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섬콩 Jun 20. 2020

추억을 얹어 먹는 뜨끈한 저녁밥

 아일랜드에서도 역시 집밥입니다!


"여보 식사해요! 얘들아 저녁 먹자!"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와 뜸이 제법 잘 들은 냄비밥의 구수한 냄새가 부엌 안을 유유히 맴돌기 시작한다. 어제 담근 배추김치와 간장과 물엿, 참기름을 넣어 후딱 졸인 감자, 짭조름한 멸치볶음까지 꺼내 상 위에 올려놓았으니, 이제 가족들을 식탁 앞으로 부르기에 딱 알맞은 시간이다.

'밥' 소리만 하면 제일 먼저 달려오는 아들이 어느새 부엌 안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한다.

"오늘 저녁은 뭐예요?"

무엇이든 잘 먹지만 메뉴에 민감한 녀석은 식탁 위에 차려진 반찬들을 흘끗 보더니, 이내 불 위의 냄비로 고개를 돌려 코를 킁킁거린다.

"그냥 된장찌개야! 투정할 생각 말고 어서 수저 꺼내서 차려놔."

오늘은 아이가 좋아하는 고기반찬을 내놓지 못해 조금 미안해진 나는, 녀석이 불평이라도 할세라 미리부터 입을 막고 등을 떠민다.

"와! 맛있겠다!"

곧이어 식탁 앞에 앉은 남편이 입이 삐쭉 나온 아들 녀석의 표정을 읽고는 일부러 분위기를 띄워주고, 눈치 빠른 딸아이가 "나 감자 좋아!" 하며 장단을 맞춰주면 그럭저럭 불만 없는 저녁 식사가 완성된다.

"어, 맞다! 이것도 했는데!"

전자레인지에 넣어 놓고 깜빡 잊은 뜨끈한 계란찜을 꺼내어 상 한가운데 올려놓으니 덤이라도 얻은 듯 처음보다 밥상이 더 풍성해진다.

"잘 먹겠습니다!"

반찬의 호불호와는 상관없이 밥을 먹기 전에 아들 녀석이 주문처럼 외치는 구호가, 밥 한 톨 없이 깨끗하게 밥그릇과 국그릇을 비운 후에 외치는 "잘 먹었습니다!"로 마무리되면 오늘 저녁도 든든하게, 그리고 무사히 잘 먹었다는 포만감에 마음도 위장도 넉넉해진다.




'누가 뭐래도 저녁은 잘 먹어야 한다'는 가훈이라도 벽에 붙여놓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 가족에게 저녁식사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네 식구가 한상에 둘러앉아 저녁밥상을 나누는 일은 마치 최선을 다해 잘 치러야 할 '하루의 마무리 의식'처럼 서서히 자리를 잡아왔다. 그 시작은 아마도 지금 살고 있는 더블린에 정착하면서부터 였을 것이다.

2016년 봄, 더블린에 먼저 건너가서 공부를 시작하고 있던 남편을 3개월 만에 다시 만났을 때, 그의 얼굴은 전보다 많이 홀쭉해져 있었다. 젊지도 않은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지내기가 힘들겠다는 짐작은 했지만 막상 그 현실을 눈으로 확인하니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뭐가 그리 힘들었냐고 묻자, 무엇보다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노라고 그는 고백했다.

하루 세끼를 시리얼이나 샌드위치, 또는 샐러드로 해결하고 나면 저녁마다 뜨끈한 국물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단다. 남편이 홈스테이 하던 집의 주인은 주방을 마음껏 사용하라고 했지만, 어쩌다 라면이랑 포장김치라도 사 와서 끓여먹으면 뭐라 하는 대신 조용히 온 집안에 향초를 피웠다 했다. 남은 김치를 차마 냉장고에 넣을 수가 없어서 방 안에 꽁꽁 숨겨두었다가 결국 팡 터졌다는 얘기는 듣는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물론 시내에 있는 한국식당에도 갈 수 있고, 가끔 더블린에 살고 있는 지인의 초대로 한국 음식을 대접받기도 했지만, 내 집에서 내 식구와 함께 나누는 밥상만큼 편하고 맛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래서 지금 제일 먹고 싶은 게 뭐예요?”

