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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콩 Dec 13. 2019

엄마 혼자 여행 좀 다녀올게!

내겐 너무 필요했던 8년 만의 외출

"얘들아, 엄마 혼자 런던에 다녀올게."

"왜? 언제? 엄마 혼자만?"
눈이 동그래진 아이들이 연달아 질문을 쏟아냈다.
마치 집 앞 마트에 잠시 다녀오는 것처럼 최대한 자연스레 이 말을 흘렸지만 실은 꽤 오랜 시간 고민한 후 내린 결정이었다.

몇 달 전쯤 한국에 살고 있는 S로부터 연락이 왔다. 곧 고등학생이 되는 딸아이와 암스테르담과 런던으로 둘만의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데, 혹시 두 도시 중 한 곳에서 만날 수 있겠냐고.

S와 나 모두 두 아이를 키우는 전업주부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터라, 그렇게 집을 며칠 비우고 훌쩍 나가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서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조심스러우면서도 솔깃한 그 제안은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고, 현실과 상관없이 이미 내 마음은 런던 어느 거리를 쏘다니고 있었다.

서울의 어느 카페도 아니고, 내가 사는 더블린도 아니고, 런던이라는 외딴곳에서 만날 약속을 잡고 있는 이 신기한 상황이 가능한 이유는 작년 여름 스치듯 잠깐 지나쳤던 우리의 아쉬운 만남 덕분이다.

아일랜드에 살면서 좋은 점 중 한 가지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을 생각보다 쉽게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 살 때는 '4인 가족의 유럽여행’ 계획은 꿈같은 일이었다. 어마어마한 항공료부터 숙소 예약, 긴 휴가 등 모든 여건을 딱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섬나라 영국 옆에 자리한 또 작은 섬나라 아일랜드에 와보니 비행기로 두세 시간이면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벨기에 등의 나라로 날아갈 수 있었다! 더군다나 미리 부지런을 떨면 매우 저렴한 저가항공의 티켓도 구할 수 있으니, 아일랜드에 사는 동안에는 다른 어떤 것을 포기하더라도 주변의 나라들을 여행하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고 나와 남편은 생각해왔다.


지난해 여름, 친정 엄마와 언니, 조카가 우리 가족을 만나러 더블린에 왔을 때 먼 유럽까지 온 김에 다 같이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여행을 다녀오는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우리와 비슷한 코스로 친정엄마와 여행을 준비하던 S는 내 소식을 알고 연락을 해왔다.

내가 한국을 떠난 후 2년이 넘도록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해 그리움이 익을 대로 익은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든 여행 중 만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지만 이미 각자의 비행기표와 숙소를 다 예약해놓은 후라 시간과 장소를 딱 맞추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결국 나의 여행 마지막 날, 공항으로 가기 전 뮌헨의 기차역에 잠깐 들렀을 때 인근 숙소에 머물고 있던 S와 극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그나마도 비행기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30분이었고, 복잡한 기차역 안에 자리한 스타벅스 한 구석에서 반가운 안부와 아쉬운 작별이 뒤엉킨 정신없는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헤어졌다.

복잡한 뮌헨 기차역 어느 구석에선가 우리는 스치듯 만났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이번에는 그녀와 제대로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니 어떻게든 잡고 싶었다. 하지만 무작정 가겠다고 말부터 꺼내기에는 걸리는 것이 많았다. 매일 아침 두 아이의 도시락을 싸는 것을 시작으로 학교에 보내고 집으로 데려오고 저녁을 먹이는 일을 사흘간 남편이 도맡아야 하는데, 잠자는 시간을 빼고 하루 온종일을 논문에만 매달리느라 눈이 퀭한 남편에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혼자 날짜를 정해놓고 괜찮은 비행기 티켓이 있는지, 런던의 어느 공항으로 가는 것이 더 저렴한지 몇 날 며칠을 몰래 알아보면서, 그사이 혹여 아이들 학교나 남편의 학교에 무슨 특별한 스케줄이 겹치지는 않는지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본격적으로 육아를 시작한 후부터는 모든 일의 우선순위를 아이들과 남편 위주로 배열하는 것에 익숙해지다 보니 하루나 반나절도 아니고, 2박 3일이라는 시간을 온전히 나만을 위해 계획한다는 것이 무척 어색했다. 결국 마음을 정하고 남편에게 얘기하자 다행히 흔쾌히 동의를 해주었고, 마침내 이번에는 아이들에게 털어놓을 차례였다.


