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 아일랜드 여행기
학창 시절에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국어였다. 특별히 잘하지는 않았지만 수업시간에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어서 그냥 좋았다. 설렘 가득한 알퐁소 도테의 ‘별’이라든지, 묵직한 울림을 주는 윤동주나 김춘수의 시라든지, 피천득의 ‘인연’ 같은 수필을 읽다 보면 답답한 교실이 아닌 나만의 공간에서 홀로 책을 읽는 것처럼 호젓한 기분이 들곤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행문에는 별 흥미가 없었다.
'관동별곡'이나 '화전가' 같은 문학적 가치가 뛰어난 고서들을 읽을 때도 노래하는 화자의 감흥이 잘 와 닿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왜 그랬을까 곰곰 생각해보니 그것은 나의 '여행'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좋은 장소, 맛있다는 음식도 내가 직접 가보고 먹어보지 않으면 진짜 그 묘미를 알 수 없는 데다가 저마다 취향은 다른 법이라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했던 것 같다.
영화를 다 보기 전에는 스포일러나 타인의 감상평을 읽고 싶지 않은 것처럼 처음 떠나는 여행지에 대한 선입견을 갖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이 내겐 여행의 첫 준비 단계다. 인터넷에 접속하면 시시각각 전 세계를 누비고 있는 많은 이들의 여행담이 쏟아지고 손가락 하나로 사진과 동영상, 그리고 세세한 정보들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요즘이지만, 결국 내가 그 장소로 달려가야만 그곳의 바람과 햇살은 온전히 나만 느낄 수 있는 내 것이 된다. 타인이 보고 즐기고 맛보았던 것을 굳이 되풀이하기보다는 나도 몰랐던 나만의 취향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여행의 참매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낼 수 있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여행지는 늘 그 자리에 있지만 그곳을 찾는 이들의
'일생'과 '마음'은 어느 하나 같지 않다. 숱한 세월을 견디며 고유의 히스토리를 지녀온 어떤 장소와, 나라는 존재가 만났을 때 생겨날 이야기와 그 시너지는 섣불리 가늠할 수 없다. 실제로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다녀보니, 몇 년 사이 똑같은 장소에 다시 갔을 때 이전에 미처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을 새로이 발견하는 모습을 목격하곤 한다. 그사이 마음과 눈이 한 뼘 더 자란 것이다. 어느 곳에서 나 특별한 자기만의 여행담이 탄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쩌다 보니 타인의 기행문에 쉽게 공감하지 못했던 만큼, 나 스스로도 여행에 대한 글을 쓰기가 쉽지 않다는 변명을 늘어놓느라 서두가 너무 길어졌다.
가장 어려운 질문
아일랜드 가면 어디 여행 가야 해?
방문객들이 당연한 물음을 던질 때마다 어느 한 곳을 쉽게 답하지 못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고민 고민하다가 뭔가 좀 더 객관적인 근거가 필요할까 싶어서 아일랜드에 머물다 갔던 지인들에게 아일랜드 여행지 중 '베스트 5'를 추천해 달라고 문자를 보냈다.
저마다 다녀간 곳이 조금씩 다르긴 해도 두드러지는 공통점은 있으리라 내심 기대했지만 의외로 대답은 천차만별이었다. 함께 같은 곳을 여행한 가족끼리도 순위가 완전히 다른가 하면, 연령은 물론, 그날의 계절과 날씨에 따라서도 조금씩 감상평이 달랐다. 누군가는 갔던 모든 곳이 공동 1위라고, 아일랜드의 자연은 무조건 최고라고 치켜세우는가 하면, 누군가는 세련된 다른 유럽의 도시에 비해 실망한 기색을 비추기도 했다.
그렇다면 나 역시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내 맘대로, 지극히 주관적 관점에서 추천지를 나열하고 선택은 저마다의 것으로 남겨두는 것이 나을 것 같다. 2년 가까이 아일랜드에서 지내고 있는 나 조차도 미처 다 가보지 못한 구석구석이 많은데, 단기간의 여행자들에게 사진 몇 장에 감탄사 몇 마디를 얹어 어딘가를 추천하기에는 확실히 무리가 있다.
