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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Jan 01. 2021

2020년 최고의 영화 10편


아무런 권위나 공신력은 없지만 영화를 사랑하는 한 명의 팬으로서, 한 해 동안 신나게 영화들을 관람한 한 명의 관객으로서 2020년 최고의 영화 10편을 선정해봤다.


선정 영화들의 기준은 2020년 한 해 동안 한국에서 정식 개봉 한 영화들로 잡았으며 영화제에서 프리미어로 상영된 영화, 재개봉 영화는 제외했다.


순위는 필자의 개인적인 취향에 전적으로 의존해 선정한 것이므로 공감할 수 없거나 못마땅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각자가 생각한 리스트가 있다면 재미 삼아 비교하면서 보면 좋을 것 같다






10위. <작은 아씨들>

by 그레타 거윅


화려한듯하나 깊이 없는 화면은 굳건한 듯 하나 줏대 없는 조의 신념을 닮았다. 부분적인 쇼트 하나, 대사 하나, 편집 하나들은 나름의 인상을 남기지만 이 파편들이 모여 전체를 이룬 영화는 인상적인 개별 부분들 이상의 화학작용을 만들어내지 못해 아쉽다. 그럼에도 주인공 조가 결국 현실과 타협하여(혹은 승복하여) 만들어낸 대중소설 '작은 아씨들' 처럼 해피엔딩을 기대하며 뜨거운 마음으로 서사를 마주하게 만드는 영화의 기개만큼은 뛰어나다.






9위. <도망친 여자>

by 홍상수


별 의미도 없는 것 같은 무심한 대화들 속에 날 선 저의가 꿈틀거리고 단순한 일상을 반복하는듯 하면서도 그 이면엔 복잡한 감정이 일렁인다.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고 인물은 쉴 새 없이 떠며 프레임 밖의 무언가는 항상 프레임 속 인물의 일상에 균열을 만든다. 홍상수의 작품이 매번 그러하듯 이 영화 역시 홍상수의 현재 심경에 대한 영상 에세이처럼 느껴진다. 전작 <강변호텔>에서는 마치 죽고 싶어 하는 것처럼 쓸쓸해 보였는데 <도망친 여자>는 도망칠지언정 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살고자 하는 의지를 생기라 부르진 않겠다. 생기보다는 체념에 가깝다. 홍상수와 김민희는 5년이라는 시간을 거쳐 이제 체념했고 그 어쩔 수 없는 굴레 속에서 소소한 재미를 찾아냈나 보다.






8위. <테넷>

by 크리스토퍼 놀란


어찌 보면 진부한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에 인버전이라는 '놀란'스러운 개념을 더했다. 보통의 시간 여행 영화라면 과거 혹은 미래의 시점으로 뿅! 하고 이동해버리고 말 텐데 <테넷>은 시간을 거스르고 싶다면 그 거스른 시간만큼 역행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어떤 블록버터도 역행 과정 자체를 영화의 핵심 소재로 삼은적이 없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영화다. 때문에 <테넷>에서는 우리가 그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액션, 본 적 없는 추격전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특이함에 너무 취해있었던 걸까? 놀란 감독은 '과정'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감정은 놓쳐버리고 만다. 여기서 감정은 극 중 캐릭터들의 감정선뿐만 아니라 도저히 스토리를 이해하따라갈 수 없는 관객들의 당혹스러운 감정을 포함한다. "이해할 수 없으니 느껴라"라는 캐치프라이스는 야속하지만 감독의 거대한 야심만큼은 인상적이다.






7위. <페인 앤 글로리>

by 페드로 알모도바르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자전적인 고백처럼 보이는 이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원색적이고 강렬하지만 세련된 미장센이 돋보이는 영화다. 고통받는 예술가는 술과 마약에 취해 상처로부터 도피하지만 이 도피는 역시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다. 그런 그를 끝내 다시 일으켜 세우는 건 결국 예술이다. 노년이 되어 돌아본 인생의 연대기에서 가장 순수했던 순간 가장 중심에 있었던 건 예술이었음을, 고통과 영광은 항상 동침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깨닫게 된 순간, 예술가는 마침내 안락한 환희를 마주하게 된다. <페인 앤 글로리>는 이 환희로 가는 코카인이다.






6위. <남매의 여름밤>

by 윤단비


2020년 최고의 한국 영화. 최근 한국 독립 영화들은 '독립'이라는 단어가 아까울 정도로 비슷한 양산형 성장 영화들의 연속인데 <남매의 여름밤>은 쓰레기 더미에서 핀 꽃과 같은 영화다. 무엇보다 양산형 독립 영화들이 성장 과정에서 생기는 고통을 그저 전시하고 과시하는데 급급했던데 반해 이 영화는 아픔마저 우리 인생의 한 조각이고 유대라고 이야기한다. 아련한 정서를 차분하게 이미지로 표현하는 연출이 돋보이며 캐릭터를 다루는 감독의 섬세한 시선이 인상적이다. 윤단비. 주목해야 할 감독이 나타났다.






