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
어느덧 해는 지고 있었다. 드라이버와 가이드의 역할을 동시에 하느라 아침부터 쉼 없이 떠들던 투어버스 기사는 라디오에 마이크를 넘긴 채 조용히 핸들만 돌리고 있었다. 시리고 축축한 아일랜드의 바람에 하루 내내 시달린 여행객들은 버스 의자에 머리를 기댄 채 곤한 잠에 빠져버렸다. 깨어 있는 몇몇 사람은 나처럼 숨을 죽인 채 창밖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듯했다. 왼편으로는 바다, 오른편으로는 험준한 산을 끼고 버스는 기다란 S자를 이어 그리며 조용히 내달렸다. 바다와 산을 사이에 두고 아주 드문드문 집 한두 채가 지나가고, 잊을만하면 간혹 무심히 풀을 뜯는 소 몇 마리가 눈에 띄곤 했다.
얼마큼 달렸을까. 아일랜드 특유의 구슬픈 노래들이 풍경을 어루만지듯 연이어 흐르는 동안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지루하지 않은 바다와 벌판, 바위, 절벽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는 이곳에 과연 사람이 살고는 있는 걸까. 지구 반대편이 아니라 마치 머나먼 행성에 날아온 것처럼 몽롱함에 빠져 있는 그때, 기사는 버스를 세우더니 잠시 쉬어가겠다며 앞문을 열었다.
잠시 착륙할 시간이었다.
우리는 클리프 모허(Cliffs of Moher)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클리프 모허는 해발 200m 높이의 아슬아슬한 길이 8km가량 펼쳐지는, 약 3억 년 전에 생성된 것으로 알려진 절벽이다. 그러나 우리 가족을 비롯하여 전 세계 여러 나라의 관광객들이 잔뜩 기대를 품고 도착했을 때는 자욱한 안개만이 그득했다. 날을 잘못 잡은 것이다. 1년에도 여러 명이 사고로 떨어지곤 한다는 아찔한 곳이라지만, 시야 1미터 이상을 확보할 수가 없었다. 어디가 절벽이고 어디가 바다인지 그 경계가 너무 모호해서 오히려 별로 무섭지가 않았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안개가 걷히겠지, 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이끌고 진흙밭을 내내 오르다가 절반을 넘어섰을 즈음 이내 마음을 돌리고 내려왔다. 터덜터덜 걷다 보니 저만치에 백발의 할머니 한 분이 보였다.
'그래도 우린 살면서 한 번 더 올 수도 있지만 저분은 어쩌면 마지막일 텐데......'
안타까운 심정으로 할머니를 바라보니 안갯속에서 뒤엉켜있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클리프 모허는 <해리포터와 혼혈왕자>의 촬영 장소로도 유명하다. 1987년 작품인 코미디 <The Princess Bride>, 아일랜드 영화 <Ryan’s Daughter> 등 그 외에도 여러 영화의 배경이 될 만큼 멋진 경치를 자랑한다.
날씨 탓에 아쉽게도 영화 속 절경을 놓치고 왔지만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이 오히려 로드무비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고도 쓸쓸해서 위안이 되는 오후였다.
그리고 반년 후 우리 가족은 다시 클리프 모허로 여행을 떠났다. 아일랜드의 날씨는 전혀 예측할 수 없기에 그저 천운에 맡기고 찾아간 그날은 역시 잔뜩 흐리긴 했지만 다행히 안개가 걷혀 있었다.
클리프 모허에 가기 위해 우리는 이른 아침 골웨이(Galway) 시내에서 투어버스에 올라탔다. 이 버스는 클리프 모허뿐만 아니라, 인근의 오래된 성이나 고인돌과 같은 유적지 서너 곳을 함께 돌고 저녁에 다시 골웨이로 돌아오는 일정으로 운행되었다.
더블린 시내에도 클리프 모허에 갈 수 있는 투어버스가 있긴 하지만, 이왕이면 골웨이에 들러 도시를 먼저 둘러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더블린 시내에서 버스나 기차를 타면 골웨이까지 3시간 정도가 걸리는데, 우리 가족은 기차를 타고 오면서 아일랜드 외곽의 한가로운 전원풍경을 오래도록 감상할 수 있었다.