재밌는 것은 더블린에서 내 나이보다도 오래 살아온 아이리쉬라고 해도 아일랜드의 방방곡곡을 다녀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이번 휴가 때 도네갈(아일랜드 북쪽 지역)에 다녀올 거예요.”
”정말? 난 거기 한 번도 안 가봤어요. 심지어 내 동생이 사는데도 안 가봤다니까. 외국인인 당신이 아일랜드에서 나보다 다닌 곳이 더 많은 것 같아요.”
한국에 내내 살았다 해도 좋다 하는 관광지에 다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니 그의 대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짧은 기간 한국으로 여행을 와서 서울, 제주도, 부산, 경주, 강릉, 안면도를 다 돌아볼 순 없는 것처럼, 멋진 곳을 하나도 놓치지 않기보다는 단 한 곳을 가더라도 두 눈과 마음에 무언가를 담아올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모든 길이 좋았다
솔직히 아일랜드에서 가장 좋았던 여행지를 고르라면 나 역시도 선택이 어렵다. 특정 어느 장소보다는 어디론가 향하던 길,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던 길. 나를 감싸던 모든 배경이 너무 좋았다. 초행이라 이 길이 어디로 어떻게 언제까지 향해있는지 모르는 무지의 상태였기에 가면 갈수록 마치 다음 책장을 펼치듯 색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 그저 경이로웠다. 그렇게 버스나 자동차를 타고 깊은 산속 어딘가를 달릴 때면 사람의 손길이 닿을 새 없이, 거센 비바람을 그대로 버텨온 자연의 한 복판을 지나가는 우리가 하나의 작은 점처럼 느껴졌다. 마치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신의 존재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랄까.
클리프 오브 모허에서 다시 골웨이로 돌아오던 투어 버스에서 바라보던 어둑어둑한 바닷길, 코크에서 블라니 캐슬을 향해 가던 시내버스가 ㄱ자로 꺾인 나뭇가지들 사이로 어깨를 스치며 지나던 작은 오솔길. 처음 기차를 타고 벨파스트로 가던 날, 창밖으로 보이던 푸른 잔디와 그 위를 노니는 양들과 소, 그리고 빠르게 흐르는 흰구름을 보면서 어릴 적 읽었던 '빨강머리 앤'의 초록색 지붕 집이 있던 마을을 떠올린 일들도 모두 정겨운 추억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아는 유럽의 풍경은 드라마나 영화로 본 것이 전부였으니 눈 앞의 모든 것이 신기할 만도 했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날만한 좁은 산길에서 서로 마주쳤을 때 잠깐씩 한쪽 길가에 차를 바짝 붙이고 차례차례 기다려주던 건너편의 차들. 그리고 떼 지어 도로를 점령하고 있다가도 차가 나타나면 기특하게도 종종걸음으로 풀숲을 향해 달려가던 귀여운 양들. 한국의 시골 풍경과는 또 다른 정취가 느껴지는 아일랜드 길들의 정겨움을 잊을 수 없다.
안갯속의 절벽, 클리프 오브 모허
구름산 사이 호수, 링 오브 케리
여전히 마음속에서 순위를 다투고 있는 두 곳이 있다면, 클리프 오브 모허(CliffS of Moher)와 링 오브 케리(Ring of Kery)이다. 두 곳 모두 가는 길이 멀고 험한 만큼 결코 후회하지 않을 멋진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여행지에 대한 자세한 감상은 이전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다)
https://brunch.co.kr/@sumkong/14
클리프 오브 모허를 가려면 차를 렌트해서 가는 방법, 그리고 데일리 투어버스를 타고 더블린 시내에서 출발해 인근 지역을 돌아보고 다시 더블린으로 돌아오는 1일 투어 방법. 그리고 시내버스나 기차를 타고 골웨이에 가서 하루 정도 시내 관광과 숙박을 한 후, 다음날 일찍 출발하는 1일 투어 버스에 몸을 싣는 방법이 있다. 하루 만에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라면 일기예보를 잘 살펴서 비바람이 덜한 날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우리 가족 역시 날씨 탓에 두 번째만에 확 트인 절경을 감상할 수 있었는데, 비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에는 길도 미끄럽고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무척 위험하다. 실제로 해마다 그곳에서 인명사고가 종종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특히나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한다면 안전에 신경을 써야 한다.
