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 트인 바다에서 판소리 장단에 맞춰 춤인지 복싱인지 모를 기이한 몸동작을 하는 남자. 후경엔 흰 한복을 갖춰 입은 여자가 장구를 치고 있다. 해가 떠오르고 있는 새벽녘 바다의 자연광은 영화 <버닝>의 헝거댄스 시퀀스를 연상케 하며 롱 쇼트로 잡은 남자의 쉐도우 복싱은 비장한 거 같으면서도 왠지 장난 같고 진지한 거 같으면서도 조금 우스워 보인다. 진지함과 우스움의 결합. 이 오프닝의 기묘한 분위기가 2시간짜리 <뎀프시롤>의 톤 앤 매너다.
<뎀프시롤>은 캐릭터 구성에 단점이 많은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은 판소리 복서 병구지만 민지와 관장, 병구와 같이 판소리 복싱을 만들어낸 한복소녀 역시 영화의 핵심 인물이다. 하지만 병구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전부 병구를 위한 부속품처럼 활용된다. 민지와 한복소녀는 병구를 각성시키기 위한 제물 혹은 성녀의 역할을 할 뿐이고 관장은 서사에 드라마틱함을 칠하기 위한 윤활유 역할, 배우 김희원의 감탄스러운 연기력에 한껏 기대 개그를 뽑아내는 자판기의 역할을 할 뿐이다. 특히 해리가 연기한 민지 캐릭터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덕선이의 그림자처럼 보인다. 이러한 선명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뎀프시롤>은 판소리 복싱만큼 매력적인 영화다. 밸런스를 완벽하게 포기하고 변칙성에 힘을 실어 승부를 보는 프리스타일 복서의 영화답게 캐릭터의 밸런스를 포기하고 촬영과 편집에 힘을 실어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다 오프닝 시퀀스는 당연하게도 사방이 탁 트인 열린 공간이다. 과거의 병구는 사랑하는 여자와 사랑하는 복싱을 할 수 있었고 아마 그 시기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자유로운 시기였을 것이다. 바다 시퀀스 바로 뒤에 붙은 컷은 병구가 사방이 꽉 막힌 좁은 방에서 일어나는 씬이다. 햇볕도 잘 들지 않는 좁은 다락방에 사는 현재의 병구는 사랑하는 여자도, 복싱도 잃었다. 이처럼 인물의 상황과 심리에 조응한 열린 공간과 닫힌 공간의 대비는 러닝 타임 내내 변주되어 등장한다.
<뎀프시롤>은 공간의 대비 말고도 발상의 대비에 조응한 촬영도 선보인다. 독실한 신자인 관장이 교회에서 기도를 하는 씬이 여러 번 반복되는데 이 씬들은 전부 같은 위치에 카메라를 놓고 진행된다. 인물들이 어떤 대화를 하건, 어떤 동선으로 등장하고 퇴장하건 상관없이 항상 카메라는 같은 위치에서 교회 씬을 찍는다. 그러나 단 한 씬, 다른 구도로 찍힌 교회 씬이 등장한다. 교환이 체육관을 떠나고 체육관 마저 재개발 될 위기에 처하자 관장은 시대가 변했다며 모든 것을 포기할 것처럼 한탄한다. 한탄을 듣고 교회를 나간 병구가 교회 창문을 열어젖히고 관장에게 질문한다. “근데 시대가 끝났다고 우리가 끝난 건 아니잖아요?” 바로 이 씬에서 카메라는 집요하게 고집하던 구도를 버리고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는 구도로 교회 내부를 찍는다. 그리고 드디어 관장은 병구에게 복싱을 하자고 제안한다. 보수성의 상징인 교회 안에서 오래된 체육관에 집착하는 관장의 발상이 전환되는 순간을 촬영으로 영리하게 시각화한 것이다.
영화의 리듬감은 다양한 연출 방식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리듬감에서 결국 가장 중요한 요소는 편집이다. 편집의 힘이 아닌 다른 힘으로 리듬감을 만들어 보려는 시도는 투박해 보이기 쉽다. 예를 들면 <타짜2>에서 등장하는 카 체이스 씬은 차가 빙글빙글 돌고 배경음악으로 나미의 빙글빙글이 나온다. 음악과 화면의 기계적인 결합이 만든 리듬감은 촌스러워 보인다.
<뎀프시롤>에도 <타짜2>가 보여준 기계적 리듬감을 보여주는 씬들이 존재하긴 한다. 하지만 그 씬들은 잽에 해당하는 잔기술일 뿐이다. <뎀프시롤>은 휘몰이 장단처럼 살아있는 리듬감의 편집이 돋보이는 영화다.
영화 초반, 체육관의 개구쟁이 어린이 콤비가 고장 난 티비를 마대로 쳐서 고치려 하자 병구가 ‘기계는 쳐서 고치는 게 아니야’ 라며 이들을 저지한다. 한참 소동을 피우는 이 세 인물들의 시퀀스는 병구가 실수로 마대를 부숴버리며 마무리된다. 이 컷 바로 뒤에 붙은 컷은 작동하지 않는 세탁기 앞에 선 병구다. 병구는 주먹으로 세탁기를 쳐서 세탁기를 작동시킨다. 그리곤 고물 세탁기의 시끄러운 소음에 맞춰 선보이는 판소리 복싱.