"여차저차 해서 어쨌든 엄마는 친구를 만나러 런던에 다녀올 거야. 너희들도 잘 지낼 수 있지?"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 당황하는 듯하다가, 이참에 아빠랑 오랜만에 함께 잘 수 있겠다고 좋아하는 딸아이와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며 웃어넘기는 아들 녀석의 반응에 괜히 나 혼자만 소심하게 맘을 졸인 것 같아 오히려 억울했다.

어쨌든 막상 가기로 결정을 하고 나니 혼자 비행기를 타는 것도 처음이고 길치에 방향치라 어디 여행을 가도 남편만 의지해 돌아다녔던 답답한 나 자신이 비로소 보였다. 공항에 내려 시내로 들어가고 숙소를 찾아가는 것 모두 아주 오랜만에 주어진 새로운 미션이었다.


"나 얼마 만에 혼자 여행 가는 거지?"

며칠 동안의 이런저런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공항으로 나서던 날, 현관문 앞에서 배웅하는 남편에게 뜬금없이 물어보았다.

"글쎄, 몇 번 가지 않았나?"

둘 다 동작을 멈추고 눈동자를 치켜세운 채 지난 시간들을 더듬어보았다. 시간을 거스르고 거슬러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기억, 그러다 마침내 남편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맞다. 콩이 낳고 얼마 후에 혼자 태백에 다녀온 적 있잖아."

"뭐야! 8년도 더 됐잖아!"

그나마 그것은 여행이라기보다는, 둘째를 낳고 산후 우울증으로 괴로워하다가 때마침 주어진 남편의 휴가에 맞춰 산속에 자리한 수도원으로 훌쩍 다녀왔던 일종의 도피였다. 둘째가 너무 어려서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시누이가 도와준 덕에 마음 놓고 사흘간의 해방감을 맛보았었다.

“앞으로 이렇게 종종 혼자 다녀와”

 그것이 나의 마지막 여행이었다는 것이 새삼 미안했는지 남편은 문 밖을 나서는 내 등을 토닥였다.


물론 알고 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며 사는 동안, 남편이나 나나 혼자만의 여행을 감행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는 것을. 둘 다 한 발은 아이들이 있는 집 안에, 한 발은 일이 있는 집 밖에 두고 콤파스처럼 뱅뱅 돌면서 나름 공동육아의 보조를 맞추며 십오 년을 살아온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여행을 비롯한 대부분의 일상을 네 식구가 세트처럼 함께 공유하다 보니 언제부턴가 나는 한 발이 아니라 두발 모두 집안에 묶인 것 같았다. 매일 목에 줄을 달아 말뚝에 묶어두는 것이 습관이 된 낙타는 줄을 풀어놔도 그것을 모르고 밤새 그 옆에서 가만히 머문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낙타가 마치 내 모습이었다는 것을 집 밖으로 혼자 나온 후에야 알 수 있었다.




더블린 공항에서 점심을 먹고, 런던에서 S와 저녁을 먹을 수 있다니! 모든 것이 꿈만 같아 공항 안을 누비는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비행기는 별 탈 없이 날아올라 1시간 20분 만에 런던에 도착했고, 미리 예약해 둔 기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향했다. 영국에도 왔겠다, 핸드폰에 Mamas Gun의 음악을 플레이리스트에 잔뜩 넣어놓고 이어폰으로 들으며 걷다 보니 발이 둥둥 떠있는 듯했다. 늘 여행을 오면 어깨에는 큰 배낭, 한 손에는 커다란 트렁크, 한 손에는 두 아이 중 한 명의 손을 잡고 이곳저곳을 끌고 다니기 바빴는데, 작은 배낭 하나에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거리를 누비고 있다는 것이 실감이 안 났다.

