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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탐험가 Oct 24. 2021

토지세 대신 하천 점용료 내는 아파트

아파트를 한번 떠 올려보자. 어떤 이미지가 떠 오르는가. 녹지로 둘러싸인 단지 안에 높이 솟은 아파트 건물들. 단지 외곽에는 편의점과 식당, 병원과 피트니스 센터 등 아파트 주민을 위한 편의 시설이 가득한 상가들. 이런 모습들이 떠 올려지지 않는가.


단지형 아파트와 거리형 아파트


우리나라 아파트 대부분은 단지 안에 있다. 1970년대 중반 강남 일대, 그리고 이촌동과 잠실 등지에 들어선 아파트 단지들이 그 시초였다. 재개발이나 신도시 개발은 단지형 아파트 건축을 추구한다.


아파트 단지는 주변과 구분하고 외부인을 차단하는 기능이 있다. 그 주변은 다른 아파트 단지나 업무·상업 시설일 수 있고, 연립주택과 같은 다른 형태의 주거 공간일 수 있다. 지금의 아파트는 그곳에 거주하지 않는 사람들은 접근하기 어렵게 설계되었다. 아파트라는 주거 공간이 안전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주거 형태로 사람을 구분 짓는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경기도 성남의 아파트 단지들



새로 짓는 아파트 단지는 주로 도심과 떨어진 곳에 들어선다. 사람들이 많이 살 수 있도록 높게 그리고 많은 동으로 지어야 한다. 그래서 택지를 상대적으로 쉽게 확보할 수 있는 도심 외곽이나 새로운 도시에 개발해야 경제적이다. 


하지만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반에는 서울 도심 중심가에다 아파트를 건축했다. 여러 채가 들어선 단지가 아니고 주로 한 채인 나 홀로 아파트다. 건축가 황두진은 이러한 아파트를 ‘거리형’ 아파트라 정의했다.


단지형이 널찍한 땅에 건물들이 섬처럼 놓여 있는 유형이라면, 거리형은 건물과 거리가 밀착되어 있는 유형이다.


황두진이 쓴 <가장 도시적인 삶>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는 거리형 아파트가 길과 가까워 1층에는 자연스럽게 가게가 들어서 그 길에 활력을 불어넣는다고 했다. 


내가 서울 강북 도심을 걷다가 오래되고 특이한 건물이 있어 검색해 보면 거리형 아파트인 경우가 많았다. 물론 딱 봐도 주거 시설로 보이는 곳이 대부분 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건물도 있었다.


피어선아파트, 업무용 빌딩이 된 아파트


강북삼성병원 건너편 정동 사거리 인근의 한 건물이 그랬다. 건물 입구 간판에는 피어선 빌딩이라 쓰였지만 입구 기둥 팻말에는 ‘피어선 아파트’라 쓰여 있었다. 조금은 고풍스러운 폰트였다. 마지막 글자가 가려졌지만 경비원이 아파트라고 확인해 주었다.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의 피어선빌딩. 오른쪽 두 번째 건물.


피어선은 사람 이름이다. 미국인 ‘아서 태펀 피어슨(Arthur Tappan Pierson)’은 1910년에 한국에 온 기독교 선교사였다. 비록 6주 정도 머물고 미국으로 돌아가 이른 나이에 사망했지만 우리나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유언으로 세운 성경학교가 나중에 평택대학교로 성장한다.


평택대학교의 전신 ‘피어선기념성서신학교’ 재단에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 바로 ‘피어선 아파트’였다. 1971년 11월에 준공되었다.


주차장 입구의 피어선아파트라 쓰인 팻말


나는 이 건물을 오래전부터 봐 왔을 것이다. 한때 그 근처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으니 오다가다 봤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 이 건물이 아파트였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지난 여름이었다. 햇볕이 너무 뜨거워 주차장 입구 그늘에서 잠시 땀을 식힐 때 아파트라 쓰인 팻말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 건물은 아파트로 보이는 구석이 전혀 없다. 겉에서 보면 근처의 다른 건물들처럼 사무용 건물처럼 생겼다. 건물 관계자 또한 현재 사무용으로만 임대한다고 한다고 확인해 주었다.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의 피어선빌딩


피어선 빌딩이 아파트였던 흔적은 건물 뒤편에 남아있었다. 4층부터 11층까지 발코니가 있다. 예전에 빨래가 널렸을 그곳에 지금은 에어컨 실외기가 놓였다. 만약 이 곳이 아직도 아파트라면 길 건너 경희궁을 앞 마당처럼 사용했을 것 같다. 뒷 마당은 덕수궁 돌담길이었을 테고.


피어선빌딩과 가까운 정동과 돈의문, 옛 서대문 일대는 주택이 많은 시절이 있었다. 피어선빌딩이 아파트로 준공된 즈음 아마도 세련된 주거 시설로 주목을 받았을 테지만 그 일대가 업무 중심 지역으로 뜨면서 자연스럽게 사무실 용도로 바뀌었을 것이다.