링 오브 케리는 할 수 있다면 차를 렌트해서 2~3일 정도는 둘러봐야 할 여행 코스다. 킬라니 국립공원이 워낙 넓은 데다가 곳곳에 아름다운 풍경들이 숨어 있어서 가다가 계속 차를 세우다 보면 하루가 금세 지나가버리곤 한다. 지난해에 우리 가족은 짧은 일정과 좋지 않은 날씨 때문에 전체를 다 여행하지 못했는데, 다시 기회가 생긴다면 링 오브 케리 초입에 있는 트래킹 코스인 갭 오브 던로(Gap of Dunloe )를 비롯하여 서쪽 끝에 자리한 발렌시아 아일랜드(Valentia Island)까지 모두 훑어보고 싶다.
더블린에서 킬라니 국립공원까지는 꽤 멀기 때문에 1일 투어의 경우 더블린이 아닌, 코크 지역에서 출발하는 버스가 있다. 만일 코크에 숙소를 예약해서 인근 지역을 얼마간 여행할 계획이라면 이곳을 둘러보기 위해 하루를 할애하는 것도 좋다.
끝없는 영감이 샘솟는 곳
코크의 블라니 캐슬과 바다 마을 코브
유럽의 나라들을 여행하다 보면 꼭 가게 되는 공통적인 장소들이 있다. 오래된 성당과 궁전, 뮤지엄과 갤러리, 그리고 커다란 성(Castle)이다. 마치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의 오면 오래된 사찰과 경복궁, 국립박물관, 그리고 고택들이 있는 한옥마을을 여행하는 것과 비슷하다.
블라니 캐슬은(Blarney Castle)은 아일랜드에 온 후 처음으로 가본 성이어서 무척 인상적인 곳으로 남아있다. 물론 첫 만남이 주는 특별함도 있지만, 지금껏 몇몇 다른 성들을 다녀와보니 단지 처음이어서가 아니라 블라니 캐슬 자체가 매우 흥미로운 곳이었다.
이 성은 아일랜드 서쪽에 있는 코크(Cork)라는 지역에 있다. 코크 시내버스 터미널에서 직접 가는 버스를 타도 되고, 더블린 시티에 마련된 '블라니 캐슬 1일 투어 버스'를 이용해서 다녀오는 방법도 있다.
성 입구에서 표를 구입한 후 들어서면 널따란 정원 너머로 커다란 돌로 지어진 성이 하나 보인다. 성 자체는 그다지 웅장하지는 않지만 성을 둘러싼 정원을 함께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여행 코스가 된다. 공원 같기도 하고 숲 속 같기도 한 넓은 가든을 돌아보는 데에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만 날씨만 좋다면 피크닉 하듯 찬찬히 즐겨보는 것도 좋다.
아일랜드의 맥카시왕이 1446년에 세웠다는 이 성이 흥미로운 관광지가 된 데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사실 직접 가보면 그다지 화려하거나 대단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지는 않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100여 개의 좁고 가파른 계단을 굳이 올라가는 이유는 성 맨 꼭대기에 놓인 블라니 스톤 때문이다. 그냥 평범한 돌처럼 보이는 그곳 앞에서부터 기다란 줄이 늘어서 있는데, 한 사람씩 차례가 되면 그곳에 상주하는 직원의 도움을 받아 돌 아래 구멍으로 몸을 눕히고 돌에 입을 맞춘다. 마치 허공에 매달려 있는 듯 아찔한 포즈로 브라운 스톤에 키스를 하는 이유는 달변가가 될 수 있다는 전설 때문이다.
성의 주인인 맥카시왕이 재판에 승리하기 위해 기도하던 중 돌에 키스를 하라는 응답을 받고 마침내 달변으로 재판에 이겼다는 이야기와, 또 하나는 그 돌이 스코틀랜드의 로버트왕이 맥카시왕이 전쟁 때 군사를 지원해준 보답으로 보내준 돌 가운데 하나라는 속설이 있는데, 윈스터 처칠이 그 돌에 입을 맞춘 후 이곳이 여행객들에게 더 유명해졌다고도 한다.
