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 네거리와 서대문 사이를 오가다 보면 다소 이채로운 구조물을 볼 수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전시된 ‘전차’가 그렇다. 박물관과 인도 사이 작은 공간에 오래전 운행을 멈춘 '전차 381호'가 행인들을 지켜보고 있다. 이 전차는 ‘등록문화재’ 제467호로 등록되기도 한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이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지난 2020년 <서울의 전차>라는 전시를 열었다. 전차를 주제로 한국 근대 역사와 대중교통 역사를 버무린 전시였다. 전시 당시 관람하던 노인들의 말이 기억난다. 종로대로의 버스 중앙차선이 예전 전차 궤도가 지나던 곳이라는.
사료를 보면 예전 서울 전차노선의 많은 곳이 서울의 주요 도로를 지나거나 지하철 노선과 겹치기도 한다. 전차는 지금은 사라진 교통수단이지만 오늘날 대중교통 발달에 여러 영향을 끼친 흔적으로 남아 있다.
1899년부터 1968년까지 시민의 발이 되어준 서울의 전차
전차(電車)는 전기를 동력으로 지상을 운행하는 교통수단인 노면전차를 말한다. 외국에서는 트램(Tram)으로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울과 부산에서 한때 운행했지만 폐선된 지 오래다.
서울의 전차는 대한제국 시절 전력 공급을 목적으로 세운 ‘한성전기주식회사’가 부설하고 운영했다. 고종과 황실의 홍릉 참배 행사 편의를 위한다는 목적이었지만 사실은 전기 사업 확장을 꾀하기 위함이었다.
미국 기술자의 힘을 빌려 1899년 5월에 지금의 서대문에서 청량리의 홍릉 인근까지 전차노선이 개통되었다. 신기한 문물이었지만 적자 폭이 커지자 ‘한성전기주식회사’는 미국 회사에 매각되고 경술국치 즈음에는 일본 회사에 팔린다. 이름도 ‘경성전기주식회사’로 바뀐다.
일제강점기 조선 총독부는 경성 주요 지역에 전차노선을 개설했다. 당시 노선도를 보면 서울 강북 주요 지역은 물론 한강 이남의 영등포까지 이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주요 노선 중 본선을 예로 들면 세종로에서 청량리 구간을 연결했다. 이 노선은 지금의 서울지하철 1호선 종각역에서 청량리역 구간과 겹친다. 또한, 옛 전차 궤도가 놓였던 곳에는 중앙버스전용차로가 설치되어 있다. 이외에도 종로에서 창경궁을 지나 돈암동까지 연결하는 돈암동선이 있었고, 용산에서 영등포를 연결하는 영등포선 등이 있었다.
전차 궤도 부설 과정에서 훼손되는 숭례문과 도성.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의 전차' 전시 자료)
새로운 문물 도입은 기존 시설의 파괴를 의미하기도 했다. 전차 궤도 부설 과정에서 경복궁 담장을 허물었고 창덕궁과 종묘 사이는 뚫어버렸다. 전찻길을 넓히느라 사대문 인근 도성은 물론 성문도 허물었다. 서대문이 이때 사라졌다. 한편 전차 차고지는 마포와 동대문 그리고 삼각지와 영등포에 있었다.
해방 후에도 서울의 전차는 시민의 발이 되었다. 하지만 전쟁의 여파로 서울 곳곳이 파괴됐고, 전차와 궤도도 피해를 많이 입었다. 하지만 전쟁 후 서울로 사람들이 몰리자 대중교통의 확충이 필요했다. 전차노선이 복원되는 한편 버스와 택시 같은 대중교통 수단이 점차 시민의 발로 자리 잡게 된다.
전차는 다른 대중교통 수단과 비교해 요금이 저렴했지만 사용 연한을 훌쩍 넘긴 낡은 열차와 느린 속도 때문에 시민들의 전차 이용은 점점 줄어들기만 했다. 특히 느린 속도는 교통 체증의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자료에 의하면 1966년 서울 시내 대중교통 점유율은 버스와 택시 등이 약 85%를 차지했고, 전차는 약 15%를 차지했다.