마침내 우리 네 식구가 더블린에 모두 모이게 되었을 때 남편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조갯살을 넣고 뜨끈하게 끓인 시금칫국!"

한국에서 지낼 때 내가 일주일에 한두 번은 밥상에 올렸던 평범한 그 국이었다. 집에서 가까운 동네 마트에서 모시조개 한 봉지를 사서 해감하고, 단골인 야채가게에서 신선한 시금치를 사다가 다듬어 엄마가 보내준 멸치와 된장을 풀어 푹 끓이면 되는 아주 간단한 메뉴였다.

"가만있자, 시금치가 더블린 마트에도 있나? 여기는 섬나라니까 해산물 종류는 많겠지? 된장은 아시안 마켓에 주문하면 되나?"

우여곡절 끝에 집을 구하고, 당장 네 식구의 세끼를 해결하는 일이 현실로 다가오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차가 없는 우리가 맞닥뜨린 첫 번째 난관은 장을 보는 일이었다. 우선 제일 가까운 마트는 걸어서 갈 수 없는 거리에 있었다. 트램역은 집에서 15분 거리에 있었고, 버스는 한 시간에 한 대씩 오기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마트에 가서 미리 작성한 리스트대로 구매하고 돌아올 때는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다행히 시내에 있는 아시안 마켓 중에 배달을 해주는 곳이 여럿 있어서 무거운 쌀이나 꼭 필요한 고추장, 된장, 라면과 같은 식품들은 정기적으로 구할 수 있었다.


미국이나 유럽의 어느 나라도 가본 적이 없었던 나에게 더블린의 마트 풍경은 신기하고도 낯설었다. 모두 영어로 쓰여있는 이름과 성분들, 처음 보는 생경한 것들을 하나하나 살피느라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몰랐다. 초반에는 실수도 많았다. 한국에서 먹던 삼겹살과 비슷하게 생긴 고기들이 많길래 그중에 보기 좋은 것으로 골라서 사 왔더니 엄청 짠 베이컨이어서 당황한 적도 있었다. 다음번에는 두툼한 목살처럼 생긴 고기를 덥석 집어왔는데 알고 보니 등심이어서 얼떨결에 해본 적도 없는 돈가스를 튀겨야 했다. 마침내 우리가 원하는 생삼겹살을 제대로 찾아서 식탁에 올리기까지는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처음 마트에 갔을 때도, 내가 생각했던 시금치는 찾을 수가 없었다. 홍합 말고는 조개류도 전혀 보이지 않았고, 우리가 즐겨 먹던 삼치, 고등어, 오징어, 갈치는 어디 숨었는지 구할 수 없었다. 모시조개는커녕, 결국 샐러드용으로 파는 이파리 시금치만 한 봉지를 사다가 된장을 풀어놓은 냄비에 숭숭 띄워 끓였다. 시금치 뿌리에서 느껴지는 고소한 맛과 입안 가득 감기는 줄기의 질감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된장의 구수한 향만으로도 그저 황송했다. 이름은 한글로 쓰여있지만 원산지는 미국인 푸석한 쌀로 지은 밥 한 공기를 국그릇에 후딱 말은 남편은 "아휴 살 것 같다!"는 감탄을 연발하며 금세 한 그릇을 비워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앞으로 우리가 이곳에서 잘 적응하려면 무조건 잘 먹어야겠구나, 하루에 한 끼라도 제대로 먹고 속을 든든히 채워야 낯선 이곳에서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하든 주눅 들지 않고 힘을 내겠구나, 생각했다.


