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시 탐험가 Oct 24. 2021

세운상가, 세계의 기운이 모인 곳이 되었을까

남산에서 강북 도심을 둘러보면 시선을 멈칫하게 하는 풍경이 있다. 일명 ‘세운상가군’이다. 종로부터 남산 입구까지 거의 일직선으로 이어진 건물군을 말한다.


서울 강북 도심의 주 도로는 동서 방향으로 흐른다. 종로, 을지로, 퇴계로처럼. 강북 도심도 이 흐름에 맞춰 형성되었다. 하지만 ‘세운상가군’은 남북으로 길게 이어졌다. 거의 1km에 달한다. 하늘에서 내려본다면 서울 도심을 좌우로 가로막는 장벽으로 보일 수도 있다. 


세운상가군은 주요 도로를 경계로 건축된 4개의 건물군을 일컫는다. 그런데 각 건물을 겉에서 보면 한 동이지만 내부에서 두 구역으로 구획이 나뉜다. 각 건물 남과 북 입구에도 서로 다른 이름의 간판이 걸렸다. 세운상가군은 간판으로만 보면 7개(원래 여덟 동이었으나  한 동은 철거됨) 건물로 이루어졌다.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세운상가군. (그래픽=뉴스포스트 강은지 기자)


세운상가 터는


지금의 세운상가군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그 터의 배경을 소환해야 한다. 종묘광장공원 건너편에서 대한극장 앞까지 연결되는 이 터는 원래 일제강점기 말 ‘소개공지대’였다. 혹시 미군의 공습에 화재가 발생해 주변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비워 놓은 공간이었다. 물론 이곳에 살던 주민들을 내몰고 집들은 허물어 공터로 만들었다.


해방 후 공지로 남은 이 땅에 빈민들이 들어와 살았다. 이런 현상은 전쟁 후에 더욱 심해져 종묘 앞부터 남산 아래까지 빈민촌을 형성했다. 주변으로 다양한 상권이 들어서기도 했지만 이 지역은 ‘종삼(종로3가를 의미)’이라는 윤락가로 유명해진다.


서울시는 도시 계획상 ‘도로’여야 할 이곳에 빈민촌은 물론 사창가가 들어선 것에 고민한다. 그렇게 나온 대안이 종묘 앞에서부터 남산 아래까지 건물로 잇는 것이었다. 폭 50m에 길이는 거의 1km에 달하는 거대 프로젝트였다.


이 계획을 위해서는 먼저 정리가 필요했다. 윤락가 단속이 이루어졌고, 철거 또한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1966년 6월에 시작한 철거는 불과 몇 달만인 8월에 완료된다. 


완공 초기의 세운상가군. 남북으로 거의 1km에 걸쳐 이어졌다. (출처: 나무위키)


세계의 기운이 모이는 곳?


서울시가 계획한 세운상가군은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안을 바탕으로 1966년 착공해서 1968년에 완공되었다. 세운상가(世運商街)라는 이름은 '세계의 기운이 모이는 곳'이 되라는 염원을 담았다.


애초 계획에는 모든 건물을 공중보행데크(Elevated Pedestrian Deck)로 연결해 종묘부터 남산까지 이어지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청계천로, 을지로, 마른내길 등 도로를 경계로 건물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이 도로들 사이로 독립된 건물들이 들어섰다. 


세운상가군은 또한 ‘주상복합건물’이었다. 업무 공간과 주거 공간의 쾌적한 환경을 위해 공중공원을 제공하려 했다. 햇빛과 바람을 끌어들이는 ‘아트리움’도 도입하려 했다. 하지만 최초의 계획에서 많이 변경되었다.


그 이유는 이 사업에 뛰어든 대형 건설업자들의 독자적 프로젝트로 변질된 때문이었다. 건축 계획을 서울시가 세우고 설계도 서울시에서 위촉한 건축가가 설계한 일종의 공공 프로젝트였지만 건물 세우는 데에는 개별 건설업자들의 이익이 더 중요했다. 

진양상가 즈음에서 세운상가 방향을 바라본 광경. 멀리 종묘와 북한산 자락이 보인다.


결국 ‘세운상가군’은 크게 4개의 건물군으로 나뉘고, 각 건물군은 다시 2개의 구획으로 나뉘는, 어떻게 보면 8개의 (건설업자에 의한) 독립된 건축 프로젝트로 완성되었다.


4개의 건물군은 현대·세운상가(현대상가는 2009년에 철거), 청계·대림상가, 삼풍상가·풍전호텔(지금은 삼풍넥서스와 호텔 PJ로 변경), 그리고 신성·진양상가이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세운상가 빼고 나머지 세 개의 건물 남과 북 입구에는 서로 다른 명칭의 간판이 붙었다. 


