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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콩 Sep 21. 2020

6개월 만에 학교에 다녀왔습니다

이상한 세상에 살고 있는 아이들


"학교가 너무 이상해"


9월과 함께 아이들이 등교를 시작한 지 닷새쯤 지났을까, 자려고 누운 딸아이는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루에 손을 수십 번은 닦은 것 같아. 밖에서 노는 시간에는 다른 반 친구들이랑은 같이 만나서 놀 수도 없고, 교실에서 애들이랑 도시락도 나눠 먹으면 안 된대."


아이는 얼마나 학교에 가고 싶어 했는지 모른다. 아일랜드의 모든 학교가 문을 닫은 것이 3월 중순이었으니, 아이들은 거의 반년 동안의 기나긴 방학을 보냈다. 처음 몇 주는 마냥 신이 났고, 부활절 방학까지 이어서 쉬게 되니 방학이 따로 없었다. 그러고도 한 달, 또 한 달을 정처 없이 보내고 다시 두 달 동안의 여름방학이 이어졌다. 석 달은 방학이라는 이유로 당당히 놀고, 석 달은 빈약한 홈스쿨링으로 버티며 겨우겨우 시간을 보낸 셈이다.     

락다운과 함께 확진자수가 급속히 늘어나던 초기에는 대부분 집에서 꼼짝 앉고 지냈다. 점차 그 수가 100명, 50명 이하로 줄어들자 답답해진 동네 아이들이 하나둘씩 집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마스크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부모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후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녔다. 슬슬 그런 만남이 익숙해지자 아이들은 학교 대신 동네에서 다양한 놀거리와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루는 잔디밭에 모여 달리기, 체조, 덤블링, 요가 등 저마다 할 줄 아는 운동들을 쭈욱 이어서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가 하면, 또 어떤 날은 자전거를 죄다 끌고 나와 장애물 넘기 놀이를 하기도 했다.

             

아이들의 천국, 아일랜드

Covid19 이전부터, 평소 아일랜드 초딩들이 노는 모습을 보며 천국도 이런 천국이 없구나, 하고 생각했던 적이 많았다. 며칠 전 딸아이의 친구 엄마가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여자 아이가 살기에 한국과 아일랜드 중 어느 곳이 더 나은 것 같아?"

제법 의미 있는 질문인지라 나름 고심하던 나는, 그저 처음에 딱 떠오른 생각대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든 남자든 아이들에게는 아일랜드가 참 좋은 환경이지. 한국의 초등학생들은 이렇게 아무 고민 없이 매일 밖에서 놀 수는 없거든."

서로 다른 환경과 교육 시스템, 인구의 차이로 인해 벌어지는 경쟁 등, 단순히 행복도를 비교하기에는 한국과 아일랜드가 처한 상황이 너무 다르기는 하지만, 어쨌든 우리 아이들을 포함하여 내 눈에 비친 이곳의 아이들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일단 학교 친구나 이웃의 또래들 중에 평일에 공부하러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수영이나 테니스, 피아노, 축구, 농구 등 악기 레슨이나 스포츠 활동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것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다닌다. 실력 향상보다도 체력을 단련시키고 즐기는 데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주말에는 전혀 숙제가 없고 두 달이나 되는 여름 방학, 부활절, 할로윈, 크리스마스에 주어지는 1~2주 방학 동안에도 마찬가지이다. 계속 이곳에서 지내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한국에 다시 돌아가야 하는 상황 때문에 늘 조바심에 시달리던 나는 아이들에게 한국에서 가져온 문제집이라도 풀게 하려고 시도해보았지만 숙제 외에는 따로 공부도 하지 않고, 휴일은 그저 '노는 날’이라는 문화에 점점 익숙해진 아이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팬데믹 이전에 아이들이 제일 자주 가던 놀이터. 지금은 마음 놓고 갈 수 없게 되어버렸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의 취침시간과 수면의 양은 이곳 부모들이 공통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유치원생이나 저학년 아이들은 8시에서 8시 30분 사이에는 대부분 잠자리에 들고 고학년들이나 중학생들도 10시를 거의 넘기지 않는다.