솔직히 외국에서 지내다 보면 환경과 여건에 맞게 입맛도 저절로 서구화될 줄 알았다. 한국에 있을 때도 매일 한국음식만 먹으며 살았던 것은 아니었으니, 이곳에서 만들기 쉽고 먹기 간편한 음식들에 서서히 적응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태어나서 고작 10년을 한국에서 보내고 더블린에 온 아들은 언제부터 토종 한국인의 입맛을 갖게 되었는지 매 끼니마다 "김치 없어요?"를 입에 달고 살았다. 얼큰하고 뜨끈한 국물을 선호하는 남편의 입맛을 어쩌면 똑같이 닮았는지 김치찌개나 부대찌개, 고추장찌개, 매운 어묵탕 등을 내놓은 날이면 어린 녀석이 숟가락을 드는 눈빛부터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저녁식사 전까지 아이들이 먹는 것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8시 15분에 시작하는 수업에 늦지 않기 위해 7시 30분부터 집을 나서야 하니 늘 아침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기가 쉬웠다. 매일 도시락을 싸주기는 했지만, 교실에서 함께 식사하는 친구들을 배려하기 위해서는 한국처럼 밥과 국, 김치 같은 냄새가 강한 반찬을 넣어줄 수도 없었다. 요일에 따라 조금씩 다른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는 것이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루 내내  퍽퍽한 빵과 간식으로 속을 채운 아이들은 저녁때가 다가오면 약속이라도 한 듯 주방을 서성이며 내게 물었다.

"엄마, 오늘 저녁은 뭐예요?"

마치 카운트다운이라도 하듯 '오늘은 과연 무엇을 어떻게 먹을까'하는 기대로 부푼 마음을 따뜻한 집밥으로 채워주는 것이 그저 내가 할 몫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제대로 된 재료를 구하는 일이었다. 여러 개의 대형 마트 중에서 어느 곳의 식품이 더 싱싱하고, 어느 곳이 더 저렴한지, 그곳에서만 구할 수 것은 무엇인지를 파악해서 제대로 장을 보는 기술을 터득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되도록 얼린 육류를 팔지 않는 아일랜드에서는 생삼겹살과 스테이크용 소고기를 한국보다 더 저렴하게 살 수 있고, 한국에서 먹던 맛과 비슷한 홍시나 달콤한 수박을 사려면 폴란드인 마트를 이용하는 것이 낫고, 바닷가가 가까운 마을의 해산물 가게에서는 운이 좋으면 가끔 모시조개를 구할 수도 있었다. 외국에서 조금이라도 '한국식'에 가까운 재료를 구하고 먹으려면 무엇보다 '정보'가 중요했다.

"아시안 마켓에 냉동 순대 들어온 거 알아요? 다른 곳에서는 라면이 50센트 더 싸요. 시내에 생긴 큰 중국 마켓에서 갈치랑 조기를 봤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요즘 중국식 배추랑 무가 조금 저렴하더라고요."

가끔씩 만나는 한국인들은 새로 알게 된 정보들과 들깨가루나 젓갈, 고춧가루 같은 귀한 식료품들을 주고받으며 친목을 돈독히 했다.


봄이 오면 가까운 풀숲이나 산 근처에 '와일드 갈릭'이라고 부르는 명이나물이 그득하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도 친한 한국인이었다. "그냥 오고 가다 뜯었어." 하며 그녀가 처음 나물 꾸러미를 툭 떨궈주고 갔을 때는 마치 신세계를 발견한 것처럼 놀라웠다. 한국에 있을 때는 식당에서 나오는 반찬으로만 맛보았던 명이나물을 간장과 설탕과 식초를 손수 끓여 더블린에서, 그것도 처음으로 만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 만든 더블린산 명이나물 장아찌에 아일랜드산 삼겹살을 싸 먹는 맛은 정말 일품이었다.

산을 오갈 때마다 이름 모를 풀들을 유심히 살피는 습관이 생긴 것도 그때부터였다. 비록 직접 뜯어먹을 수는 없지만 가는 곳마다 지천에 깔려 있는 고사리를 처음 발견했을 때는 고향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아일랜드의 명이나물은 한국의 것보다 조금 더 단단하고 마늘향이 강해서 찾아내기가 쉬웠다. 언젠가 아이들이 숲 속 놀이터에서 놀고 있을 때 근처에 앉아 엄마들과 수다를 떨다가 잠깐 주위를 둘러봤는데 온통 명이나물이 가득한 것이 아닌가. 마치 산삼이라도 찾은 듯 흥분한 나를 보고는 엄마들은 까르르 웃어댔다.