짧은 영광, 기나긴 침체


1968년에 세운상가군이 완공되자 이곳은 서울의 랜드마크가 된다. 1층에서 4층까지의 상가는 백화점이 활성화되기 전 쇼핑의 명소가 되고, 5층부터 들어선 실평수 20평형대 아파트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최고급 아파트로 자리매김한다.

세운상가 내부. 한때 전자제품 쇼핑의 메카였다


세운상가의 아파트. 예전에는 엘리베이터도 있던 고급 아파트였다. 지금은 작업실과 사무실이 들어섰다


하지만 영광은 짧았다. 1970년대 들어서자 명동에서 활성화된 백화점들로 인해 쇼핑의 명소라는 타이틀을 잃는다. 이촌동과 여의도, 그리고 강남에 들어선 아파트 단지들로 인해 고급 주거공간이라는 지위도 넘겨준다.


그나마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전자제품과 컴퓨터용품으로 명맥을 유지했으나 용산에 전자상가가 건설되자 세운상가 일대의 상권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 시기 불법 복제 영상물과 게임물 유통으로 새로운 명성(?)을 떨쳤다. 세운상가는 한때 잠수함과 인공위성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전설이 깃든 곳이었다.

세운상가의 예전 작업실을 재현한 전시 공간.

애초 슬럼화하던 지역을 재개발해 들어선 세운상가군이지만 이 지역은 또 다시 슬럼화를 겪는다. 새로 개발된 강남 지역은 물론 재개발된 강북 도심의 다른 지역과 달리 이곳은 계속 낡고 허름해져 갔다. 나름의 상권이 있었지만 낙후되어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이는 역대 서울시장들의 고민이었다. 그리고 업적이 될 기회이기도 했다. 세운상가군과 그 일대는 ‘도시재생사업’의 좋은 아이템이 된다.


서울 종로의 세운상가 주변. 재개발이 진행 중이다.
서울 종로의 세운상가 주변. 재개발이 진행 중이다


도시재생 그 후


오세훈 서울시장 1기 시절인 2009년에 세운상가 일대를 허물고 녹지축을 조성해 개발한다는 계획을 세웠었다. 반대도 많았지만 여러모로 무리수가 있어 흐지부지되었다. 한편 박원순 서울시장은 2015년부터 ‘세운상가군 공공 공간 조성사업’을 진행한다. 


이 계획은 세운상가군은 물론 주변 지역을 함께 개발하는 것이다. 기존 커뮤니티를 존중하여 점진적 정비를 유도하고, 기존의 역사와 문화 환경을 고려해 개발한다는 목적이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세운상가군의 모든 건물을 ‘공중보도데크’로 연결하는 데에 있다. 최초 세운상가 건설 계획에 나온 내용이기도 하다. 계획대로라면 종묘 앞부터 남산 입구까지 공중보행로를 통해 쭉 연결될 예정이다.

세운상가와 청계상가를 공중보행로로 연결했다. 다른 건물들도 연결 공사가 진행 중이다
세운상가 공중보행로의 카페와 식당


현재는 세운상가 3층과 그 건너편 청계·대림상가 3층이 보도로 연결되었다. 나머지 건물들은 현재 공사가 진행 중이다. 정비가 완료된 공중보행로에는 창업공간을 만들어 젊은 벤처인들을 유치했고 세운상가 일대의 기술자들과 협업하게 했다. 또한, 카페와 음식점, 그리고 전시장도 들어섰다. 


여기에는 걷기 좋은 건물군을 만들어 관광객을 유치하겠다는 서울시의 의도가 깔렸다. 현재 이곳에는 방송에 소개돼 유명해진 카페와 식당이 여러 곳이 있다. 청계·대림상가 입구에는 드라마 '빈센조'에 나온 장소라는 플래카드도 걸렸다. 그래서일까 젊은 사람들이 꽤 보였다.


물론 세운상가 일대를 살리기 위한 여러 노력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는 당장은 알 수 없다. 다만 이런 변화가 단순히 미관 개선에만 그치는 것은 아닌지, 유명해진 다른 거리처럼 젠트리피케이션이 벌어지는 것은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세운상가 입구의 로봇 조형물. 이곳을 첨단 산업 기지로 만들겠다는 은유가 담겼다

※ 참고 자료


서울특별시, '세운상가 재정비촉진지구 계획(안)'

염복규,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이데아

강승현 심우갑, '1960~1970년대 서울 상가아파트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

손정목, '아! 세운상가여!', 국토연구원

윤승중, '주상복합건축: 세운상가 아파트 이야기, 대한건축학회

장용승 김택빈, '세운상가 공공공간 활성화 프로젝트를 통해 느낀 제도상의 제안', 건축과 사회


이전 08화 한강 백사장서 ‘강수욕’ 즐기던 시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