골웨이는 한국인들에게는 조금은 낯익은 이름의 도시일런지도 모른다. 몇 달 전, 윤도현과 이소라, 유희열이 함께 버스킹 여행을 떠났던 '비긴 어게인'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더블린과 함께 소개되기도 했다.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 외에 다른 지역들을 돌아볼 여유가 있다면, 여행 리스트에 충분히 넣어도 좋을 장소이다. 반가운 한국 뮤지션들이 더블린에 이어 골웨이로 버스킹을 다니는 그 프로를 인터넷으로 다시 찾아보면서 우리가 여행 갔었던 도시의 구석구석이 화면에 나올 때마다 아이들과 어찌나 흥분했는지 모른다.
방송으로 소개되기 전인 작년 12월, 처음 골웨이를 방문했을 때 이미 우리는 아름답고 정겨운 마을의 매력에 푹 빠졌더랬다. 대서양과 맞닿아 있다는 이유 때문인지 확 트인 바다는 무언가 느낌이 달랐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가득한 아기자기한 상점들과 펍들이 가득한 거리에서 동화 속 세상에 온 듯 들뜬 기분에 휩싸이기도 했다.
'비긴 어게인'이라는 프로가 아일랜드 더블린을 배경으로 한 영화 <원스>를 모티브로 했듯이, 내가 더블린이라는 도시를 알게 된 계기도 <원스>였다.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 틈에서 기타를 치며 절규하듯 노래하던 영화 속 남자 글렌 헨사드. 그의 음악에 발걸음을 멈추었던 여자 마르게타 이글로바.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남루한 하루하루를 이어가는 젊은 남녀의 삶과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음악에 가슴이 따뜻했다. 더블린이라는 도시는 그저 이들의 일상을 감싸고 있는 영화의 낯선 배경일뿐 솔직히 그 이상의 관심은 없었다. 그때만 해도 이렇게 몇 년간 정착하여 살게 되리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원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씬은 남자가 만든 새 곡을 들으려고 카세트테이프를 꺼낸 여자가 때마침 다 닳은 배터리를 사기 위해 아이를 재우고 편의점에 다녀오는 장면이었다. 배터리를 사서 돌아오는 길, 여자는 이어폰을 낀 채 노래를 흥얼거리며 더블린의 어느 밤길을 걷는다. 주변을 지나가는 자동차와 사람들도 오로지 음악에만 흠뻑 빠져있는 그녀를 방해하지 못한다. 이내 그녀가 집으로 돌아와 아이가 자고 있는 고단한 일상으로 들어가는 순간 음악은 끝난다. 이제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첫아이를 등에 업은 채 조그만 모니터로 영화를 다운로드하여 보고 있던 그때의 나는 그녀의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내 등 위로 전해지는 듯했다.
사람은 자신의 현실에 따라 보고 싶은 것, 보이는 것이 달라지는 듯하다. 더블린으로 날아와 처음 갔었던 거리는 글렌 헨사드가 버스킹을 하고 있던 그라프턴 스트릿(Grafton Street)이었다. 시티센터로 이어지는 이 거리는 더블린을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레 지날 수밖에 없는 통로이기도 하다. 이곳에 오면 언제든 영화 속 모습처럼 곳곳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과 서커스를 선보이는 젊은이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하루, 한 달, 1년 넘게 일상처럼 이 거리를 오가던 어느 날 나는 다시 영화 <원스>를 찾아보았다. 신기하게도 이번에는 처음 감상할 때 미처 와 닿지 않았던 다른 모습들이 더욱 눈에 들어왔다. 딸아이와 엄마를 데리고 더블린으로 날아온 여자는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이 중요한 이방인이었다. 길에서 꽃을 팔고, 아일랜드 가정집에서 청소일을 하게 됐다며 기뻐하는 그녀가 고장 난 청소기를 거리에 끌고 다니는 장면은 단순히 웃음의 요소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 그 자체였다(더블린의 인건비는 한국에 비해 비싸다. 무언가를 고치기 위해 사람을 부르면 100유로는 기본이다).
