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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탐험가 Oct 24. 2021

강북이었던 잠실이 강남이 된 사연

행렬은 수구문으로 도성을 빠져나와나와 송파나루에서 강을 건넜다. 강은 얼어 있었다. 나루터 사공이 언 강 위를 앞서 걸으며 얼음이 두꺼운 쪽으로 행렬을 인도했다. (중략) 임금은 새벽에 남한산성에 들었다.


김훈 작가의 소설 ‘남한산성’의 한 대목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만약 서울과 인근 도시의 지리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송파나루’에서 강을 건넜다는 구절에서 좀 머뭇거릴 것이다. 송파에서 배를 탔다고? 송파라면 잠실이고, 잠실과 남한산성은 물이 아니라 그냥 육지로 연결되어 있는데 말이다.


답은 잠실의 지리적 변화에 있다. 잠실은 오늘날 강남 3구 한가운데에 있지만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한강 북쪽 지역에 속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중 '경조오부도'. 한성과 인근 지역이 나와 있다. 오른쪽 하단의 빨간 원 부근이 잠실이다.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잠실 소사(小史)


일제강점기에 잠실의 행정구역은 경기도 고양군 뚝섬면 잠실리와 신천리였다. 여기에서 보듯이 잠실은 한강 북쪽 기슭의 뚝섬, 오늘날 서울 광진구 지역과 생활권을 공유했다.


잠실은 한강에서 쓸려 내려온 모래가 쌓인 섬으로 잠실도(蠶室島)라고 불렸다. 대동여지도에서 한성 지역이 기록된 ‘경조오부도’를 보면 잠실이 한강 이북의 뚝섬과 거의 붙어 있는 걸 알 수 있다. 과거 잠실도의 북쪽은 여의도 샛강처럼 평소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乾川)이어서 뚝섬과 연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잠실도에는 조선 시대에 뽕나무밭이 무성했고 누에치기가 성행했다. 잠실(蠶室)이라는 단어 자체가 ‘누에를 치는 방’이라는 뜻이다. ‘경조오부도’에도 잠실도의 상림(桑林), 즉 뽕나무밭이 표시되었다. 



잠실을 돌아 흐르는 강변에는 송파나루가 있었다. 한강 물길을 따라 충청도와 경상도의 산물들이 올라오는 곳이었다. 반대로 한성과 북쪽 지방의 산물들이 송파나루를 거쳐 남쪽 지방으로 내려갔다. 기록에 의하면 송파나루는 전국 10대 상설시장인 ‘송파시장’이 있었던 매우 번성한 상업 거점이었다.


다만 소설과 달리 사료에 따르면 송파나루는 잠실 건너, 그러니까 한강의 남쪽 기슭에 자리했다. 


아무튼 역사 속 인조 임금은 잠실과 송파나루 근처의 한강을 건너 오늘날 석촌동과 가락동을 지나 남한산성으로 갔을 것이다. 당시의 아픔을 석촌호수 한켠의 ‘삼전도비’가 기억하고 있다. 석촌호수 다른 한켠에는 그곳이 송파나루였음을 알리는 기념비도 있다.



을축년 대홍수


한강 이북 한 귀퉁이에 붙어 있던 잠실이 오늘날 한강 이남으로 쏠리게 된 계기가 있었다. 을축년 대홍수라고도 불리는 1925년의 홍수 때문이다. 당시 기록을 보면 1925년 한 해 네 차례의 기록적 폭우가 내려 한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에 큰 피해를 줬다고 한다.


잠실도는 이때 하중도(河中島), 즉 한강 이북의 육지에서 떨어져 나와 확실한 섬이 된다. 그 전만 하더라도 한강의 본류는 잠실도의 남쪽으로 흘렀다고 한다. 자료에는 잠실 남쪽으로 흐르는 한강을 ‘송파강’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을축년 대홍수가 잠실을 지나는 한강의 흐름을 북쪽으로도 뚫는다.


잠실의 북쪽은 뚝섬과 붙은 건천이었지만 을축년의 대홍수를 계기로 큰 물길이 뚫려 한강의 본류가 된다. 이 북쪽 강을 그 지역 이름을 따 신천강이라 불렀다. 잠실도는 북쪽으로는 신천강이, 남쪽으로는 송파강이 흐르는 한강의 섬이 되었다.


을축년 대홍수로 잠실도를 지나는 물길이 섬 북쪽으로도 뚫려 확실한 하중도가 된다. (출처: 나무위키)


잠실도는 을축년 대홍수의 여파로 진흙과 모래투성이 섬이 된다. 송파나루와 송파시장도 몰락의 길을 걷는다. 기록에 따르면 1960년대까지 송파나루에서 뚝섬까지 오가던 정기선이 있었다고 한다.