마침 퇴근시간이라 붐비는 지하철 역에서 잠깐 헤매다가 드디어 숙소 근처의 마켓에서 저녁 장을 보고 있는 S를 만났다. 짧은 쇼트커트에 마른 몸매가 여전한 그녀 곁에는 맑은 미소가 엄마를 똑 닮은 열다섯 소녀가 함께 서 있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본 후 두 번째 만남인데도 여전히 아가적 모습이 그대로였다.


S는 흔한 학교 동창이나 동네 친구가 아닌, 그 어렵다는 사회생활을 통해 만난 친구였다. 우리는 같은 회사도 아니었고 그저 같은 업계에서 한 달에 한두 번 업무상 만나는 매우 사무적인 사이였다. 때에 따라 서로 갑과 을의 위치가 바뀌곤 하는 묘한 관계였지만 정기적으로 얼굴을 보다 보니 둘 다 낯을 가리는 성격인데도 조금씩 친밀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나와 S를 포함해 몇몇 사람들과 함께 아귀찜을 먹으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날따라 일과 상관없이 대화가 술술 풀리는 것이 마치 오래된 친구와 함께 있는 것처럼 편안했다. 둘 다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도 정작 서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조차 소통할 일이 없었는데, 알고 보니 아귀찜 말고도 음악, 영화, 책 등 우리는 취향이 비슷한 것들이 많았다.

그렇게 이어지게 된 인연은 직장을 옮기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후에도 계속 유지됐다. 각자 육아에 정신없이 몰입하던 몇 년 간은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았지만,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고 조금씩 시간의 여유가 생긴 후로는 한 달에 한 번씩 소박한 독서모임을 갖기도 했다.


S는 나보다 두 살이 많지만 내게 쉽게 말을 놓지 않았다. 나 역시도 존대와 반말을 적당히 섞어가며 기본적인 예의를 갖춰 그녀를 대하는 것이 편했다. 겉으로 보기엔 딱딱하고 정 없다 느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적당한 거리감과 매너 덕분에 우리의 관계가 오랜 시간 끈끈하게 이어진 것 같다. 안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언니, 동생’하며 엉기게 되는 사이도 있지만, 상대가 나를 배려하고 있음을 알고 더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사이도 있는 법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자연스레 말을 놓는 때를 찾아 서서히 거리를 좁혀왔고, 내가 멀리 더블린으로 건너온 후에도 그 관계를 촘촘하게 다져올 수 있었다.


상기된 맘으로 런던의 아늑한 숙소에 짐을 푼 후 S가 만든 해물 크림 파스타와 내가 고른 화이트 와인이 잘 어우러진 첫 저녁 식탁을 나누었다. 식사가 끝나기도 전에 터진 이야기보따리는 늘 그렇듯 아이들 키우는 얘기로 시작해 풀어도 풀어도 끝이 없었다.

자연스레 소재는 서로의 관심사로 넘어가 그동안 재미있게 읽었던 책들과 즐겨 듣는 음악, 인상 깊었던 영화와 드라마들이 줄줄이 쏟아졌다. 그 리스트가 얼마나 풍성한지 가끔은 되묻고 메모장에 적느라 손이 분주했다. 미묘하게 다르긴 해도 서로의 취향이 만나는 짜릿한 지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대화는 더욱 즐거웠다.

더블린에 외따로이 살면서 새로운 친구도 사귀고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종종 연락도 하지만, 이상하게도 풀리지 않는 답답함 같은 것이 늘 남는 기분이었다. 누구보다도 나와 대화가 잘 통하는 남편이 항상 곁에 있고, 때마다 나를 잊지 않고 연락하는 친구들과 가족들이 있었지만, 전화나 메시지, 영상통화로는 채워지지 않는 세밀한 무언가가 조금씩 쌓여갔다. 어떨 때 한국에 가고 싶냐고 누가 묻는다면 아마도 그런 아쉬움 때문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S와 밤늦도록 대화를 나누면서 알 수 있었다.