이 건물이 입지가 좋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건물 1층에 스타벅스가 자리한다. 


서소문아파트, 하천 위에 들어선 아파트


서울 도심 대부분은 거리 구획이 바둑판처럼 생겼다. 많은 도로가 똑바르게 건설되었다. 하지만 완만하게 휘거나 크게 곡선을 이루는 도로도 있다. 지형지물을 피해서 그렇게 된 곳도 있지만 그런 곳 대부분은 하천을 복개한 도로일 때가 많다. 


지하철 서대문역 인근 적십자병원과 이화여고 옆으로 곡선을 이루는 도로가 있다. 그 아래에는 만초천이 흐른다. 만초천은 무악재 부근에서 남쪽으로 흐르기 시작해 서대문을 거쳐 서울역 뒤편의 청파로를 지나 원효대교 근방에서 한강과 합류하는 하천이다.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서소문아파트


만초천 흐름의 중간에 서소문아파트가 있다. 다시 말해 만초천을 복개한 자리 위에 아파트를 지었다. 1971년에 준공된 서소문아파트는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 바로 옆에 자리한다. 


서소문아파트 소유주들은 토지세를 내지 않는다. 대신 구청에 하천 점용료를 낸다. 사실상 하천 위에 건축된 건물이니 소유주들은 건물 지상권만 가진 셈이다. 이 건물을 양 끝에서 바라보면 초승달처럼 휜 것을 알 수 있다. 하천 흐름을 따라 지어서 그렇다. 길 건너 이화여고 쪽 휘어진 길과 연결하면 옛 만초천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다.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서소문아파트. 만초천 흐름따라 휘어졌다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서소문아파트. 만초천 흐름따라 휘어졌다


서소문아파트는 약 100m 길이 7층 높이의 건물이다. 1층에는 식당과 카페가 들어섰고 2층부터는 아파트다. 그러고 보면 주상 복합 아파트라 할 수도 있겠다.


건물 옆 보도 따라 네모난 시멘트 뚜겅이 여럿 있다. 복개한 하천으로 내려가는 입구다. 우리나라에서 하천을 복개할 때는 주로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프리캐스트(PC) 박스형 수로를 묻고 그 위를 포장한다. 그리고 지하 수로가 된 하천 관리를 위해 곳곳에 드나들 수 있도록 덮개를 설치한다. 


만초천을 복개한 흔적. 저 덮개 아래에 만초천이 흐른다.
서소문아파트와 뒷 골목 식당가를 연결한 통로


서소문아파트에는 아홉 개의 출입구, 혹은 계단실이 있는데 그 입구마다 동 숫자가 적혀있다. 그러니 서소문아파트는 1동에서 9동까지 있는 셈이다. 계단참에서 두 집이 마주보는 전형적인 아파트 구조로 건축되었다. 


건물 중간에는 뒤편 골목과 연결되는 출입구를 뚫어놓았다. 어쩌면 골목과도 같다. 서소문아파트는 주변을 분리하는 장벽이 되기보다는 서로를 잇는 교량과 같은 역할을 오랫동안 맡아온 듯했다.


서소문아파트 옆으로는 기찻길이 지난다. 서울역과 가좌역 혹은 수색차량기지를 오가는 열차들이 쉬지 않고 오간다.


기찻길 옆 동네에는 빈티지스러운 가게들이 자리한다. 서소문아파트 1층 가게들과 그 뒤 골목 식당들과 함께 기찻길 마을 특유의 정감을 보여주는 듯하다. 물론 여기도 코로나19의 여파가 있을 테지만.


서소문아파트는 기찻길 옆동네이기도 하다. 오른쪽 담장 너머로 기차가 다닌다


세월의 흐름을 견딜 수 있을까


지은 지 50년 정도 된 서소문아파트는 머지않은 미래에 헐릴 듯하다. 국토부는 지난 8월 미근동 일대를 재개발하겠다고 밝혔다. 서소문아파트도 여기에 포함된다. 하지만 서소문아파트는 건축법상 재건축이 불가능하다. 하천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자리는 공원이 될 전망이다. 


서울 강북에는 지은 지 50년 즈음 된 나 홀로 아파트가 꽤 남아있다. 충정로의 미동아파트, 용산의 원효아파트와 삼각아파트 등이 그렇다. 거기 주변도 재개발 소문이 솔솔 흘러나오고 있다.


한때 세련된 주거 시설로 각광 받으며 거리에 활력을 불어넣었을 연륜 깊은 나 홀로 아파트들이 머지않은 미래에는 사진이나 문헌으로만 볼 수 있는 과거의 유적이 될 듯싶다.


※ 참고 자료


황두진, 《가장 도시적인 삶》, 반비

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하천》, 서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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