을축년 대홍수는 이렇듯 한강의 유로를 크게 변화시켜 육지가 물길이 되거나 물길이 육지로 되기도 했다. 전국적으로 인명 피해도 심했다. 잠실의 경우 신천리 주민 40여 명이 익사했다. 송파의 한 공원에 가면 이때의 기록을 담은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가 있다. 대홍수의 아픔도 기록되었지만 6·25의 상흔도 총탄 자국으로 남아있다.


송파구 송파근린공원에 있는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와 '암행어사 이건창 영세불망비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
전쟁의 상흔. 총탄 자국.

잠실 개발과 석촌호수


 오래도록 경기도 양주군에 속했고 해방 당시에는 고양군에 속했던 잠실은 1949년에 서울특별시로 편입된다. 잠실도를 제외한 송파와 강동지역은 1963년에 서울이 된다. 오늘날 강남구, 강동구와 함께 서울특별시 성동구가 된 것이다. 이 지역은 1975년에 성동구에서 강남구로 분구하고, 나중에 강동구와 송파구로 분구한다. 


하지만 농지가 많았던 다른 지역과 달리 잠실은 하천 지역이고 모래땅도 많아 부동산 관점에서 관심을 덜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척박한 잠실 섬이 세간의 관심을 끌며 개발 지역으로 떠오른 요인이 있었다. 광주대단지 덕분이었다. 


서울특별시는 1968년 시내의 무허가 주택들을 철거하고 주민들을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수진리 인근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곳이 훗날 성남시가 된 광주대단지다. 


그런데 광주로 이주시킨 대다수 주민은 청계천 등 서울에 생업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서울로 출퇴근을 해야 했다. 하지만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 경기도 광주에서 서울로 건너가는 가장 가까운 한강 다리는 서울 동쪽 끝 천호동 인근의 광진교밖에 없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광주대단지 이주민들은 천호동까지 와서 시내버스를 타고 서울로 출퇴근했다고 한다. 강제로 이주했는데 생활환경이 더욱 나빠져 주민들의 불만은 쌓인다. 결국 이주민들은 1971년에 ‘광주대단지 사건’으로 불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규모 도시빈민 투쟁을 벌인다. 


서울시와 정부는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한편 한강 이남 개발을 위해 광주대단지와 연결되는 오늘날 송파대로로 불리는 도로를 건설하게 된다. 마침 계획하던 한강 유역 개발과 강남 개발과 맞물리기도 했다. 잠실은 택지로 개발되고 잠실대교가 뚫려 강북과 연결되었다. 개발 과정에서 섬이었던 잠실은 온전한 육지가 된다.


잠실종합계획 조감도.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잠실섬 남단의 한강 물길을 막는 공사.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잠실은 섬이었지만 물길을 막아 육지가 되었다. (출처: 나무위키)


잠실 개발 이전의 잠실은 북쪽과 남쪽으로 한강이 흘렀다. 즉 섬이었다. 그런데 1971년부터 북쪽의 물길만 두고 남쪽의 물길을 막는 공유수면매립 사업을 벌인다. 그 결과 잠실은 한강 이남 지역에 붙은 육지가 되었다.


잠실 개발 과정에서 남쪽의 물길, 즉 송파강을 메웠지만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바로 석촌호수다. 서울특별시 항공사진 서비스를 보면 1970년대에 잠실의 남쪽 물길이 어떻게 바뀌고 어떻게 석촌호수로 변하는지 그 변천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1972년의 잠실 석촌호수 인근 물막이 작업 현장. (출처: 서울특별시 항공사진 서비스)
1975년 잠실의 석촌호수 인근의 한강 물막이 공사 현장. (출처: 서울특별시 항공사진 서비스)
1976년 잠실 석촌호수 인근. 잠실4단지 현장도 보인다. (출처: 서울특별시 항공사진 서비스)


한편 석촌호수는 동쪽과 서쪽의 두 호수로 나뉘는데 사실상 하나로 연결된 호수공원이다. 이 호수의 물은 한강에서 끌어들인다. 호수 동쪽과 서쪽 지하에 한강과 연결된 도관이 있다고 한다. 호수 주변으로는 한국에서 제일 높은 건물과 놀이공원이 마치 호수가 뒷마당인 양 자리하고 있다.


특히 서쪽의 호수에는 놀이공원이 섬처럼 떠 있다. 어쩌면 그 모습을 보고 석촌호수가 그 회사 소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료를 보니 놀이공원 측은 지자체와 계약을 맺고 사용료를 내고 있다. 


사실 석촌호수는 지자체에 관리 책임이 있는 공원이다. 소유는 국가이지만 시민들을 위한 공유지이기도 하다. 서울에서도 복잡한 곳에 속하는 잠실에서 시민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소중한 자산이다.


석촌호수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떠올랐다. 뽕나무밭이었던 잠실에 고층 건물 숲과 고급 아파트 숲이 마치 바다처럼 펼쳐졌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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