명이나물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후로 무모한 용기에 사로잡힌 나는 살면서 해본 적이 없는 음식들을 직접 만들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고작 500g에 한국 돈으로 5천 원도 넘는 포장김치로 남편과 아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김치 담그기에 도전했다. 중국식 배추를 굵은소금에 절이고 친정 엄마가 보내준 고춧가루에 여기저기에서 공수해온 멸치 액젓, 새우젓, 매실액, 마늘, 양파, 파를 섞어서 버무리고 나니 그럭저럭 괜찮은 김치가 완성되었다. 내친김에 매운 것을 못 먹는 딸아이를 위해 백김치도 만들고 기다랗게 생긴 요상한 무를 썰어서 깍두기도 담갔다.

마트에서 메주콩을 발견한 날은 겁도 없이 두 봉지를 사다가 물에 불려놓기도 했다. 불린 콩을 삶은 후 믹서에 열심히 갈아서 그것을 다시 면포에 넣고 콩즙을 짜서 콩국수 한 그릇을 상 위에 올리기까지의 과정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았다. 그래도 면포에 남은 비지를 냉동실에 잘 넣어뒀다가 나중에 돼지고기와 잘 익은 김치를 섞어 끓여먹는 비지찌개는 모든 시름과 수고를 잊게 해 줄 만큼 구수하고 담백했다.


어느 날인가 시내에 다녀오는 남편이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환하게 웃으며 들어왔다. 안에는 한국에서 먹던 꽃게와 모양은 똑같지만 푸른빛이 도는 블루크랩 네 마리가 집게발을 묶인 채 바둥대고 있었다. 더블린에서 한 번도 꽃게를 맛보지 못했던 아이들은 폴짝폴짝 뛰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장모님이 해주시던 것처럼 시원하게 끓여봐.”

소금과 고추장 대신 된장과 고춧가루를 넣어 끓이던 엄마의 꽃게탕을 기억하며 애를 써보았지만, 향긋한 쑥갓이나 미더덕도 없이 그 맛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재료 때문이라는 궁색한 핑계를 대긴 했지만, 실은 엄마가 해주시는 음식 가운데 우리 가족이 가장 사랑하는, 꽃게철이 돌아올 때마다 수십 년이 넘게 밥상에 올려주셨던 역사 깊은 그 꽃게탕의 맛을 재현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래도 외할머니가 해주시던 맛이랑 비슷하다. 대게찜도 맛있게 해 주셨는데!"

얇은 게 다리 하나하나를 뜯어 쪽쪽 살을 발라 먹으며 아이들은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로 재잘재잘 꽃을 피웠다. 남편과 나 역시 한 숟가락 국물을 떠먹고는 빙긋 웃었다. 말하지 않아도 둘 다 머릿속으로는 엄마가 해주셨던 그 맛을 떠올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자린고비가 매달아놓은 조기를 바라보듯, 그렇게 엄마의 꽃게탕을 음미하며 떠먹다 보니 한국에서 먹던 그 국물 맛이 어느덧 입안에 가득 퍼지는 것만 같았다. 진한 옛 추억을 얹어 먹는 저녁밥이야말로 가장 맛있다는 것을 우리 가족은 익히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기하게도 무엇이든 추억을 복기하며 먹으면 본래 그 맛에 더 가까운 맛이 났다. 더블린에 환한 여름이 오면, 하얀 면포에 삶은 콩을 넣고 열심히 콩물을 짜내면서 나는 어릴 적 할머니와 함께 열심히 돌리던 맷돌을 떠올렸다. 언니와 서로 콩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겠다고 아웅다웅 다투며 갈아낸 걸쭉한 콩국에 소금을 살짝 넣어 먹었던 기억을 상기하면 이미 내 입안에는 그 맛이 가득했다. 그렇게 나만의 추억으로 간을 맞추어 먹는 것도 나름의 방식이었다.

담근 김치가 맛있게 익어서 밥상에 올라오는 날이면 단골로 들먹이는 이야기가 따로 있었다.

"아! 민주 엄마가 해주던 김치 기억난다. 진짜 맛있었는데."