길에서 노래를 부르는 남자 역시 짬이 나면 아버지를 도와 가전제품 고치는 일로 밥벌이를 해야 하는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사람이었다.
영화 속에서 음악으로 소통하던 이들은 꿈과 낭만을 먹고사는 판타지의 주인공이 아니라, 낯선 땅에서 살기 위해 애쓰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이방인이자 더블린의 현실 속 아이리시 그 자체였다.
더블린에 온 지 한 달쯤 되었을 무렵 날씨가 유난히 좋은 어느 날, 우리보다 1년 먼저 더블린에 정착하고 있던 한국인 친구가 멋진 곳을 보여주겠다며 우리 가족을 이끌었다. 기차를 타고 달키(Dalkey)라는 낯선 역에 내려 좁은 골목길을 지나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 보니, 예측하지 못했던 멋진 풍경이 펼쳐졌다. 하늘과 산, 그리고 바다가 서로 맞닿아 있는 곳. 킬라이니 힐(Killiney Hill)이라는 그곳은 <원스>의 두 사람이 조심스레 서로의 속내를 털어놓았던 장소였다. 꼭 영화 속 장소라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누구든 이곳에 오른다면 답답했던 마음이 탁 트일 것이다. 서울이란 도시에서 벗어나 낯선 아일랜드에 와 있다는 현실이 리얼하게 느껴지는 하루였다.
영화의 한 장면 안에 서 있다는 것이 처음에는 마냥 신기했지만, 더블린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영화와 현실의 구분은 옅어져 갔다.
<원스>의 존 카니 감독이 더블린을 배경으로 만든 또 다른 영화 <싱 스트리트>를 볼 때쯤에는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주택들과 학교, 집안의 구조들이 익숙하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영화 속 주인공과 밴드 멤버들이 뮤직비디오를 찍기 위해 찾았던 바다는, 우리 가족이 주말마다 종종 들르곤 하는 던리어리(Dun Laoghaire)라는 마을이었다.
더블린에서 바다를 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더블린의 동쪽 해안을 따라 달리는 기차인 다트(Dart)를 타면 바다 가까이에 있는 호스, 블랙락, 달키, 브레이 등 여러 지역을 두루두루 구경할 수 있다. 던리어리는 그중 내가 처음으로 가본 마을이었는데, 예상했던 시골스런 바다 마을과는 달리 깔끔하고 세련된 분위기의 곳이었다. 바다에는 다양한 요트와 낚싯배들이 즐비하고, 내륙 쪽으로는 오래된 교회와 크고 작은 상점, 영화관, 예쁜 중고물품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트역에서 내려 바다를 따라 쭈욱 걸어가다 보면 '피플스 파크'라는 공원이 나오는데 일요일에는 아침부터 오후까지 선데이 마켓이 열려서 다양한 음식도 맛보고, 책이나 옷, 비누, 장신구 등 여러 가지 물품들을 구경할 수 있다. 특히 한국 음식을 파는 한국분들을 만날 수 있어서 우리 가족은 날씨가 좋은 일요일마다 이곳에서 닭갈비와 불고기, 잡채 등을 먹곤 한다.
무엇보다도 처음 던리어리에 갔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큰 도서관이었다. 지은 지 얼마 안 된 듯한 현대식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층마다 다양한 책들이 놓여있고, 특히 아이들 책이 있는 3층에 올라가면 통유리로 된 창문 밖으로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별다른 일정 없이 하루 내내 앉아서 책을 보거나 바다를 보아도 지루하지 않을 그런 장소였다. 다만, 우리나라와 달리 더블린의 도서관은 월요일에 쉬지 않고 대신 주말에 일찍 문을 닫기 때문에 스케줄을 잘 체크해서 방문해야 한다.
또한 이곳에서 10분 정도 바닷가를 따라 걸어가면 제임스 조이스 박물관도 찾아볼 수 있다.