한편 해방 후부터는 한국인 소유의 ‘경성전기주식회사’ ‘조선전업주식회사’, ‘남선전기주식회사’ 등 세 전력 공급회사가 전차를 운영했다. 1961년에 세 회사는 ‘한국전력’으로 통합되었고, 전차 운영 주체도 한국전력으로 바뀌었다.
오래도록 전기회사가 운영하던 전차 사업은 1966년에 서울시로 이관된다. 하지만 여러 논의 끝에 1968년 전차 운행은 결국 중단된다.
이후 전차 궤도를 걷어내거나 그냥 아스팔트로 덮어버리고 도로를 확충한다. 그리고 서울시는 대중교통의 새로운 흐름을 지하철로 돌려버린다.
서울 전차의 흔적을 찾아서
서울에서 전차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그래도 발품을 팔면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우선 보존된 전차가 두 대 있다. 그중 381호 전차는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363호 전차는 서울과학관에 전시되어 있다.
은방울 자매의 ‘마포종점’이라는 노래도 전차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작사가 ‘정두수’가 1967년에 가사를 쓴 노래 ‘마포종점’에는 당시 전차 정거장과 차고지가 있던 마포의 풍경이 잘 녹여져 있다.
특히 “강 건너 영등포”, “저 멀리 당인리에 발전소”, “여의도 비행장” 같은 구절을 보면 마포가 당시 교통의 요지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마포에는 전차의 흔적은 기념비로만 남아 있다. 마포역 인근 ‘불교방송’ 건물 입구에 ‘3·1 독립운동 기념터; 마포전차종점’이라고 쓰인 기념비가 놓여 있고, 강북 강변도로 인근 어린이 공원에는 ‘마포종점’ 노래비가 놓여 있다.
차고지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마포대로 인근에는 건물들만 있다. 한때 전차 운영을 맡았던 한국전력의 지점 건물이 그곳에 있는데 혹시 당시 차고지였을까 했지만 관련 기록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다만 대로변 한 어린이 공원에 전차 모습을 한 화장실을 볼 수 있었다.
동대문 인근에도 전차 차고지가 있었다. 그곳 한켠에 전차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한 발전소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동대문과 마주한 ‘메리어트 호텔’ 앞에 전차 차고지가 있었다는 기념비로만 남았다.
전차 차고와 발전소가 없어진 이후 같은 자리에는 ‘동대문 고속버스터미널’이 들어섰다. 1981년 반포에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이 들어서기 전에는 서울역과 함께 서울의 관문을 맡았었다. 고속버스터미널이 폐쇄된 후에는 한동안 주차장으로 이용했다. 지금의 호텔은 2014년에 들어섰다.
도시의 팽창과 함께 대중교통도 변하고
“우리 가족이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미아리에 집을 얻었어. 인근 돈암동에 전차 종점이 있었거든.”
1960년대 초 경북에서 서울로 올라온 우리 가족과 1950년생 내 누나의 경험이다. 아버지는 을지로에 직장이 있었고 형제들은 종로 인근에 있는 학교에 다녔었는데 돈암동에서 전차를 탔다고 한다.
“처음에는 신기해서 전차를 타고 다녔었는데 너무 낡고 느려서 나중에는 버스를 주로 탔어. 요금이 더 비싸긴 했지만. 그래도 전차가 사라진다고 했을 때 조금은 서운했던 게 기억나.”
개발과 성장이 우선이던 시대에 지방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는 사람들에게 일터와 거주 공간을 이어주는 교통수단은 중요했을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전철역이 얼마나 가까운가가 부동산 가격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많은 지자체가 경전철이나 트램 부설에 목을 매고 GTX 노선 계획에 민감해 하는지도 모른다.
한편 전차가 다니던 길은 내연기관 차량의 차지가 되었고 땅 밑으로는 지하철이 뚫렸다. 그 과정에서 궤도를 해체하기도 했지만 많은 곳에서 궤도 위를 그냥 도로로 포장했다고 한다. 그러니 서울 강북 주요 도로들 밑에는 아직도 전차 궤도가 깔려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사적 발굴 차원에서 전차 궤도를 파내고 복원하게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