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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Feb 08. 2019

낭만과 현실은 선택의 차이 <카이로의 붉은 장미>


우디앨런의 영화는 대부분 주인공이 현실의 고통과 환상의 유혹 사이에서 갈등과 선택을 반복하는 이야기를 테마로 삼는다. <카이로의 붉은 장미>는 우디앨런의 영화 중에서도 이러한 주제의식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 영화다.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경쾌한 뮤지컬 음악이 흘러나온다. 아직 주인공이 등장하긴커녕 스크린은 검은 화면에 오프닝 크레딧이 나오고 있는 중이지만 일단 음악이 먼저 나온다. 뮤지컬 음악이 울리는 빈 화면은 파티와 모험, 낭만이 가득한 영화 '카이로의 붉은 장미' 포스터의 클로즈업으로 전환된다. 곧이어 나오는 포스터를 바라보던 시실리아의 옅은 미소가 <카이로의 붉은 장미> 속 첫 인물 씬이다. 시실리아의 즐거운 포스터 감상은 영화관 지붕을 수리하던 영화관 직원의 실수로 인해 방해된다. 동시에 뮤지컬 음악 역시 중단된다. 환상 속 세상의 여행과 현실로의 귀환. 이 짧은 2분간의 오프닝 시퀀스는 82분짜리 영화의 모든 것을 압축한다.


시실리아의 시궁창 같은 현실 속 삶의 도피처는 영화다. 영화 속 세상에서는 모든 일일 술술 잘 풀리고 화려한 파티와 신나는 음악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시실리아가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길과 데이트하는 씬에서 키스를 할 때 왜 조명이 꺼지지 않느냐고 묻는 길에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가르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분명 환상의 세상은 시실리아에게 도피처이지만 환상 속에 매몰되어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인간이 아닌, 환상을 임시적으로 선택한 인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남편의 외도를 목격한 시실리아가 이제 남편을 떠나겠다며 가출했다가 영화관의 불이 꺼진 것을 보고 길을 헤매다 다시 집으로 귀가하는 장면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길은 시실리아와 달리 낭만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는 그냥 낭만 그 자체이다. 길은 본디 인간이 아니며 환상의 세상 속 허구의 인물이다. 그가 선택한 것은 영화 속 각본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 영화 밖 현실의 시실리아를 사랑하기로 한 것이다. 결국 그는 시실리아에게 선택받지 못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낭만을 고수한다. 그가 시실리아의 선택받지 못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낭만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시실리아는 그토록 낭만을 동경했지만 현실과 환상의 간극을 이해하는 현실 속 인물이었다. 그녀에게 영화 주인공의 낭만적인 사랑은 환상으로써, 영화 캐릭터로써 존재할 뿐이다.

극 중 '카이로의 붉은 장미' 속 배우가 이런 대사를 한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적이다'. 길을 연기한 현실 속 배우 톰은 <카이로의 붉은 장미>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 중 가장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선택을 한다. 현실은 영화와 달리 낭만만을 담지 않는다. 현실은 반칙이 난무하고 가난하고 폭력적이며 상스럽기까지 하다. 톰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시실리아에게 반칙을 쓰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톰도 분명 시실리아에게 흔들렸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배우로서 성공하는데 더 큰 뜻이 있다 한들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배우인 자신의 능력을 꿰뚫어 보고 진심으로 높게 평가해주는 (좀 대책 없지만) 사랑스러운 여자에게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냉혈한처럼 묘사되진 않았기 때문이다. 시실리아가 톰이 혼자 헐리웃으로 떠나버린 걸 알아버린 씬 뒤에 비행기 안에서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톰을 굳이 보여준 것은 그가 냉혈한은 아니라는 증거다.


<카이로의 붉은 장미>는 톰의 배신에 망연자실한 시실리아가 영화를 보다가 옅은 미소를 띠는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으며 끝난다. 아마 시실리아는 영화가 끝나면 다시 현실 속 남편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녀에겐 이제 다른 선택권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서 나왔던 시궁창 같은 현실을 반복할 것이다.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이 분명히 이 과정을 반복할 것임을 잔인하지만 낭만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디앨런 감독은 지독한 냉소 주의자다. 하지만 그는 낭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선은 악을 모르지만 악은 선을 안다' 는 프란츠 카프카의 말처럼 우디앨런은 낭만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더욱더 쓸쓸한 냉소를 묘사할 수 있었다. 잔인하고 시궁창 같은 현실 앞에서 우디앨런은 우리에게 1시간 반짜리 낭만적인 탈출구를 선택해보라고 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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