전주 출신답게 훌륭한 손맛을 자랑하던 그녀는 열무김치, 배추김치, 묵은지까지, 때마다 맛있는 김치를 넉넉히 담가 우리 집에 가져다주던 인심 좋은 이웃이었다. 아들 녀석이 김치 맛을 제대로 알고, 어른스러운 입맛을 갖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 그녀의 공이 컸다.



"여보, 오늘은 밥 하기 진짜 싫다! 한국에서처럼 짜장면, 짬뽕 시켜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되지도 않는 투정을 여러 번 듣던 남편은 아시안 마켓에서 커다란 춘장 한 봉지와 홍합, 오징어, 새우, 대구살을 사 와서는 소매를 걷어붙였다. 잘게 썬 파를 달달 볶아서 낸 파기름에 돼지고기와 춘장을 섞어서 완성한 짜장면은 집 근처에서 시켜먹던 바로 그 맛이었다. 더블린에서 구할 수 있는 온갖 해물에 고춧가루를 넣어 칼칼하게 끓여낸 짬뽕 역시 서울에 살 때 이따금씩 찾아갔던 맛집에 뒤지지 않았다. 아니, 인스턴트 짜장과 짬뽕으로는 낼 수 없는 기억 속의 그 맛을 마침내 끄집어냈다는 감격 덕분에 국물과 향은 더 깊고 진했다.


내친김에 우리는 명절 기분을 낼 수 있는 음식에도 도전했다. 추석과 설날이면 엄마와 할머니가 커다란 양푼 가득 만들어주시던 잡채도 요리해보고, 딸아이 생일에는 친구들을 초대해서 '한국 음식 만들기' 이벤트로 만두와 김밥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고기, 햄, 오이, 당근, 단무지, 계란 지단을 얇게 썰어서 상 위에 펼쳐두고, 참기름과 깨소금으로 간을 한 쌀밥을 나누어주니, 아이들은 취향에 맞는 재료를 골라 얇은 김과 밥 위에 올리기 시작했다. 김의 끝을 잡고 조심스럽게 돌돌 말아 그럴듯한 모양이 완성되자 모두들 한입 가득 배어 물고는 행복해했다.

동그란 만두피를 손바닥에 펼치고는 얇게 다진 고기에 두부와 온갖 야채를 섞어서 만든 만두소를 한 숟가락 떠 넣는 시범을 보이자, 이번에도 다양한 모양의 창의적인 만두를 빚어냈다. 그 모습을 보니 어릴 적 설날이면 온 식구가 둘러앉아 커다란 쟁반 위에 줄을 맞추어 만두를 올려놓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생각도 없이 찹쌀을 한 포대 사온 날에는 딸아이가 그렇게 먹고 싶다고 졸라대던 떡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반나절 넘게 물에 불려놓은 찹쌀을 곱게 갈아서는 은근한 불에 고았다. 눌어붙지 않게 하려면 멈추지 말고 계속 치대어야 하는데 찰기가 생길수록 어찌나 힘이 들던지 10분쯤 지나자마자 땀을 뻘뻘 흘리며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지'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떡 반죽의 반을 뚝 떼어다가 콩고물을 골고루 묻혀 인절미를 만들고, 반은 안에 팥을 넣어 두툼한 찹쌀떡을 만들고 나니 그간의 고생이 잊히는 듯했다.

"이게 바로 그때 먹었던 그 떡이구나!"

입안 가득 인절미를 우물거리던 아이들은 명절이면 어린이집 마당에서 절구에 찹쌀을 찧어 쫄깃한 인절미도 만들어 먹고, 제기차기와 윷놀이를 즐기던 일을 생각해냈다. 곁에서 함께 놀던 친구들이 떠오르는지 떡을 먹는 내내 아련한 표정이 얼굴에 가득했다.



한국에서 지낼 때는 결코 한적도 없고, 해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음식들을 하나씩 만들어내는 스스로가 기특해서 가끔씩 SNS에 사진을 올리고 나면, 과거의 게으른 나를 너무나도 잘 아는 가족과 친구들은 놀라워했다.

"정말 이걸 네가 했다고?"