잘 자고 잘 노는 것이 그저 마땅히 할 일인 아이들에게 방학은 천국 중에 천국이다. 그러다 보니 팬데믹 이후 학교에 가지 않는 시간은 가장 길고도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꿀 같은 방학이었다.              

너무 오랜 락다운 기간 동안 우리 가족은 슬슬 야행성으로 생활 패턴이 바뀌어갔지만, 아이들이 눌러대는 초인종 소리에 이른 아침부터 깰 수밖에 없었다. 밖에 나와서 놀자는 딸아이의 친구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기차게 찾아왔고 그 성화 때문에 밥을 미처 다 먹지도 못하고 뛰쳐나갈 만큼 아이는 노느라 바빴다. 햇볕에 까맣게 그을려 웃을 때 하얀 이만 드러나는 녀석의 얼굴을 하루 내내 보지 못한 날도 있었다.      


처음 이 동네에 이사 왔던 4년 전만 해도 영어도 한 마디 못하고 가끔 동네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아 외롭다고 울어대던 딸아이는 어느새 동네 이장님만큼 오지랖이 넓어졌다. 길을 가다 마주치는 이웃들 대부분이 아이의 이름과 얼굴을 알고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고, 아이 역시 그들이 몇 호에 사는지, 그 집의 차 종류는 무엇이고 무슨 색인지, 하다못해 지나가는 개들의 이름과 살고 있는 집까지 다 꿰고 있었다.      

어느 날은 집에서 열심히 김치를 담그고 있는데, 때마침 찰리라는 남자아이의 엄마와 대화를 나누고 돌아온 딸아이가 그 엄마가 김치를 좋아한다는 ’투머치’ 정보를 내게 귀띔해 주었다. 김치 한 통 갖다 주라는 아이의 성화 덕분에 그동안 한 번도 대화를 나누지 못했던 낯선 이웃과 친분을 나눌 수 있었다.


긴 방학의 끝, 새 학년의 시작

아일랜드에서 보내는 마지막 해에 안타깝게도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져서 우리가 계획했던 많은 것들이 어그러지기는 했지만, 반면에 아이는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동네 친구들과 가장 찐한 우정을 나눌 수 있었던 셈이다. 어떨 때는 친구들과 죽고 못 살 것처럼 끈끈하다가도 어느 날은 또 싸우고 토라지기를 반복할 즈음, 마침내 학교가 다시 문을 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시 학교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뛸 듯이 좋아하던 딸아이는 일주일 전부터 가방을 싸고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물론, 학교에 전혀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아들 녀석은 이와 대조적으로 여전히 방 안에서 현실을 부정하며 버텼지만, 성큼 다가오는 시간을 막을 수는 없었다.

 

3월에 새 학년이 시작되는 한국과 달리, 아일랜드는 6월에 한 학년이 끝나고, 9월에 새 학년이 시작된다.

꽃샘추위 속에서도 푸릇푸릇 돋는 여린 잎사귀와 터질듯한 도톰한 꽃망울로 얼굴을 내미는 노란 개나리와 함께 새 학년을 준비했던 어린 시절의 나는, 새로 산 필통에 뾰족하게 깎아놓은 연필들을 가득 채우고 새로 받은 교과서의 겉표지 하나하나를 빳빳한 비닐로 싸다 보면 마음이 저절로 든든해지곤 했다. 방학 동안 깨끗하게 빨아놓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새하얀 실내화가 담긴 주머니를 들고 “학교 다녀오겠습니다!”하고 나서던 설렘은 이제는 아이들에게 꺼내기가 조금 머쓱할 만큼 낡은 추억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꽃샘추위가 아닌 초가을의 알싸한 바람과 함께 등교를 해야 하는 아이들이 제일 먼저 준비해야 하는 것은 마스크였다. 아일랜드에서는 한국처럼 안전한 일회용 마스크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중국산을 구입한 적이 있는 데 사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줄이 끊어지고 이상한 냄새가 났다.

