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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콩 Jul 04. 2020

마지막일 수도 있는 반짝이는 기억들

아빠와 함께했던 그 여름을 추억하며

며칠 전 남편이 갑자기 많이 아팠다.

토요일이었던 그날은, 늦은 아침에 일어나 냉장고에 보관해놓은 햄버거용 고기를 꺼내 굽고, 치즈, 양상추, 계란, 버섯, 양파를 손질해서 아이들과 각자 원하는 홈 메이드 햄버거를 만들었다. 주말이면 으레 그랬듯 우리 가족은 아점으로 햄버거를 먹으며 아이들이 좋아하는 한국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하하호호 웃는 여유를 만끽했다. 시끄럽던 점심 식사가 끝나자 아이들은 각자 방으로 들어가고 남편은 홀로 테이블에 앉아 일주일 안에 제출해야 하는 논문의 마무리 작업에 다시 매진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두 시간쯤 지났을까, 그가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 아프다며 두통약을 찾기 시작했다. 신경을 많이 쓰는 날이면 가끔씩 찾아오는 두통이라 평소처럼 약 먹으면 괜찮거니 했는데, 전과 다르게 통증이 더 심해진다며 소파에 주저앉아 버렸다. 약기운이 돌기를 기다리며 얼마 동안 숨을 고르던 그는 오히려 너무 어지럽다며 이번에는 침대에 가서 누워버렸다. 그러더니 이따금씩 속이 메스껍다고 구역질을 하다가 다시 눕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온몸이 식은땀에 젖은 남편의 모습에 나는 점점 겁이 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원인이 뭘까, 요즘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스트레스가 많아 두통이 심하게 온 걸까? 아니면 낮에 햄버거를 먹고 급하게 체한 걸까? 혹시 뇌졸중 같은 심한 병의 전조 증상이면 어떡하지? 남편의 손을 주무르고 등을 쓸어 주며 나라도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를 썼지만, 안절부절 어쩌지 못하는 마음은 불안함에 요동치고 있었다.

꽤 시간이 지나도 증상이 그다지 나아지지 않자, 잠깐 정신을 차린 남편은 혹시 모르니 구급차를 부를 수 있는 번호를 체크하고 서랍에 넣어둔 보험증서를 찾아 놓으라고 힘겹게 말했다. 마침 토요일 오후라 문을 연 동네 병원은 없을 터였고, 우리는 자동차도 없으니 여차하면 구급차라도 불러 큰 병원 응급실로 가야 했다.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해질 것에 대비해 나라도 정신을 꼭 붙들어야겠다고 맘을 단단히 먹었다.


그때, 우리 집 근처에 사는 가까운 한국 엄마가 문득 생각났다. 남편이 의사이고 그녀도 간호사였다고 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급히 전화를 걸어 차분하게 남편의 상황을 전했다. 그녀는 우선 혈압을 재보라고 말했다. 처음 두통이 시작되던 낮에도 비교적 높지 않았던 혈압은 다시 재어도 정상이었다. 다행히 뇌졸중과는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는 말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 정말로 급히 체했거나, 아니면 이석증일 수도 있다는 그녀의 얘기를 듣고 보니 어쩌면 더블린에 온 후 가끔씩 찾아오던 이석증이 심하게 재발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석증은 귀 안에 있는 아주 작은 '이석'이라는 돌이 원래 자리가 아닌 곳에 들어가서 생기는 병인데,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심한 어지럼증이 오면 일상생활이 거의 불가능할 만큼 불편하다. 아일랜드에 온 후로 남편과 나는 바뀐 환경 때문인지, 면역력이 떨어져서인지 둘 다 이 증상을 몇 번 경험했었다.

구급차를 불러서 응급실에 가더라도 오래 기다려야 할지 모르지만, 혹시 다른 병의 증상일 수도 있으니 시간이 지나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으면 병원에 꼭 가는 것이 좋겠다는 고마운 조언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방에 들어온 딸아이가 난리통인 엄마, 아빠를 보며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아빠 많이 아픈 거야? 병원에 가는 거야? 그럼, 나랑 오빠는 어떡해! 나 무서워!”

“걱정마, 아직 병원에는 안 갈 거고, 가더라도 너희 둘만 두지는 않을 거야. 부탁할 분들 많으니까 울지 마.”