원투 이후 진도를 더 나가고 싶은 민지가 “코치님“ 하며 병구를 부른다. 동시에 교환이에게 완전히 정신이 팔려 병구는 안중에도 없는 관장은 전화 상대에게 ”임관장“ 하며 교환이의 시합을 잡아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프레임은 ”코치님“을 부르는 민지의 클로즈업과 ”임관장“ 하며 애원하는 관장의 클로즈업을 빠르고 반복적으로 교차하며 그 사이에 낀 병구의 무기력한 얼굴을 보여준다. 이 컷 바로 뒤에 붙는 컷은 병원에서 펀치 드렁크 진단을 받는 병구의 얼굴이다.
‘내용을 형식에 순응 시키기. 의미를 리듬에 복종 시키기.’ 프랑스 영화의 거장 로베르 브레송의 격언이다. <뎀프시롤>의 휘몰이 장단 편집술이라면 브레송 감독의 이 격언에 충분히 부합했다고 생각한다.
영화 후반 굉장히 이상한 씬이 등장한다. 병구가 교환과 링 위에 맞붙을 때, 영화는 앞에서 보여줬던 기이한 연출들을 전부 포기한 듯 진부한 스포츠 영화, 혹은 성장 영화의 클리셰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처럼 보인다. 위기의 순간에 병구가 지난 기억들을 회상하고, 쓰러질 듯 말 듯하는 병구의 육체는 슬로우 모션으로 포착되며 관장의 걱정어린 얼굴은 클로즈업으로 잡힌다. 그런데 이때 느닷없이 이상한 씬이 등장한다. 병구의 지난 기억들을 회상하는 플래시백 씬에서 일어난 적이 없는 조작된 기억이 회상되는 것이다.
교환과의 시합 전. 병구와 민지가 마지막으로 만난 곳은 체육관이었다. 그곳에서 민지는 장구를 치고 병구는 신명나게 판소리 복싱을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에서 민지가 아픈 병구에게 시합에 나가지 말라며 이렇게 다그친다. “왜 이렇게 사람이 이기적이에요?”. 이에 병구는 “죄송합니다. 근데 민지씨가 죽기 전에 후회하고 싶지 않으면 하고 싶은거 다 하랬잖아요” 라고 답한다. 이게 관객이 본 병구의 원래 기억이다. 하지만 링 위에 서 있는 위기의 병구는 다른 기억을 꺼낸다. 그 기억에서 병구는 “왜 이렇게 사람이 이기적이에요?” 라는 민지의 질문에 “이번 시합이 아무 의미 없다는거 알아요. 하지만 마지막으로 링 위에서 보여주고 싶은게 있어요”라고 답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민지의 휘몰이 장단 연주와 병구의 판소리 복싱. 병구는 경험 한 적 없는 기억을 회상하고 있다. 이것은 병구가 앓고 있는 펀치 드렁크와는 관련이 없는 증상이다. 뇌세포 손상증의 일종인 펀치 드렁크는 기억을 상실하는 증상은 보여도 기억을 전혀 다르게 왜곡하는 병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주 넉넉하게 생각해서 건망증이 심해 기억을 살짝 착각했다고 우겨도 앞으로 나올 씬들은 그런 너른 이해를 용납해주지 않는다. 병구의 조작된 플래시백이 나오기 전, 사실 2라운드에서도 병구는 판소리 복싱을 잠깐 선보인적이 있었다. 2시간 동안 함께 한 관객들에게도 여전히 낯설고 기묘한 이 복싱 기술은 시합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고, 시합 상대인 병구 마저 당황시켰다. 조작된 회상 이후 병구와 판소리 복싱은 동시에 각성하여 2라운드에서 선보인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파격을 보여준다. 심지어 이번엔 진짜 장구로 휘몰이 장단을 연주하는 민지까지 있다. 하지만 경기장의 그 누구도 2라운드와 같은 동요를 보이지 않으며 사실상 경기장에 난입한 거나 마찬가지인 민지를 저지하는 사람 역시 없다. 과연 이것은 현실인가? 이것 역시 조작된 기억인가?
<뎀프시롤>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라는 힐링의 시대에 새로운 치료법을 제시한다. 사실 치료라기 보단 마취에 가깝다. ‘당신의 잘못이긴한데... 뭐 어쩌라고요. 잊을 순 없겠지만 그냥 다르게 기억해버리세요. 죽을 때 후회하기 싫으면.’ 영화가 제시한 치료법은 역설적으로 치료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우리는 우리의 과오를 넘기 위해선 정면에서 응시해야지 잊어버리고 회피하는 것만으로는 치료 할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다. 엔딩 씬, 링 위에서 뻗어버린 병구는 상처를 결국 극복하지 못했다. 조작된 플래시백으로 아물지 않은 상처를 덮어버린 병구의 앞엔 올 리가 없는 조작된 플래시 포워드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결국 꿈속의 꿈이 아닌가? 병구는 미소를 지으며 스스로 환상 속에 갇히기를 택했으니 이것은 해피엔딩인가? 아니면 현실을 외면한 3류의 치졸한 정신승리인가? 판단은 관객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갈릴 것이다. 하지만 신명나게 스텝을 밟고 팔을 빙빙 돌리던 병구의 판소리 복싱은 우리의 어떤 방치된 감각을 납치한다. 병구의 토템은 여전히 돌고 있다. 그 토템을 쓰러트리고 싶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