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만끽하는 더블린의 가을 정취
더블린의 가을은 서울보다 더 성급하게 오는 듯하다. 제멋대로인 바람이 나뭇가지들을 뒤흔들고 진한 햇살이 이파리들을 비추면 어느새 마법처럼 나무의 빛깔이 바뀌어 있다. 아침에 현관문을 열고 달라져 있는 풍경 앞에 서면 준비할 틈 없이 가을이 옷깃 사이로 불쑥 들어왔음을 저절로 알게 된다.
진부한 얘기지만,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들 하지 않던가. 하지만 살면서 알게 된 것은, 독서에는 나이도 없고 계절도 없다. 그저 읽을 수 있을 때 열심히 즐겁게 읽어야 한다. 이곳에서 가장 아쉬운 것 중에 하나가 서울에서 이고 지고 살았던 많은 책들이다. 방 하나를 가득 메우고 먼지가 촘촘히 쌓였던 그 책들을 애들 키운다고, 바쁘고 피곤하다고 너무 등한시했다. 솔직히 그렇게 곁에 있으니 언제든 원할 수 있을 때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어리석게도 손에 닿을 수 있을 때는 늘 그 소중함을 모른다. 작년 여름, 이곳에 오기 위해 짐을 싸면서, 버리고 나눠주고도 당최 줄지 않는 책들을 상자에 꾸역꾸역 넣어 친척집에 보내면서도 그 많은 책들을 짐 취급했으니 말이다.
무겁고 큰 것들은 최대한 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미니멀하게 살아가야지 다짐하며 트렁크 몇 개만 가지고 더블린에 와보니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이런! 책 읽기에 너무 멋진 풍경이잖아!"
아직도 풍경 타령이나 하는 걸 보니 철이 덜 든 것이 확실하지만, 분위기 잡으며 책 한 권 펼쳐 들면 딱 좋을 만큼 더블린의 가을은 가히 매력적이었다.
막상 그 많은 책들이 손을 떠나니 손가락 사이에서 사부작 거리며 몸을 부비던 종이의 소리가 마냥 그리웠다. 가슴에 한 자 한 자 박히던 정겨운 한글 문장이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책이 읽고 싶을 때면 우선 독서용 태블릿 패드를 따땃하게 충전해야 한다. 한국에 있는 친구가 공유해준 e-book 서재와 우리 가족의 e-book 서재를 드나들며 볼만한 책을 골라본다. 가끔 한국의 도서관 사이트에서 아이들의 동화를 대여하기도 한다. 마음만 있다면 어렵지 않은 과정인데도 이상하게 패드를 꾹꾹 누르며 책장을 넘기는 일이 영 흥이 안 난다. 며칠 전 읽던 부분을 다시 찾으려고 디지털 책갈피를 뒤지는 것도 마뜩잖다. 아날로그 세대에서 디지털로 넘어온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나는 이 핑계 저 핑계로 책 주변만 빙빙 맴돌고 있는 것인지....
작년 이맘때쯤 올드 라이브러리(The Old Library)의 롱 룸(Long Room)에 처음 갔을 때가 떠오른다. 이런저런 변명 따위는 꿀꺽 삼키고 멍하니 고개만 치켜세우고 있었다. 그저 '압도되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뭔가 할 말을 찾을 수 없을 때는 압도하는 그 무엇에 그냥 나를 맡겨야 한다. 옛날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오리지널 책의 모습, 가죽과 종이와 먼지가 뒤섞인 아날로그 중에서도 아날로그적인 옛날 책들의 내음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몇백 년 전부터 책들이 품고 있던 그 냄새였다.
20만 권. 무려 20만 권이 넘는 책들이 꽂혀있는 책꽂이 하나하나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다. 살면서 언제 이렇게 많은 책에 둘러싸여 볼 수 있을까. 지금껏 빈약한 독서량에 보잘것없는 지식으로 살아왔을 지라도 나는 책을 사랑했노라고,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할 거라고 허영심에 찬 고백을 늘어놓고만 싶어 지는 그런 곳이다.
그동안 한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더블린으로 여행 온 여러 지인들을 맞이할 때마다 관광지로 어느 곳을 안내해야 할까 고민이 되곤 했다. 아직 나도 더블린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일정과 취향에 맞게 괜찮은 장소를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이 항상 굴뚝같다. 나처럼 저이도 아일랜드라는 나라와 더블린이라는 도시에 반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샘솟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많은 유럽의 도시 가운데 일부러 더블린을 콕 집어 여행 오는 한국 사람은 많지 않은 편이다. 잘 모르기도 하지만, 갤러리나 뮤지엄, 건축 등을 보고 싶다면 런던과 파리, 암스테르담이나 로마, 바르셀로나가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다. 그래도 더블린에 할애할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있다면 더블린뿐만 아니라 인근의 다른 지역을 돌면서 '진짜 아일랜드'를 느껴보라고 권하고 싶다. 더블린에서도 오밀조밀 복잡한 시티센터만 훑지 말고 한적한 주택가나 탁 트인 공원에서 멍 때리며 이곳만의 바람을 느껴보라고 얘기해주고도 싶다.