문밖에서 아이를 겨우 다독이고 나서 다시 방으로 들어와 보니 강한 진통제의 효과가 그제야 조금씩 나타나는지 남편은 살짝 선잠이 들어 있었다. 조금 안심은 되었지만 깨어나면 다시 증상이 반복될까 봐 여전히 불안했다. 침대 옆에 털썩 주저앉은 나는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남편의 보험증서를 꺼내어 처음으로 차근차근 읽어보았다.

아일랜드에서 비자를 받으려면 보험가입이 필수이기 때문에 학교에서 제공하는 보험 중 가장 저렴한 것으로 들어놓은 상품이었다. 아일랜드의 의료 시스템이 한국과는 달리 워낙 불편하고 병원료도 비싼 편이라,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되도록 아플 일을 만들지 말자는 욕심과 바람으로 버텨온 우리는 4년 동안 한두 번 밖에 병원에 가지 않았다. 어쩌면 너무 안일하게도 응급실에 갈 상황이 생길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았던지 보험 혜택조차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그저 구색을 맞추려고 들어 놓은 것이었지만, 다행히 응급상황에 대한 커버는 어느 정도 가능한 듯했다.

응급실에 가게 되면 누구에게 아이들을 맡겨야 할까, 당장 병원에서 이런저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일어날 거라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만 어쩌면 일어날 수도 있는 일들을 고민하며 한참을 있다 보니 어느새 밖은 깜깜해져 있었다. 그사이 정말 감사하게도 남편의 두통과 어지럼증은 잠잠해진 듯했다. 오후 내내 온갖 상상에 괴로웠던 나도 그제야 안심하고 잠이 들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전날보다 많이 나아졌다며 죽 한 그릇을 비우는 그를 보니 조금 마음이 놓였다. 아마도 이석증과 스트레스가 몰려와 두통이 더욱 심했던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 우리는 앞으로 조금이라도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미리 휴식을 취하면서 조심하자고 서로를 다독였다.

솔직히 남편의 밝아진 얼굴을 마주하며 조금 많이 미안했다. 지옥과 천국을 오가던 지난밤에 나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최악의 상황까지 떠올리며 수많은 상상과 걱정을 했었던 것이다.


'저대로 정신이라도 잃으면 어떡하나, 그러다 깨어나지 못하면, 더 나쁜 상황이 생기면 무얼 어떡해야 하지? 우리가 먹었던 햄버거가 설마 함께 나눈 마지막 식사가 되는 건 아니겠지, 우리가 웃으며 보았던 예능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코미디 프로로 기억에 남으면 어쩌지, 우리가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가 무엇이었지? 이렇게 모든 것이 마지막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마음속으로 온갖 슬픈 비극의 서사를 다 끌어오면서 그 밤, 아주 절실히 나의 엄마를 떠올렸다.




나에게는 예고 없이 찾아오는 불행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내가 중학생이었던 어느 날, 집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날따라 나는 평소와 달리 초저녁부터 잠이 들었고 전화소리에 이어, 전화를 받고 심각하게 무슨 얘기인가를 주고받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말소리에 잠에서 깼다. 두 분은 언니와 내게 자세한 내용을 얘기하시지 않았지만 아빠가 갑자기 쓰러져서 병원에 가셨다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 당시 아빠는 직장이 울산에 있어서 엄마와 남동생과 함께 셋이서 울산에서 지내고 있었고, 나와 언니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서울에서 살던 때였다. 울산은 너무 멀어서 언니와 나는 당장 병원으로 달려갈 수도 없었고, 두려운 마음에 아빠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자세히 물어볼 용기조차 없었다.


그 후로 며칠이 지났을까, 학교에서 조퇴를 한 언니와 나는 할아버지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 추운 겨울이었고, 너무 많이 차를 갈아타느라 하루 종일 멀미를 했고, 속이 빈 채로 늦은 밤이 되어서야 도착한 곳은 부산의 어느 대학병원이었다는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뇌출혈로 쓰러지셨던 아빠는 처음에는 울산의 어느 병원에 있다가 그사이 부산의  큰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여전히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아마도 중환자실이었던 것 같은 차갑고 낯선 공간에 수많은 줄에 연결된 채 누워 있는 아빠의 모습이 나는 너무나도 무서웠다. 눈물이 나도록 안쓰러운 것은 오히려 그사이 너무 많이 늙어버린 엄마였다.