아쉽게도 고소공포증에 겁쟁이인 우리 가족은 단 한 명도 블라니 스톤에 키스하지 못했다. 무섭기도 했지만 굳이 지금보다 더 말을 잘할 필요까진 없다고 서로를 위로하며 성 위에서 주변의 멋진 경관을 감상하는 데 집중했다.
코크 시내는 그저 잠시 둘러보기에 괜찮은 아기자기한 관광지다. 시내 투어가 조금 시시하다면 코크 역에서 기차를 타고 다녀올 수 있는 코브(Cobh)라는 작은 바닷가 마을로의 여행을 꼭 추천하고 싶다. 코브항은 타이타닉의 마지막 기항지이자, 감자 마름병으로 수많은 아이리쉬들이 죽은 후 살아남은 이들이 아메리칸드림을 품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던 눈물의 항구이기도 하다. 이런 슬픈 사연과는 별개로 마을 꼭대기에 자리한 오래된 성당과 바닷가 주변을 휘휘 돌며 산책하다 보면 탁 트인 경치와 예쁜 건물들의 모습이 그저 정겹기만 하다.
6만여 년 전의 흔적, 자이언츠 코즈웨이
슬픈 역사의 도시 벨파스트와 런던 데리
우리 가족이 더블린에 와서 처음으로 떠나던 여행지는 벨파스트였다. 엄연히 말하면 벨파스트는 아일랜드가 아닌 영국의 땅이다. 아일랜드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우리나라와 비슷한 부분이 참 많다. 우리보다도 더 오랜 시간 영국의 지배를 받았고 1921년에 비로소 독립을 이루었지만, 아일랜드 땅 역시 남과 북으로 나뉘어 북쪽의 일부는 영국으로, 남쪽은 아일랜드로 남아있다. 그래서 벨파스트는 북아일랜드의 수도이자 영국의 땅으로 구분하지만, 아일랜드에서 이곳을 여행하는 데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다. 기차나 버스를 이용할 때에도 따로 여권이 필요하지 않으며, 그저 돈을 사용할 때 유로가 아닌 파운드를 사용한다는 점만 명심하면 된다.
물론 도시 자체는 남쪽의 아일랜드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가톨릭교도인 아일랜드 민족주의자 구역과, 왕당파 개신교도 구역의 대조가 뚜렷한 평화의 벽(Peace Wall)을 시작으로 가는 곳마다 묘한 종교적 대립의 긴장감이 감도는가 하면, 영국의 지배 당시 독립을 위해 몸부림쳤던 아일랜드인들의 희생과 투쟁의 흔적이 여러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기도 하다. 더블린에서 벨파스트 시내를 돌아보는 1일 투어버스를 탈 수 있으며, 벨파스트 시내에서 직접 블랙캡이라는 택시투어를 이용하면, 택시 드라이버의 자세한 설명과 함께 의미 있는 장소들을 돌아볼 수도 있다.
처음 벨파스트에 갔을 때 아이들이 가장 좋아했던 장소는 타이타닉 뮤지엄이었다. 이 뮤지엄이 왜 벨파스트에 있을까 궁금했는데, 이 도시의 '할랜드 앤드 볼프(Harland and Wolff)라는 큰 조선소에서 타이타닉이 건조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뮤지엄 안에는 타이타닉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와 영상, 그리고 그 당시 벨파스트의 산업발전에 대한 자료들을 흥미롭게 관람할 수 있다.
벨파스트 역시 작은 도시가 아니기 때문에 하루 만에 돌아보기엔 쉽지 않지만, 그중에서도 꼭 가보기를 권하고 싶은 장소는 벨파스트 시내에서 한 시간 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한 자이언츠 코즈웨이(Giant's Causeway)다. 6만여 년 전의 화산으로 인해 생겨난 4천여 개의 현무암 기둥들이 거대한 조각품처럼 펼쳐진 이곳은 하늘과 바다, 산과 돌이 함께 어우러져 기대 이상의 절경을 이루어낸다. 1일 투어버스를 이용하면, 미드 <왕좌의 게임>의 배경이기도 한 다크 헤지스(Dark Hedges)를 비롯하여 몇 개의 멋진 관광코스를 함께 돌아볼 수 있다.