5위. <조조 래빗>

by 타이카 와이티티


<조조 래빗>은 공포 속에서 태어나고 공포 속에서 눈이 멀어버린 우리가 주변의 가족, 친구, 이웃들을 괴물로 만들고 있지 않느냐고 위트 있게 묻는다. 배경은 2차 세계 대전이지만 코로나 사태를 겪는 현재에도 관통되는 시사성이 있다.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낙관적인 휴머니즘이 돋보인다. 스칼렛 요한슨은 작년 <결혼 이야기>에 이어 올해 <조조 래빗>에서도 자신이 단순히 인기만 많은 프랜차이즈 스타가 아닌 진짜 연기를 하는 배우임을 멋지게 증명했다.







4위. <1917>

by 샘 멘데스


<기생충>만 아니었다면 2019년 아카데미를 휩쓸었을 불운의 명작. 초특급 스타 배우들을 캐스팅해놓고도 조연으로 활용하고 무명 배우 둘을 주연으로 내세웠다. 샘 멘데스 감독은 전쟁이라는 괴물과의 사투에서 진정 희생하고 분투하는 건 선택받은 특별한 사람이 아닌 우연히 호명된 평범한 우리들이라고 기획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영화가 아니라 그때그때 퀘스트를 수행하는 게임에 가깝지 않느냐는 비판도 있지만 시각적으로 황홀함을 주는 촬영과 전쟁터의 질감을 그대로 살린 미술을 너무 무시한 평가가 아닌가 싶다.  <1917>이 앞으로 헐리우드에서 제작될 텐트폴 전쟁 영화들이 탐낼만한 경지에 오른 영화임은 분명하다.






3위. <라이트하우스>

by 로버트 애거슨


그리스 신화에 대한 은유의 농도가 매우 짙지만 신화에 대한 이해도가 없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영화다. 개별적인 디테일과 은유를 하나하나 따져보며 퍼즐 맞추기를 하는 것보다 압도적인 이미지와 불안한 광기에 잠식되는 캐릭터를 구경하는 재미가 더 뛰어나다. 어떤 영화들은 의미를 발견하기보다 의미에 대한 욕구를 초월해야 더 빛나는 영화들이 있다. <라이트하우스>는 해석의 욕구보다 이미지 자체가 주는 강렬함의 깊이가 더 깊은 영화다. 로버트 패티슨, 윌리엄 데포 두 주연 배우의 뛰어난 연기 앙상블 역시 압권이다.






2위. <마틴 에덴>

by 피에르트 마르첼로


사랑을 다룰 때는 차갑고 정치적인 메시지를 다룰 때 오히려 더 뜨거운 연출을 보았을 때 감독이 어느 장르에 더 방점을 찍고 싶어 했는지가 보인다. 하지만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로 봐도 매혹적이고 지배계급과 노동계급 간의 갈등을 다룬 정치 영화로 봐도 통찰력 있다. 특히 비약적인 생략을 통해 만드는 서사의 리듬감, 적재적소에 푸티지로 소환되는 플래쉬백의 인상이 매우 훌륭하다. 올해 편집이 가장 뛰어난 영화.






1위. <언컷 젬스>

by 베니 샤프디, 조슈아 샤프디


샤프디 형제는 최근 헐리우드에서 가장 에너지 넘치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 중 하나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관객들을 흥분시켜 아드레날린만을 뽑아먹는 영화를 만들지는 않는다. 전작 <굿 타임>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의 주된 관심사는 폭발하는 에너지가 아닌 파국과 성공을 극단적으로 오가는 낙차에 있다.


<언컷 젬스>에 대한 대중들의 평가는 극단적으로 나뉘는데 신기한 건 이 영화를 좋게 평가하는 사람과 나쁘게 평가하는 사람이 서로 비슷한 이유를 댄다는 것이다. 그 엇갈린 평가의 주내용은 '극단적 혼란스러움'으로 요약할 수 있다. 부정적 평가를 내린 사람들은 영화가 너무 어지럽고 산만하며 집중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사람들은 그 혼란스러움 때문에 <언컷 젬스>를 고평가 한다.