취향 따라 추천하고픈 곳이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올드 라이브러리는 누구든 꼭 한번 가보라고 등을 떠밀고 싶은 장소다. 특히나 요즘처럼 센티해지는 가을에는 온몸의 감각세포를 일깨워줄 공간으로 손색이 없다.
이 도서관은 트리니티 컬리지(Trinity College) 안에 있다. 트리니티 컬리지는 아일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 1592년. 그러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 해에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설립한 대학인 것이다.
아일랜드는 700여 년 간 잉글랜드의 통치를 받았던, 우리나라와 비슷한 히스토리가 있는데, 이 학교 역시 그 당시에 지어졌으며 19세기 종탑을 비롯해 학교 곳곳에 유서 깊은 건물과 조형물, 광장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 학교에서 배출된 물리학, 평화학, 문학 등 여러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가 31명이라는 것도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고도를 기다리며>의 사무엘 베케트를 비롯하여 <걸리버 여행기>의 조나단 스위프트,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동화 <행복한 왕자>의 저자인 오스카 와일드, 시인이자 극작각, 소설가인 올리버 골드스미스 등도 이 학교 출신이다.
그중에서도 트리니티 컬리지가 소장한 가장 의미 있는 작품이 있다면 바로 '켈스의 서(The Book of Kells)'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이 책은 제작된 시기와 배경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현재는 약 800년쯤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지는 라틴어 성경이다. 네 가지의 복음서와 예수의 생애를 비롯한 몇몇 텍스트가 담겨 있는데, 단순히 오래된 책으로서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 가치에 대한 찬사가 대단하다.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쓰인 아름다운 필체와 글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신비로운 그림, 그리고 끊임없이 꼬이고 이어지는 독특한 문양들과 다양한 색감이 오묘하게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만드는데 들어간 송아지 가죽이 185마리의 양이라고 하니, 가늠할 수 없는 일련의 시간과 숙련된 손길들이 어렴풋 느껴지는 듯하다. 실제로 책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천 년보다 더 오래전에 어떻게 이토록 세심한 작업을 할 수 있었을까,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다. 혹자는 "인간이 아닌, 천사가 한 일"이라고도 했다는 이 작품은 트리니티만의 자랑을 넘어서 아일랜드의 귀한 보물이며, 서양에서 제작된 가장 빼어난 필사본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이 책이 놓인 장소가 바로 올드 라이브러리이다.
1층에는 '켈스의 서'가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롱 룸'이 자리한 올드 라이브러리 앞에는 항상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매년 50만 명 정도가 방문을 한다니 더블린의 유명 관광지 가운데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1층에서 신비로운 책들을 감상한 후 계단을 올라가면 드디어 유럽에서 가장 긴 65m 길이의 도서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내 생각이지만, 높은 천장의 모습이 마치 책의 등부분을 연상시키는 이 곳은 영화 '해리포터'의 촬영 장소로 더욱 유명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공간에 들어서면 모험 가득한 판타지보다는 품격 있는 중세의 시대물에 들어온 것 같은 고풍스러움이 온몸을 휘감는다. 역사적 인물의 얼굴 조각상이 일렬로 늘어서 있고, 책장마다 각 분야별로, 제목의 첫 알파벳 순서로 세세하게 구분해 놓은 것도 눈길을 끈다. 2층의 천장까지 빽빽하게 꽂힌 책들이 창가로 스며들어온 햇빛에 은은하게 자태를 드러내는 것을 보니, 한 권 한 권 얼마나 정갈하게 관리가 되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일반인들은 실제로 이 책들을 빌릴 수는 없지만 관련 분야의 연구자들과 복원작업에 참여하는 이들의 손길을 꾸준히 거치고 있다고 한다.
올드 라이브러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줄을 서서 입장권을 사야 하는데, 남편 덕에 나는 더블린에 있는 1년 동안 세 번이나 이곳에 다녀올 수 있었다. 트리니티에서 공부를 하는 학생들에 한해서는 세 명까지 무료로 먼저 입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지인이 올 때마다 시간이 되면 함께 찾아가곤 했는데, 많은 사람을 벗어나 여유롭게 감상하고 싶다면 되도록 주말을 피해 평일 아침에 들르는 것이 좋다. 언젠가 사람이 별로 없는 날에 가게 되면 반나절 내내 앉아서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 머무는 것이 나의 작은 소망이다. 별다른 시간제한은 없으니 언제고 시도해볼 만한 일이다.
날씨가 좋다면 트리니티 컬리지 캠퍼스를 휘휘 돌아 가을 풍경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더 시간이 난다면 걸어서 10분 이내의 거리에 자리한 더블린 성(Dublin Castle)으로 발길을 옮겨보면 어떨까. 더블린 성은 13세기 무렵의 성 내부를 자세한 설명과 함께 돌아볼 수 있는 장소이다.