아일랜드 안의 여행지는 무궁무진하다. 아직 그곳들을 전부 다녀보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가본 곳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여행을 꼽으라면 링 오브 케리(Ring of Kery)를 떠올리게 된다. '링 오브 케리'는 특정 지역이 아니라, 아일랜드 남서쪽의 케리라는 지역을 도는 순환 일주 도로를 말한다. 킬라니(Killarney)라는 곳에서 시작하여 켄메어, 워터빌 등을 돌다 보면 지금껏 보지 못했던 멋진 경치들과 마주하게 된다.
이곳을 여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차를 렌트했는데, 도로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드라이브 코스가 최고인 만큼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중에서도 첫날 킬라니 국립공원을 지나다가 발견한 레이디스 뷰(Ladies View)는 여행 중 가장 큰 수확이었다. ‘레이디스 뷰’라는 명칭은 1861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방문으로 인해 지어졌는데, 멀리 보이는 호수(Upper lake)와 어우러진 산과 하늘이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을 자아냈다.
케리 지역이 특별히 인상 깊었던 이유는 영화 <더 랍스터>와 연관이 깊다. 더블린에서 지내면서 본 영화 가운데서도 꽤 강렬하게 남아있는 이 작품은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잔뜩 흐린 어느 날 여자가 들판에서 말 한 마리를 향해 총을 쏘면서 시작되는 이 영화는 시간과 공간을 알 수 없는 어느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결혼을 안 했거나 배우자와 사별 또는 이혼하게 된 사람들은 어떤 호텔로 보내지고, 그곳에서 지내는 45일 동안 적당한 짝을 찾지 못하면 자신이 원하는 동물로 변해버린다는 기괴한 설정이 배우 흥미롭다. 물론 영화가 끝나고 나면 분명 지독한 러브스토리라는 것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엔딩 크레딧을 살펴보던 중 이 영화의 주요 공간이 된 호텔과 숲 속, 상점, 거리 등 모든 로케이션이 아일랜드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름다운 풍경을 내세우는 영화는 아니지만, 보는 내내 우중충한 잿빛 하늘, 날 것 그대로의 숲과 들판, 나무, 호수가 참 독특하다고 느끼던 터였다.
그리고 케리 지역을 여행하는 내내 어느 길을 지날 때마다 ‘언젠가 본 것 같은 장소인데, 저기 어디쯤 영화 속 주인공들이 걸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몽환적인 상상에 종종 사로잡히곤 했다.
아일랜드에서 한동안 살게 되면서 예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낯선 공간을 여행하는 것이 처음에는 마냥 신기했다. 한국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또 다른 자연의 모습이 어딘가에도 존재해 왔구나, 전혀 다른 기후와 환경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삶들이 여기에도 있었구나. 직접 보고, 걷고 호흡하며 새삼 깨닫는 것들이 소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낯익은 것에 기대고픈 회귀본능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서도 영화를 통해서나마 눈에 익었던 곳, 언젠가 가보았던 친근한 장소들을 이따금씩 찾게 되는 것 같다. 처음에는 설레고, 시간이 흐르면 익숙해지지만, 이내 집처럼 편안한 곳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 어쩌면 '장기 여행자'의 숙명인가 보다.
막상 영화 속 사각의 프레임을 벗어나 직접 그 장소에 서보니 4D 영화로도 체험할 수 없는 생생한 자연의 숨결이 내 몸을 타고 흘렀다. 그날의 바람, 햇살, 안개, 비는 온전히 그 순간과 공간에서 경험할 수 있는 나만의 것이고 내 인생 속 한 씬이 되었다. 그것은 결코 글이나 사진, 동영상으로는 담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영화에 등장했기 때문에 특별한 곳이 아니라, 내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특별해지는 것.
여행은, 그렇게 좁았던 삶의 영역을 조금씩 넓혀주는 동시에, 누구나 오갔던 똑같은 장소일지라도 나만이 열 수 있는 새로운 시선의 문을 발견하게 하는 매력이 있다.
이른 아침 현관문을 나설 때마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고른다. 오늘은 어떤 멜로디가 내 하루의 OST가 되어줄까. 낯설었지만 어느덧 익숙해진, 익숙하지만 언젠가는 또 헤어져야 할 숱한 길을 앞에 두고 오늘도 그저 박자에 맞춰 뚜벅뚜벅 걸어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