앞서 말했지만 <언컷 젬스>속 혼돈은 단순히 관객들을 약 올리고 흥분시켜 아드레날린만 뽑아먹으려는 연출적 개인기가 아니다. 카메라는 거칠게 클로즈업을 하고 대화 하는 사람을 잡지도 않는다. 인물과 배경선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포커스는 뭉개진다. 대사는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디테일해서 관객은 대화의 맥락을 대충 어림잡아야 한다. OST는 인물이 대사를 하는 와중에도 음량이 작아지지 않고 계속해 공격적인 씬스음을 낸다. 곤란한 상황에 빠진 주인공에겐 계속 문자가 오거나 전화가 울려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이 모든 연출들은 그냥 대충 던져진 우연적인 요소가 아니다. 샤프디 형제는 관객들이 주인공이 겪는 모든 감정과 스트레스를 관람이 아닌 체험 하길 원했다. 고도로 계산된 이 모든 혼란은 관객들이 도박 중독자 주인공이 세상을 보는 방식, 듣는 방식, 느끼는 방식으로 영화를 보게 만든다.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너무 빠르고 무섭다고 불평할 수는 있다. 하지만 너무 빠르고 무섭다는 이유로 막 만든 롤러코스터라 지적하는 건 잘못된 일이다. <언컷 젬스>는 너무 빠르고 무서운 롤러코스터이자 혼돈의 걸이다.






총평


2020년은 인류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전염병은 각종 사회 기반 시설은 물론 우리의 일상마저 마비시켰다. 코로나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모든 분야에 큰 타격을 입혔지만 특히 한국 영화 산업에는 치명타를 입혔다. 한국 영화산업은 극장 매출이 기형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코로나는 이 극장 매출에 매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2020년 11월 극장 관객수는 359만 명이었고 이는 전년 대비 무려 80.7% 감소한 수치다.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큰 프랜차이즈를 가진 CGV도 명동, 동촌 등 서울 지점을 철수시켰고 아트하우스 운영, 독립영화 지원 등 각종 투자도 접고 있는 상태다. 코로나 사태가 언제 진정될지는 모르겠으나 한국 영화의 운명은 분명히 크게 격변할 것이다.


내 짧은 식견으로 앞으로의 한국 영화계를 예상해보자면 코로나 사태가 진정된다 해도(최소 내년 하반기는 되어야 할 거 같다) 이제 대규모 블록버스터들은 제작이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아예 그런 영화들이 없어진다는 건 아니지만 특정 분기들마다 천만 관객을 노리고 나타나던 텐트폴 무비들은 그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들 것이라는 예상이다. 대신 가성비 좋은 저예산 코미디 영화들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며 개체 수를 늘릴 것 같다. 올해 개봉작으로 예를 든다면 <오케이 마담>, <정직한 후보>, <담보> 같은 영화들이다. 대형마트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떳다방들이 우후죽순 들어오는 건 썩 유쾌한 상황이 아니다. 행복회로를 풀가동해보면 대규모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영화시장에 신선한 감독과 신선한 영화들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남매의 여름밤> 같은 작은 맛집들이 공실을 채운다면 얼마나 좋을까.


해외 영화계는 코로나 쇼크를 맞아 OTT 위주의 시장 재편을 구상 중이다. 이미 <원더우먼 1984>를 시작으로 2021년에 개봉하는 모든 워너브라더스 영화들은 OTT에서 동시 개봉을 하겠다고 선언을 한 상태다. 크리스토퍼 놀란, 드니 빌뇌브 같은 거물들은 영화 감상의 순수성을 주장하며 OTT 동시 개봉에 즉각 반발했지만 제작사 수천억의 비용이 들어간 대형 영화들을 무기한 연기 할 수는 없는 입장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결정이라고 본다. 불과 작년만 해도 OTT는 오리지널 작품을 극장에 걸기 위해 극장 체인과 치열한 협상을 해야 했었는데 이젠 모든 영화들이 OTT에 영화를 걸기 위해 달려드는 상황이다. 또한 OTT 오리지널, 독점 작품들의 퀄리티 또한 매년 더 좋아지고 있는 상황이라 코로나 사태 이후의 영화 시장 패권은 극장이 아니라 OTT가 쥘 확률이 높다. 넷플릭스는 2020년에만 <맹크>,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같은 수작을 선보였고 <언컷 잼스> 같은 걸작을 낼 수 있는 위력도 과시했다.


2020년 코로나는 한국 영화 산업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한 명의 영화인의 목숨도 앗아갔다. 그는 한국인 감독으로서 세계 영화에서 위업을 세운 재능 있는 감독이었다. 그의 모든 영화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한국 영화 역사에 걸작으로 기억될 영화였다. 그는 가장 뛰어난 감독은 아니었지만 가장 독특한 감성의 영화를 만들었으며 어쩌면 이제 앞으로는 절대로 나오지 못할 가장 유니크한 예술가였다. 그가 남긴 숱한 논란들 덕분에 누구도 선뜻 나서서 추모하지 못했지만 영화를 사랑하는 한 명의 팬으로서 김기덕 감독의 명복을 빈다.


2021년은 부디 차가운 시대의 공기 보다 따뜻한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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