마스크 사용이 낯선 이곳 사람들은 처음에는 머플러나 스카프를 종종 이용하더니, 마트나 상점, 대중교통 안에서 마스크 사용이 의무화되자 여기저기서 천으로 된 마스크를 만들거나 구입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쓰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만 비말을 차단하는데 정말 효과적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팬데믹 이후 한국에서 우편물을 받는 것도 쉽지 않았던 우리 가족은 여름 동안 한국에 다녀온 몇몇 지인들을 통해 마스크 몇 십장을 공수해놓고는 소중한 보물처럼 쟁여두었다.

마스크 다음으로는 손세정제, 그리고 작은 수건과 물티슈까지 챙겨서 가방 앞주머니에 넣어준 후 아이들에게 사용하는 법을 세세히 설명해주었다. 설렘보다는 묘한 긴장과 불안으로 아이들을 무장시켜야 하는 낯선 상황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솔직히 등교를 앞두고 한껏 들뜬 딸아이와는 달리, 우리 부부는 근심이 한가득이었다. 여전히 아일랜드의 확진자 수는 줄어들지 않고 있는 데다가 13세 이하의 아이들은 마스크 사용이 의무가 아니어서 일단 학교에 보내 놓은 후로는 무슨 일이 어떻게 생길지 그저 운에 맡겨야 할 상황이었다.

학교에서는 나름 아이들이 거리를 두고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배치하고 선생님들은 마스크와 보호장비를 사용한다고 했지만 모두 다 마스크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다른 부모들도 마음이 복잡했던지 그룹채팅방에서는 아이에게 마스크를 사용할 부모가 있는지 조심스레 얘기들이 오고 갔다. 전체 아이들 중 절반 정도의 부모가 자기 아이에게 마스크를 씌울 거라 말했고 나머지는 묵묵부답이지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이들의 동선이 섞이지 않도록 학년별로 등교시간과 하교시간을 다르게 정하는 등 학교도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더 이상 홈스쿨링에 의지할 수 없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그저 아이를 학교로 보내야 했다.

6개월 만에 열린 학교의 문 앞에 아이와 부모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담임 선생님이 보내준 딸아이의 교실 모습. 1m 거리를 두고 앉도록 하고, 몇몇 아이는 마스크를 쓰고 있다.

위험한 모험의 장소가 되어버린 학교

수업이 끝나자 운동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내게 달려오는 아이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있었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서 기쁘고 새로운 선생님도 친절하고 좋다고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손은 자주 씻고, 마스크는 계속 잘 쓰고 있었어?"

학교 생활이 재밌었냐고 물었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이런 것을 체크해야 하다니, 물으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예상대로 아이는 교실과 운동장에서 마스크를 내내 쓰고 있기가 쉽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게다가 대부분은 벗고 있는데 혼자서 쓰고 뛰어놀자니 답답하기도 했을 것이다.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 아이의 반에서 마스크 때문에 우려하던 사건이 벌어졌다. 유난히 활발한 소피가 나름 아이들에게 친근감을 표시하고 싶은 마음에 예전처럼 어깨동무를 하면서 다가가자, 거리두기에 예민했던 릴리가 무서우니까 너무 가까이 오지 말라고 얘기했단다. 그 소리를 들은 소피는 자신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화를 냈고, 그렇게 무서우면 하루 종일 마스크만 쓰고 있으라고 릴리에게 쏘아댔다. 그 말에 속상해진 릴리는 울음을 터트렸고 그 사이에서 난감해진 여자아이들은 어쩔 줄 몰라했다는 얘기를 딸아이로부터 전해 들었다.


며칠 전에는 더 난감한 일도 있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낸 점심 즈음, 갑자기 부모들의 그룹 채팅방 알림이 쉴 새 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얘기인즉슨, 그날따라 컨디션이 좋지 않은 세 명의 아이가 쭈르륵 조퇴를 했는데, 그 아이들의 부모들이 자기 아이는 다행히 열도 나지 않고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다른 부모들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그때 한 남자아이의 엄마가 뜻밖의 얘기를 털어놓았다. 사실 자신과 딸아이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코로나 검사를 신청하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고, 아들은 전혀 증상이 없지만 며칠 전부터 학교에 보내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그녀에게 괜찮을 거라고, 별일 없을 거라고 진심 어린 위로를 보냈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인지라, 그녀가 만일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대책도 생각해둬야 했다. 당장 내일부터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이 맞는지 걱정이 된 나는 우선 다음날 약속했던 지인과의 만남을 미루었다. 다행히 그녀는 음성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왔지만, 바로 그다음 날 다른 아이가 또다시 검사를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며칠 후 그 아이가 괜찮다는 소식을 전한 후 그 아이의 짝이 다시 결석을 했고, 다음 날은 담임 선생님도 아프다는 이유로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