대화는 누구와도 나눌 수는 있지만, 꼭 그 사람과 함께여야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것들이 있다는 것을.

그 사람만이 지닌 특유의 말투와 오고 가는 반응이 만들어내는 절묘한 리듬감, 이내 그 정서에 익숙해질 때쯤 서로를 편안하게 에워싸는 공기.

나는 내가 사랑하는 한 사람 한 사람과 공유했던 저마다의 순간들이 사무치게 고팠던 것이다. 그렇게 사람마다 지니고 있는 고유의 결을 다시 만지고 느껴보고 싶어서 가끔은 향수병이 도지곤 했나 보다.


적당히 늦잠을 자고 일어난 다음날 아침, S가 차려준 근사한 아침을 먹고 근처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런던이 처음은 아니어서 바쁜 여행객 모드가 아닌, 런던에 몇 년쯤 산 듯한 현지인처럼 느긋한 마음으로 다녀보기로 했지만, 세인트 폴 대성당 앞에서 찰칵 기념사진을 찍고, 밀레니엄 브리지 위에서 또 사진을 연신 찍으며 여지없이 관광객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테이트 모던 갤러리에 들어선 후에는 여유롭게 그림을 감상하며 서로 좋아하는 취향을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배가 고팠다. 그림 감상을 대강 마친 후 버로우 마켓 근처에서 맛있는 해산물로 점심을 먹고, 언제나 시끌벅적한 시장을 둘러보며 달콤한 디저트와 커피를 즐기고 나니 어느덧 오후였다.

오후 네시만 지나도 슬슬 해가 지기 시작하는 겨울인지라, 어두워지기 전에 런던의 전경을 감상하기 위해 서둘러 ‘런던 아이’로 향했다. 우리 가족은 모두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피했던 곳이지만 S의 딸이 강력하게 추천한 덕에 조금 흐리면서도 운치 있는, 정말 '런던스러운' 도시 전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었다.

벌써부터 크리스마스의 기운이 넘실대는 런던의 도시 이곳저곳을 쏘다니다 보니 6시밖에 안되었지만 마치 밤 10시 같은 까만 밤이 찾아왔다. 어차피 우리의 목적은 특정한 어딘가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루를 보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짧은 하루의 여행을 마감하는 것이 아쉽지는 않았다. 슬슬 차가워지는 찬바람을 맞으며 숙소로 돌아온 후 따끈한 된장국으로 저녁식사를 나누었다.

세인트 폴 성당과 테이트 모던을 이어주는 밀레니엄 브리지
테이트 모던 안의 작은 기념품 숍에서 바라본 풍경
이번에는 혼자 느긋하게 즐겼던 마크 로스코
없는 것 빼고 다 맛있는 버로우 마켓
런던 아이에서 바라본 모습들


어느새 혼자만의 여행 두 번째 밤이자, 우리의 마지막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내일이면 S와 그녀의 딸은 서울로, 나는 더블린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다행히 전날 밤 그간의 밀린 수다를 정신없이 쏟아낸 덕에 오늘은 숨이 차도록 이야기를 몰아갈 필요가 없었다. 천천히 짐을 싸면서 이런저런 사는 얘기들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요즘 둘 다 흠뻑 빠져있던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마지막 회를 훌쩍훌쩍 눈물을 훔치며 함께 보는 것으로 하루를 알차게 마무리했다.  


처음에는 아무래도 아이들이 마음에 걸려서 새벽 비행기를 타고 하루만 훌쩍 다녀올까도 고민했었지만, 2박 3일의 시간을 갖기로 한 것은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 물론 더 긴 시간을 갖고 이곳저곳을 많이 다녔어도 좋았겠지만, 여행의 만족도가 꼭 물리적인 시간과 장소의 양과 비례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에 나는 동의하는 편이다.

