고 물건도 다양하진 않지만 급할 때마다 종종 들르는 슈퍼였다. 모자와 장갑, 부츠를 신고 혹시나 몰라 작은 삽까지 완비하고 아이와 길을 나섰다. 평소라면 5~6분 만에 갈 수 있는 거리가 어찌나 멀게 느껴지는지, 발이 푹푹 잠기는 눈 속을 헤치고 한걸음 한걸음 가뿐 숨을 내쉬며 걸어갔다. 눈보라는 연신 몰아치는 데도 집 근처 넓은 벌판에는 동네 개들을 비롯하여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많은 주민들이 나와서 대형 눈사람을 만들거나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힘들게 도착한 편의점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럴만했다. 직원들도 출근하기가 만만치 않았을 테고, 물품 배송차도 올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왜 미처 몰랐을까. 10분 거리에 있는 더 비싼 식료품점에 가볼까 하다가 이미 지쳐버린 딸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오후 동네 엄마가 재밌는 뉴스를 하나 보내줬다. 오후에 갈지 말지 망설였던 그 식료품점이 뉴스에 나온 것이다. 오후 3시가 된 후에야 문을 연 상점 앞에는 평소와 달리 긴 줄이 늘어섰고, 그 맨 앞 줄에는 딸아이의 반 친구가 눈썰매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가 하면 조금 심각한 뉴스들도 등장했다. 아일랜드의 Tallagh라는 지역에서는 8명의 남성들이 인근 두 개의 마트를 습격하여 물건을 훔치고 가게를 부순 죄로 경찰에 잡히기도 했다. 전기가 나가고 생수가 부족해 힘든 사람들, 자동차로 이동하던 중 눈을 만난 고립된 사람처럼 폭설로 인해 극단의 상황에 처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아일랜드뿐만 아니라, 폴란드에서도 23명의 사람들이 죽은 것을 비롯해 유럽에서만 60여 명이 사망하고, 영국에서도 자동차 사고가 잇달아 일어나는 등 이번 추위와 눈으로 인한 피해가 속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제는 슬슬 눈이 그쳐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나흘 내내 흩날리던 눈발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여전히 세상은 눈 속에 뒤덮인 상태였지만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앞집도 알고 옆집도 알고 있었다. 저마다 큰 삽을 들고 나와 집 앞의 작은 마당과 도로에 쌓인 눈을 치우며 차들이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당 뒤 창고에서 가져온 무거운 삽을 들고 낑낑 대고 있을 때쯤 역시나 친절한 아이리시들이 더 크고 가벼운 삽을 들고 와 이게 더 쉬울 거라며 빌려준다.
치우면서 쌓인 눈이 아까워 나는 이글루나 아이스크림 모양을 만들며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갔다. 동네 아이들은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커다란 눈 언덕에서 미끄럼을 타며 뒹굴었다. 며칠 동안 고립돼 있던 하얀 꿈속에서 나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밤이 되자 무언가 익숙한 소리가 창밖에서 들려왔다. 마치 돌아온 탕아처럼 아일랜드의 주인인 비가 그제야 내가 다시 왔다며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30여 년 만의 폭설. 그러고 보니, 누군가는 태어나서 처음 만나 보았고, 누군가에게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귀한 눈이 어느덧 빗줄기에 몸을 맡긴 채 스르르 녹고 있었다.
닷새만에 다시 학교에 가야 하는 날. 아직 도로의 제설작업이 완료되지 않아 스쿨버스 정류장이 더 먼 곳으로 바뀌었다는 연락이 왔다. 평소보다 5분 먼저 나섰건만 전혀 눈이 치워지지 않은 보도블록을 걷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자꾸만 비틀거리는 두 아이의 손을 잡고 20여 분을 걸어 겨우 도착했지만 버스는 이미 떠난 후였다.
버스를 놓친 것보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일을 더 걱정하는 나에게 엄마들은 그냥 오늘은 학교를 쉬게 해 주라며 토닥여준다. 갈피를 못 잡고 무거운 발걸음을 돌리고 있는 그때, 천천히 달려가던 자동차 한 대가 우리 곁에 서서 창문을 내린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의 엄마다. 얼른 타라는 손짓에 아이들을 차 안으로 밀어 넣고 그저 땡큐만 연발한 후 문을 닫았다. 역시나 감사하게도 내 주변에는 친절한 아이리시가 많다.
홀로 눈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훨씬 가벼웠다. 눈이 오는 내내 들리지 않던 새소리도 이제야 반갑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땅도 나무도 눈에 덮여 있는 동안 어디서 몸을 피하고 있었니. 무얼 먹고 지냈니. 눈 속에 파묻혔던 집 앞의 큰 산과 나무, 잔디가 긴 침묵을 마치고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더블린에 온 후 한국에서는 매년마다 당연하게 보던 눈을 못 봐서 내내 아쉬웠는데 진력이 날 정도로 눈을 흠뻑 만날 수 있었다니, 어쩌면 우린 참 운이 좋다.
한국으로 돌아간 몇 년 후, 시간이 흘러 흘러 어느 겨울에 가 닿아 소담스러운 눈이라도 내리는 날이 오면 머릿속 잡동사니를 휘적거리다 손에 냉큼 잡힐 만한 묵직한 추억 하나가 이렇게 또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