아직까지 나는 성 안에 들어가 보지 않았다. 내가 이곳에 가는 진짜 이유는 성 뒤편의 근사한 정원과 광장을 지나면 나오는 체스터 비티 도서관(Chest Beatty Library) 때문이다. 이름은 도서관이지만 실상은 ‘올해의 유럽 박물관’으로 선정된 바 있는 아일랜드에서도 유명한 명소이다.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유교, 도교, 시크교 등 다양한 종교를 아우르는 전시물과 오래된 코란의 필사본, 두루마리, 성경 파피루스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여러 나라와 종교의 색깔이 고스란히 담긴 그림과 텍스트, 물품들도 볼 수 있다. 시대, 지역, 종교에 따라 특색 있게 제작된 책과 작품들을 비교해 보는 풍성한 즐거움은 물론, 무엇보다 관람료가 무료라는 것이 매력적이다.
체스터 비티 도서관과 더블린 성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가면 IMMA(Irish Museum of Modern Art)라는 현대 미술관에 도착할 수 있다. 이곳 역시 지극히 나의 개인적 취향이 반영된 공간이다. 시기별로 조금씩 바뀌는 현대적인 상설전시물을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전시장을 나와 뒷문으로 돌아가면 시원하게 펼쳐진 나무와 잔디가 기다리고 있다. 날씨만 좋다면 도시락을 싸와 피크닉을 즐겨도 좋을 장소다. 건물 뒤편으로는 아주 깔끔하게 관리된 넓은 정원과 분수가 미로처럼 꾸며져 있다. 사람이 많지 않은 평일 한낮에 가면 마치 학교나 회사를 하루 건너뛰고 온듯한 묘한 쾌감이 느껴져서 특별히 내가 좋아하는 장소이다. 시티센터에서 IMMA로 가는 길목에는 아일랜드가 자랑하는 맥주 ‘기네스 공장’도 자리하고 있는데, 취향에 따라오고 가는 길에 들러도 좋고, 미술관이 영 내키지 않는다면 바로 기네스로 행로를 바꿔 시원하게 한 잔 즐기는 것도 좋은 생각이다.
미술관에 대한 한 가지 정보를 덧붙이자면, 더블린 시내에도 내셔널 갤러리가 있지만, 런던 내셔널 갤러리를 이미 경험했다면 그냥 마음을 비우고 머리를 식힌다는 소박한 마음으로 잠시 시간을 내어 들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도 때에 따라 괜찮은 기획전시가 열리기도 하니, 전시정보를 체크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더블린 작가 박물관(Dublin Writers Museum)은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나의 방문 리스트에 항상 담겨있는 곳이다. <율리시스>, <더블린 사람들>을 집필한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작가 제임스 조이스와 사무엘 베케트, 오스카 와일드,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등의 책과 편지, 소장품과 초상화 등을 통해 아일랜드 문학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는 이곳에서는 그야말로 작가들의 숨결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곳에서 버스나 열차를 타고 던니어리(Dún Laoghaire)라는 곳에 가면 제임스 조이스 타워 & 뮤지엄(James Joyce Tower & Museum)이 나오는데 그의 소설 <율리시스>의 배경이 된 방과 아름다운 해안가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한국에 있을 때 너무 두껍고 난해해서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을 다 읽지 못했던 것이 때때로 후회가 되는 요즘이다. 더블린으로 날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오래된 흑백영화로 <율리시스>를 본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물론 영화로 봐도 난해하고 지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일랜드에서는 블룸즈 데이(Bloomsday)라고 해서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04년 6월 16일을 기억하여, 그날 전후로 제임스 조이스를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를 갖는다고 한다. 이날의 이름은 소설의 주인공인 ‘블룸’에서 가져왔다. 제임스 조이스를 추억하는 이 행사에 아직 참여해보지는 못했지만, 더블린에서 지내는 동안 그의 작품을 좀 더 제대로 읽고 그를 기념하는 장소에 꼭 가보는 것 역시 내게 주어진 숙제 가운데 하나이다.
생각해보니, 창피하게도 더블린에 와서 돈 주고 산 종이책이라고는 벼룩시장에서 발견한 1유로짜리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집이 유일하다. 하룻밤만에 소설 한 권을 뚝딱 읽어버릴 수도 있지만, 시 한 편을 음미하는데 한 평생이 걸리기도 하는 게 문학에 깃든 매력이 아니던가.
태풍 오펠리아가 휩쓸고 간 더블린의 가을 속에서 예이츠의 짧고도 긴 시 한 편을 펼쳐본다.
시간의 지혜
이파리는 많아도 뿌리는 하나
거짓으로 보낸 젊음의 나날 동안
햇빛 속에서 잎과 꽃을 흔들었지만
이젠 나는 시들어 진실을 찾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