벨파스트에서 다시 더블린으로 내려오면서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노던 아일랜드 북쪽 끝에 위치한 런던데리(Londonderry)와 아일랜드의 북서쪽에 위치한 도네갈(Donegal)과 슬라이고(Sligo)를 휘휘 돌고 더블린으로 돌아왔다. 그중에서 런던데리는 벨파스트보다도 진한 긴장감이 감도는 도시로 기억된다. 원래의 이름은 데리(Derry)였으나 영국 식민지 시절에 런던의 길드 상인들이 데리로 넘어오고, 제임스 1세로부터 칙허장을 받은 이후부터 이름 앞에 '런던'이 붙게 되었다는, 아일랜드인의 입장에서 보면 슬픈 사연이 담긴 이름의 도시였다. 아일랜드인들은 대부분 그냥 '데리'라는 지명을 사용하기도 해서 세상에서 가장 긴 묵음(London)을 가진 명사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는데 실제로 런던데리로 향하는 길목의 표지판 가운데 '런던'이라는 단어를 지워버린 것도 종종 보였다.
도시 안으로 들어서면 건물마다 큼지막한 벽화들이 눈길을 끈다. 1971년, 아일랜드인들이 이곳에서 영국 정부의 차별에 대항하기 위해 자신들의 시민권을 주장하며 비폭력 평화행진을 벌였는데, 영국 정부에서는 이것을 폭력사태로 간주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13명이 죽고 27명이 다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이 영화로도 잘 알려진 '블러디 선데이' 사건이라는 것을 그것과 관련된 내용을 담은 여러 벽화들을 보면서 알 수 있었다.
알면 알수록 아일랜드라는 나라는 한국의 역사와 닮은 부분이 많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관심도 없었고 이렇게 한동안 살게 될지도 몰랐던 이 나라의 역사를 조금씩 들여다보며 애틋한 동질감과 인연을 느끼고 있는 현실이 가끔은 신기하다. 한국인만이 공감할 수 있는 점들이 많기 때문에 아일랜드를 제대로 여행하고 싶다면 다양한 컨셉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우면 더욱 유익하다. 역사적 배경을 공부하고 그와 관련된 장소들을 둘러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고,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루트를 짜는 것 역시 매력이 있다.
문명을 벗어난 시골마을 도네갈
예이츠의 숨결이 어린 슬라이고
런던데리를 떠나 거쳐온 도네갈과 슬라이고는 후자에 해당하는 여행지라고 볼 수 있다. 깊은 산골마을인 도네갈에 들어서면 마치 문명의 세계와 멀어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아일랜드는 원래 영어가 아닌 고유의 언어인 '게일어'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700년 가까이 영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 언어의 사용 또한 희미해졌다. 하지만 더블린 도시 곳곳을 다니다 보면 영어와 게일어를 함께 혼용하고 있는 대중교통의 안내방송과 여러 표지판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도 게일어 수업은 필수 과목일 정도로 게일어를 계속 보존하고 사용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다.
도네갈에 들어선 후 숙소를 찾아가면서 우리 가족은 혼란에 휩싸였다. 대부분의 길 표지판이 영어가 아닌 발음하기 어려운 게일어로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약한 숙소는 100년은 넘은 오래된 코티지였는데, 집주인은 A4 한 장 가득 찾아오는 길에 대한 세세한 설명을 이메일로 미리 보내온 터였다. 굳이 그것이 왜 필요할까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가다 보니 어느새 인터넷과 네비게이션이 먹통이 될 만큼 깊은 산속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알았다. 겨우겨우 찾아간 시골집 주변에는 온통 풀을 뜯는 양들이 가득했고, 앞에도 산, 뒤에도 산, 그리고 차를 타고 10분 정도 달리면 인적이 느껴지지 않는 날 것 그대로의 바다가 나타났다.