그 후로 아빠는 여러 병원을 옮기며 몇 번의 수술을 받았고 마침내 서울의 어느 병원에서 받은 마지막 수술 끝에 의식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아빠와 정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기까지 몇 달의 시간이 흘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아빠는 거의 외국에서 일하시느라 자주 볼 수 없었고, 내가 6학년 때쯤 겨우 한국에 정착하게 된 후에는 직장 때문에 울산으로 내려가셨다. 대학 대학입시를 앞둔 고등학생인 언니와 중학생인 나를 남겨둔 채 엄마와 남동생만 아빠를 따라간다고 했을 때 나는 말할 수 없이 서운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엄마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입시를 앞둔 우리를 지방으로 데려갈 수는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이제 한국에 정착하신 아빠를 또 혼자 지내게 할 수도 없고, 엄마 역시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낸 아빠와 얼마나 함께 있고 싶으셨을까. 할머니, 할아버지의 짐을 덜어드리기 위해 아직 초등학생이던 남동생만이라도 데리고 내려가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결정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언니와 나는 학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많은 즐거움을 철없이 함께 누렸다. 보고 싶은 영화들을 비디오로 빌려와서 실컷 보고, 음악을 듣고 콘서트를 따라다니고 읽고 싶은 소설이나 만화도 맘대로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대신 우리는 아빠와의 추억을 놓쳤다. 아주 어릴 적부터 낯설기만 했던 아빠와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을 가질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다.

 

아빠가 쓰러지시기 전, 그 해 여름에 나는 울산으로 내려가 방학을 보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 아빠와 함께 바다로 여행을 갔고 낮은 평상이 놓인 허름한 횟집에서 생전 처음 바다를 보며 회를 먹었다. 아빠가 가르쳐주는 대로 초고추장과 간장에 번갈아 찍어 먹는 회는 편식이 심했던 내 입맛에도 아주 고소하고 쫄깃했다.

나는 처음 회를 맛보았던 그날의 기억을 한 서른 번은 넘게 남편에게 얘기한 것 같다. 들을 때마다 남편은 얼마나 장인어른과 함께한 추억이 없으면 똑같은 얘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냐며 안쓰러워하곤 했다.

아빠가 운전하는 차를 오랜 시간 타고 다니면서, 나는 아빠가 방지턱도 느끼지 못할 만큼 그 누구보다도 편안하고 안전하게 운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고, 남동생에게는 엄하지만 딸인 나에게는 운전 매너만큼 한없이 부드러운 사람이라는 것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엄마, 아빠와 함께 보낸 그 해 여름은 모든 것이 특별했다. 새로 장만한 살림들이 가득한 집에서 지내고 있는 세 식구는 뽀송뽀송해 보였고 나는 마치 손님처럼 쭈뼛거리며 집안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렸다.

낯선 집에서 느낀 그 계절의 뜨거운 열기와 창문 사이로 넘어오던 햇살의 밝기까지 나는 전부 다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몇 달만에 울산 사투리가 입에 배어버린 동생이 신기해서 말할 때마다 피식피식 웃었고, 낮에는 혼자서 처음 가본 동네의 골목길을 천천히 걷기도 했다. 때마침 발견한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 보았던 영화 <칼라 퍼플>은 지금도 내게 가장 슬프고도 서러운 영화로 남아있다.


언젠가 엄마와 그 해 여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엄마는 생각해보면 참 신기하다고 했다. 울산에서 아빠와 지낸 1년 동안 두 사람은 결혼 후 한 번도 제대로 공유하지 못했던 둘만의 일상을 함께 나눌 수 있었고, 아빠는 엄마를 데리고 이곳저곳 부지런히 여행도 다녔다고 했다. 한참을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아빠는 마치 쓰러질 것을 알았던 사람처럼 최선을 다해 엄마와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엄마는 말했다.

수술 후 다행히 아빠는 큰 고비를 넘기셨고, 병상에 누워있던 긴 시간을 제외한 그 이전까지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는 혼자의 힘으로 걷거나 운전을 할 수 없었고 자유롭게 훨훨 여행을 다닐 수도 없었다. 그렇게 그 해 여름은 아빠와 함께한 것들 앞에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붙여준 아련한 시간으로 남아버렸다.