처음에는 대부분 반신반의하는 반응이었다가, 그 의심은 점차 배신감으로 변해갔다.

"너 정말 이러기야?"

"이렇게 잘하면서 여기서는 그동안 왜 안 했던 거야?"

나보다도 훨씬 살림꾼인 언니와 친구들은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다면서 오히려 내게 레시피를 묻기도 하고 한국에 돌아오면 꼭 맛보고 싶다는 칭찬들로 격려해주었다.


사진으로 보는 음식들은 꽤 그럴싸해 보인다. 하지만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어딘가 조금씩은 부족하고 엉성한 음식들이다. 한국의 야채보다 더 질기고 단단한 양배추와 양파, 씁쓸한 맛이 배어나는 오이와 호박. 한국에서 먹던 것만큼 달고 시원하지 않은 딸기, 수박, 배, 밍밍하기만 한 고구마. 겨우 찾아낸 재료들에서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맛이 났을 때는 실망도 무척 컸다. 물론, 아일랜드의 대기근을 겪어낸 슬픔이 서린 감자는 한국의 강원도 감자만큼 포슬포슬 맛있고, 드넓게 펼쳐진 초원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들 덕분에 맛있는 소고기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어서 감사하기도 했지만 낯선 식품들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저마다 다른 원산지에서 우리 집 부엌까지 오게 된 재료들을 가지고 한국에서 먹던 것과 비슷한 모양과 맛을 내려 애를 썼다. 서툰 나의 손맛을 거친 끝에 마침내 그릇에 담긴 반찬들은 꼭 우리 가족을 닮았다. 내 나라, 내 집이 아닌 곳에서 어떻게든 발을 딛고 잘 지내보려는 이방인의 삶 같기도 하고, 언어와 환경 때문에 가끔은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기도 하지만,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두 아이의 얼굴이 서려있기도 하다.

한국에서 지낼 때보다 더 열성적으로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고 있지만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감질나는 조바심과 결핍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때로는 원했던 그 맛이 나지 않아 속상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본래의 그 음식과 똑같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먹어도 먹어도 허기는 달래지지 않았다.

만성적인 배고픔의 원인을 알 수 없어 방황하던 우리는 숱한 저녁밥상을 함께 나누면서 그 허전함을 채워갈 수 있었다. 어느 날은 그리운 누군가로 간을 맞추고, 또 어느 날은 추억의 장소를 떠올리며 맛을 더하고, 가끔은 소중했던 기억들을 한두 스푼 꺼내어 쓱싹 비벼 먹기도 했다.

그렇게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나면 더운 온기로 데워진 몸과 마음이 쉽게 꺼지지 않았다.




"저녁 먹자! 빨리 안 오면 내가 다 먹는다”

딸아이의 열 번째 생일인 오늘은 밥상이 나름 화려해서인지 평소보다 목소리에 더 힘이 들어간다. 남편이 이른 아침부터 끓여놓은 소고기 미역국에 감자를 손수 갈아서 부친 감자전, 닭날개와 다리를 오븐에 넣은 양념구이와 국물을 자작하게 끓여낸 소불고기까지, 모두 아이가 며칠 전부터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것들이다.

"어쩌면 너는 너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친할머니 입맛을 그리 똑같이 닮았니?”

짭짤하게 양념이 배인 불고기 국물을 밥 위에 얹어 야무지게 먹는 딸을 보며 남편이 신기하다는 듯 웃는다. 편찮으신 동안에도 종종 불고기가 드시고 싶다고 말씀하셨던 시어머님이 오늘은 저녁밥상에 소환된 메인 추억인가 보다.

어머님을 꼭 닮은 딸아이와 여전히 먹성 좋은 아들 녀석. 그리고 두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남편과 나는 마음속에 이 찰나를 소중히 담아둔다. 언젠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저녁밥상을 나누는 날이 오면 그때는 오늘의 이 추억을 두고두고 꺼내어 먹으리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알 먹었습니다!”

오늘도 깨끗이 비운 밥그릇으로 하루를 감사히 마무리한다. 따뜻한 집밥으로 든든히 속을 채웠으니 내일은 분명 힘이 더 날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