남편도 나도 여행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최대한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 다니고 보고 경험하는 편이라면, 나는 나이가 들수록 베짱이처럼 한두 곳에 유유자적 머물고 싶은 마음이 커져가고 있었다. 마치 영화 <스모크>의 한 장면처럼 특정한 한 장소의 풍경을 같은 프레임 안에 넣고 몇 날 며칠을 봐도 지루하지 않을 그런 여행을 가끔 꿈꿨던 것 같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이 의미가 있으면서도 새로운 것에 신기해하다가도 이내 쉽게 질리고 피곤해하며 다시 익숙하고 편안한 것을 찾고 보채는 녀석들이 힘에 부치기도 했다. 네 사람의 욕구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여행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익히 알아가면서, 여행을 위해 짐을 싸고 돌아와 다시 짐을 풀며 만끽했던 설레고 풍만했던 감정들이 언제부턴가 마치 바람 빠지는 풍선처럼 생기를 잃어가는 것 같아 조금 속상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가끔은 나 자신에게도 물어보았다.

무얼 위해 누구를 위해 여행을 하느냐고.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나'를 우선순위에 두고 사는 것에 왜 그렇게 눈치가 보였을까. 오히려 가족들은 가장 목소리가 큰 내 눈치를 보며 살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억울해할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잘 모른 지 오래된 것 같았다. 짜증이 나긴 했는데, 징징대다 보니 어느새 그 이유를 잊고는 짜증을 위한 짜증을 내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자꾸만 이유 모를 화가 나고 집안에서만 목소리가 커져갔다. 정작 내 목소리를 또렷이 내야 할 때를 찾지 못하고 다른 곳에 화풀이를 하고 있는 지금의 나 자신이, 신기하게도 혼자 밖에 나오고 나서야 더 잘 보였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S에게 문자 메시지로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S의 딸에게도 엄마 빌려줘서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우리 딸이 너 좋은 이모 같대. 엄마가 좋은 사람이어서 좋은 사람 만나는가 보다고...... 덕분에 나도 좋은 엄마 됐네 ^^.”

어떻게 하면 나도 내 딸에게 저런 멋진 말을 들을 수 있을까.

S가 보낸 답장을 보며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마치 전혀 몰랐던 것처럼 이상하게도 마음이 일렁였다.

비행기를 타려고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는데 어디선가 울부짖는 아이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가 싶더니 게이트가 열리고 비행기로 이동하는데도 계단 아래에서 타지 않겠다고 엉엉 울어대는 다섯 살 남짓의 남자아이와 옆에서 쩔쩔매는 부모가 보였다. 승객들이 모두 비행기에 탑승하고 이륙 후 한참 상공을 나는 중에도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승객 중 누구 하나 불만스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서로 눈이 마주치면 ‘풉'하고 웃음을 터트리는 지경에 이르자 슬슬 나는 걱정이 되었다. 혹시나 아이가 무슨 공포감에 사로잡힌 것은 아닐까, 함께 있는 부모는 얼마나 좌불안석일까.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내 아이들 떼어놓고 홀가분하게 여행을 와서도 자꾸 다른 아이와 부모에게만 눈과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조차도 혼자여서 가질 수 있는 넉넉함 같은 것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스스로 나를 위해 무언가로 속을 든든히 채우고 나니 슬슬 아이들과 남편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더블린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덧 저녁식사 시간이었다.

"나 조금 있으면 집에 도착해요. 엄청 배고프다."

"음... 우리 뭐 먹지?"

"설마, 내가 가서 저녁 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며칠 동안 충분히 시달렸을 남편을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여행의 기분을 만끽하고 싶어서 시침 뚝 떼고 그에게 저녁 식사를 주문했다.

현관문을 여니 정신없이 국수를 삶느라 얼굴이 벌게진 남편과 쪼르르 달려와 안기는 딸아이, 그리고 쑥스럽게 엄마를 반기는 멋없는 아들 녀석이 한 프레임에 들어온다. 매일 눈에 담아왔던 풍경이고 인물들인데도 어쩐지 조금 다르다. 그들이 아니라 내가 달라져서인가.

그래도 내일이면 다시 예전의 똑같은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 일상 속의 나는 아주 조금, 미미하게나마 다른 내가 되어있지 않을까. 나에 대해 무언가 기대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번 여행은 의미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빨리 다음 여행을 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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