아픈 남편을 옆에 두고 구급차를 불러야 하나 망설이던 지난밤에 나는 엄마의 '마지막'을 떠올려보았다. 지금 나의 남편과 비슷한 나이에 갑작스레 쓰러진 아빠를 병원으로 옮기며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날 그들이 마지막으로 함께했던 식사는 무엇이었을까. 무슨 얘기를 나누었고 무엇 때문에 웃었고 무엇 때문에 싸웠을까. 그날 이후로 엄마의 가슴에 후회로 남은 것들이 아직도 쌓여있지는 않을까.

그때는 내가 멀리 있고 너무 어려서 미처 살피지 못했지만, 이렇게 커버린 후에도 왜 그날 이후로 엄마가 잃어버린 수많은 것들에 대해 깊이 들여다볼 생각을 못했는지 뒤늦은 회한이 밀려왔다. 이제는 엄마와의 많은 것들이 마지막이 되기 전에 그 얘기를 꼭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그 밤 내내 마음이 더욱 초조했다.


더블린에 온 후로 한국에 있는 여러 사람들을 잃었다. 이미 연세도 많으시고 병환 중이신 분들은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이곳에 오기 전에 한국에서 눈물의 인사를 나누기도 했지만, 미처 헤어질 거라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갑작스레 사고나 중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한동안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지막 모습을 직접 보지도 못한 채 속절없이 우리만의 작별인사를 고한 밤이면 남편과 앉아 밤새도록 그 사람과의 추억들을 되새겼다. 그들과 함께 먹었던 음식과 주고받은 이야기. 고마운 선물과 잊지 못할 기억 같은 것들로 이야기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누군가와의 '마지막'이 언제가 될지 미리 알 도리는 없지만, 생각해보면 헤어지기 바로 직전에 나눈 것들이 그 사람과의 마지막인 것만은 아니었다.

어떤 추억은 아주 오래되고 낡았지만 마치 그 사람과의 전부인 것처럼, 그래서 마지막인 것처럼 각인되는 것들도 있다.

10년 전,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임종예배를 드리던 날, 우리 가족들은 차례로 아빠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가만히 눈을 감고 누워계신 아빠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긴 시간을 힘겹게 곁에서 버텨주셔서 감사하다는 말도, 다정한 딸이 되어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도 차마 하지 못했다.

굳이 마지막 인사를 전하지 않아도 아빠의 기억 속에는 살면서 내가 그에게 했던 많은 말과 행동들 중 무언가가 각인되어 남았을 테고, 이제 와서 땅을 치고 후회해도 지난 시간의 나를 돌이킬 수는 없다는 현실이 그저 아플 뿐이었다. 그래도 내게는 한없이 부드럽고 자상했던 그 여름의 아빠가 마지막 기억으로 여전히 남아있으니 적어도 나는 그에게 참 고마운 선물을 받은 셈이다.


살면서 우리가 나누는 사소한 모든 것들이 서로에 대한 마지막으로 남을 수 있다. 시간이라는 건 내가 살아있는 동안 절대 멈추지 않을 테고, 그렇게 흐르고 흐르다가 어제와 내일 사이, 혹은 점심과 저녁 사이에 나의 마지막 순간이 찾아와도 어쩌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갑작스러운 불행에 대한 나의 오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법은 늘 마지막일 수 있다는 마음으로 씩씩하게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항상 죽음의 그림자를 벗 삼아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면 조금 무섭고 오싹한 기분이 들 수도 있지만 조금 더 넓게 보면 그렇게 슬픈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내가 하는 이야기와 상대가 내게 전하는 메시지들이 때로 유언처럼 남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매 순간순간이 소중해서 반짝반짝 빛이 나지 않을까.

그렇게 담아놓은 빛의 기억을 안고 언젠가 서로를 떠나보낼 수 있다면 그때는 슬프더라도 감사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느새 더블린에도 짙푸른 여름이 와있다. 불행의 고비를 무사히 넘겼으니, 아빠가 함께했던 그 여름의 햇살처럼, 환하게 빛나는 일상의 조각들을  많이 나누며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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