평소 같으면 환절기에 도는 독감이려니, 하고 넘어갔을 일에도 더욱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이런 상황이 정말이지 곤혹스러웠다. 불안해하면서도 아이를 학교에 보내야 하고, 그렇다고 내내 집에만 가둬둔다고 마음이 편한 것도 아니니, 현관문을 열면 학교를 비롯한 바깥세상이 마치 위험한 모험의 장소가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문득 첫 아이가 처음 학교에 입학하던 날, "학교라는 곳이 너에게 좋은 경험이 되기를 바란다"는 편지를 썼던 기억이 났다. 그때만 해도 내가 우려하고 걱정했던 것들 가운데 적어도 이런 지독한 바이러스는 포함되지 않았었다. 친구들과 사이좋게 잘 지내고, 공부를 잘 하든 못하든 너무 주눅 들지 말고, 즐거운 일도 힘든 일도 결국은 좋은 경험으로 쌓여갈 수 있기를 바랐던 순진한 바람에, 이제는 아이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이러스를 늘 조심하라는 경고를 보태야 하는 세상이 열리다니! 정말 영화 같은 일이었다.


언제까지 학교에 갈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아일랜드의 확진자 수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다섯 가지의 단계를 두고 상황에 맞게 적용하고 있는 아일랜드 정부는 지난주까지만 해도 레벨 2를 선언했었다. 실내에서는 6명, 야외에서는 15명이 모일 수 있고, 결혼식이나 장례식도 50명 이하, 음식을 파는 곳은 문을 열 수 있지만 술만 마실 수 있는 펍은 여전히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계속 확진자 수가 늘어나자 아일랜드 정부는 어제부터 다시 레벨 3으로 제재를 강화시켰다. 가족 외에는 집안에서 따로 모임을 가지지 말고, 결혼식도 25명 이하, 그리고 테이크 아웃으로 전환하는 음식점들이 늘어나고 다른 지역으로의 여행도 되도록 하지 않아야 한다.

문제는 더욱 상황이 악화될 경우다. 레벨 4가 되면 다시 학교는 문을 닫게 될 것이고 사람들은 어려운 현실과 추위가 함께 몰려오는 혹독한 겨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일랜드 정부가 적용하고 있는 다섯 가지 단계.
현재 아일랜드의 상황은 레벨 3이다.

매일 저녁 6시쯤이면 핸드폰에 설정된 뉴스 알림이 ‘띵동'하고 울리며 확진자 수를 가르쳐준다. 오늘은 396명, 어제보다 거의 150명이 더 늘어났다.

확진자 수가 100명 이하로 줄어들 때까지는 당분간 밖에 나가서 놀지 말라고 당부하자 아이는 입이 잔뜩 나왔다.

내일은 다시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더욱 초조해진 마음을 부여잡고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한다. 그나마도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일이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 있을 때 열심히 해둬야한다는 교훈을 지난 몇 달 동안 똑똑히 배웠다.


학교로 향하는 아이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

2020년에 겪은 이 비극적인 사건이 언젠가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경험으로 남을 거라고 위로하기엔 그 희생의 대가가 너무 큰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괜스레 허무맹랑한 희망을 노래하느니 그저 가만히 뒷마당의 화분을 보여줘야겠다. 집안에 갇혀 지낸 몇 달 동안 우리가 함께 심었던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자랐는지 알려줘야겠다.

아이의 키만큼 껑충 자라 여름 내내 활짝 꽃을 피운 해바라기와 뒤늦게 앙증맞게 얼굴을 내민 메리골드.

그저 햇살과 비, 바람과 그늘 사이에서 묵묵히 제 할 일을 해낸 얘네들처럼 우리도 조금씩 뭔가를 해보자고, 그렇게 앞으로 걸어가 보자고 등을 토닥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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