사람의 손길이 많이 닿지 않은 그런 장소들을 발견할 때면 마치 숨겨진 보물을 나만 알게 된 것 같은 희열이 느껴지기도 한다. 도네갈로 들어서던 길과, 그곳에서 슬라이고로 가기 위해 나오던 길의 모든 풍경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슬라이고는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유년시절을 보낸 지역인 만큼 그의 숨결이 어린 장소들이 많은데, 예이츠가 지은 시 '이니스프리 섬'으로 향하는 선착장과 그 앞에 서 있는 파크 성을 비롯하여 예이츠가 잠들어 있는 세인트 콜럼버스 교회 앞 묘지도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교회 주변의 수많은 무덤 가운데 예이츠의 무덤은 그 어떤 화려한 치장도 없이 아주 평범하고 수수한 모습으로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는데, 슬라이고의 다른 여행지 역시 호들갑스러운 관광지의 분위기와는 전혀 달리 조용히 숨어 있는 곳들이 많아 지도를 따라 묵묵히 찾아가는 재미가 있다. 빙하시대의 침식과정을 거치면서 마치 주름치마의 모양으로 남은 벤불벤(Benbulben) 산자락을 돌아보는 산책로와 글렌카 호수(Glencar Lake) 인근에 있는 폭포를 감상하는 것도 멋진 여행코스가 될 수 있다.
더블린 시내, 어디를 다닐까.
첫 코스는 올드 라이브러리
추천하자면 아일랜드에서 다닐 곳들이 아직도 무궁무진하지만, 그렇다고 더블린 시내 투어를 빼먹을 수는 없다. 다른 유럽의 큰 수도에 비하면 작지만 나름의 정겨운 매력이 느껴지는 더블린에도 찾아보면 다닐 곳이 많다. 취향에 따라가고 싶은 곳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더블린 시내 관광 중에 추천하고 싶은 첫 코스는, 이른 아침 트리니티 컬리지의 올드 라이브러리를 제일 먼저 다녀온 후 인근의 더블린 캐슬과 그 옆에 자리한 체스터비티 도서관, 그리고 템플바를 거쳐 리피강 인근을 휘휘 돌며 더블린 중심지의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이다.
이곳들에 대한 자세한 감상을 알고 싶다면 작년 가을에 썼던 글이 도움이 될 것이다.
https://brunch.co.kr/@sumkong/10
시간의 여유가 더 있다면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싸우던 이들이 수감되었던 킬마이넘 감옥 (Kilmainham Gaol)과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맥주의 제조과정을 볼 수 있는 기네스 스토어하우스, 위스키 뮤지엄, 자연사 박물관 등을 포함시키는 것도 괜찮다. 더블린에서도 대자연의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데, 영화 <P.S. 아이 러브 유>의 무대였던 위클로우 국립공원을 돌아보는 투어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고, 리피강 북쪽에는 사슴을 만날 수 있는 피닉스파크와 더블린 동물원이 자리하고 있다.
주름진 얼굴같은 아일랜드
다음 여행지를 기약하며
아일랜드의 동서남북을 여행하며 가장 인상적인 것은 꾸미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순수함이었다. 사람의 손길이 덜 닿을수록, '관광지’라는 유명세를 내세우지 않을수록 있는 그대로의 맑음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고 해야 할까.
기본적인 기념품점이나 예스러운 펍 몇 개 외에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상술도 거의 없고, 오히려 투박하다 싶을 정도로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서 더욱 마음이 가고 정이 갔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묵묵히 들판에서 풀을 뜯는 양들처럼, 환한 햇살 아래 주근깨를 드러내며 수수하게 웃는 순박한 시골 아이처럼, 또 거센 비바람 속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주름진 노인처럼 다양한 얼굴을 지닌 아일랜드.
지난 여행을 추억하며 햇빛과 그늘이 드리워진 그 얼굴들을 상기하다 보니 다음엔 어느 곳으로 떠나야 할지 고민이 앞선다.
어느곳이든 ’필경 나를 환대해 줄’ 바람과 비와 햇살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에 벌써부터 마음이 일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