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 남아있는 중세의 왕궁들 2
오늘날의 루브르 박물관은 애초에는 파리시를 지키기 위해 지어진 중세의 성채였고, 이후 14세기부터 왕궁으로 역할을 수행했다. 루이 14세가 1682년 정궁을 베르사유궁으로 삼아 왕실을 모두 데리고 이사하기 전까지 루브르궁은 명실상부한 수도 파리의 정궁이었고, 역사의 심장부였다.
루브르 궁의 변천사 (1380-1739)
왼쪽 그림은 1380년 샤를 5세가 시테 궁에서 왕궁을 옮기던 시기의 모습이다.
오른쪽은 1622년, 프랑수와 1세가 중세의 성채를 허물고 르네상스 양식의 왕궁으로 개조를 한 후, 카트린 드 메디치가 튈르리 궁을 짓고, 앙리 4세가 튈르리 궁과 루브르궁을 연결한 그랑 갤러리를 지은 후의 모습이다.
왼쪽은 1663년, 루이 13세가 쿠흐 카레 Cour Carrée (정방형 마당)의 공사를 시작하고, 루이 14세가 공사를 이어받았는데, 베르사유궁으로 왕궁을 옮기면서 공사가 전면 중단된다.
오른쪽 1739년은 쿠흐카레의 공사가 완공된 이후의 모습이다.
점선으로 보이는 부분이 필립 오귀스트 때 지어지기 시작한 부분(12세기)이다. 중세의 성채를 허물고 서쪽 부분(붉은색)부터 프랑수와 1세가 르네상스 양식의 왕궁으로 개조하기 시작한다.
루브르궁이 샤토일 때. 건설 초기 모습 - 필립 오귀스트 때 (위 지도의 점선 부분)
루브르가 중세의 샤토로 지어지기 시작한 것은 1190년부터이고, 12년 후에 완공된다. 필립 오귀스트는 십자군 원정을 떠나면서 노르망디에 있던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가 파리를 침략할 때 방어를 위해 짓게 한다.
가장 가운데 높은 탑을 '동종 (Donjon)'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이 최후의 보루이자 왕이나 영주가 거주하고, 영주의 군대, 영주의 보물, 영주의 식량 등이 모여있는 성채의 중심 공간이다.
지금도 루브르 박물관의 지하에서 볼 수 있는 동종의 기초는 12세기의 흔적이다. 나폴레옹 3세가 루브르를 확장하면서 묻어버린 것을 미테랑 때 복원하여 지금처럼 관람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루브르 성이 루브르궁으로 바뀌었을 때 - 샤를 5세 (위 지도의 점선 부분)
샤를 5세(현명왕)는 1357년에 19세의 나이로 영국에 잡혀간 아버지 장 2세를 대신해서 섭정을 하던 중, 에띠엔 막셀의 봉기로 시테 성에서 위기를 맞는다. 시테 성은 당시 양쪽의 다리만 봉쇄하면 꼼짝없이 포위되는 구조라, 샤를 5세는 왕으로 즉위한 뒤 루브르로 왕궁을 옮기고 성채에서 왕궁의 모습으로 변모시킨다. 그리고 파리의 성벽을 확장하면서 바스티유 성채도 짓고, 벵센느 성도 확장하는 공사를 지휘한다.
루브르궁이 중세 성채의 모습에서 탈바꿈하여 이태리의 르네상스 양식의 궁으로 바뀌던 때 - 프랑수와 1세
현재의 Cour Carrée (정방형 마당)에서 서쪽 건물의 왼쪽 부분이다. 레스코 날개라고도 부른다. 왕실 건축가 피에르 레스코 (Pierre Lescot)가 건물을 짓고, 장 구종(Jean Goujon)이 조각을 했다.
그리고 각 건물들 마다 정면에는 문패를 달듯이, 지은 왕과 왕비의 이름 첫 자가 새겨진다. 루브르의 각 건물들이 지어진 시기와 짓게 한 왕이 다르기 때문에 건물에 새겨진 다양한 이름들의 상징을 찾아보는 재미도 솔솔 하다. 이름의 첫 글자로 만든 장식은 '모노그람'이라고 한다.
윗 줄의 왼쪽은 앙리 2세 (Henri II)와 카트린 드 메디치 (Catheriene de Medicis)의 H와 C의 조합인데, 그보다는 H와 D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사실, 앙리 2세의 애인 디안 Diane의 D자가 새겨진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 혹은 진실? 때문에, 나중에 카트린이 열심히 C자로 고친 곳도 찾을 수 있다.
가운데는 루이 13세 (Louis XIII)와 왕비 안 도트리쉬 (Anne d'Autriche)의 첫자를 딴 모노그람이다.
오른쪽은 루이 14세의 모노그람으로, L자를 두 개 반사되게 놓았다. 세 개 모두 자세히 보면 그 위에 왕관이 올려져 있다. 그리고 밑에 줄에는 나폴레옹의 모노그람이다.
뛸르리궁이 지어지던 때 - 카트린 드 메디치 (위 지도의 서쪽 짙은 점선 부분)
루브르궁과 뛸르리궁이 연결되던 때 - 앙리 4세 (위 지도의 연두색 부분)
튈르리 궁은 카드린 드 메디치가 아들 샤를 9세가 왕으로 즉위한 뒤, 결혼을 하면서 루브르궁은 며느리 왕비에게 자리를 내주고, 1564년부터 루브르궁과 가까운 곳에 자신의 궁와 정원을 짓기 시작했다. 튈(tuile)은 기와를 뜻하는데, 이 땅에서 기와를 만드는 진흙이 많이 나와 기와 제조장이 있던 곳이라 궁의 이름이 뛸르리(Tuilerie)가 되었다. 이 궁은 1871년 파리 코뮌 때 전소하면서, 10년간 고민 끝에 궁을 복원하지 않고 허물기로 결정하면서, 오늘날에는 뛸르리 궁에 딸린 정원만 남게 된 것이다.
튈르리 궁은 루브르궁과 떨어져서 왕이나 왕비가 두 궁을 왔다 갔다 할 때마다 거리를 지나야 하는 불편함이 있어서, 카트린 드 메디치의 사위였던 앙리 4세가 두 개의 궁을 연결하는 그랑 갤러리 건물을 짓는다.
위의 오른쪽 그림에서 보면 왕궁의 주변과 심지어 루브르궁의 Cour Carrée (정방형 마당) 가운데에도 건물들이 있다. 왕이 자신의 왕궁을 확장하고 싶어도, 이미 들어선 건물들을 사들이고 허물고 새로운 건물을 짓는 데는 시간과 절차,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어서 진행이 쉽지 않았다. 그러던 것을 나폴레옹 1세(주홍색 부분)와 3세(노란색 부분) 때에 전면적으로 건물을 밀어내고 그랑 갤러리의 대칭 부분을 만들어서 오늘날의 모습을 갖게 만든다.
루브르궁이 베르사유궁에 정궁의 자리를 내주었을 때 - 루이 14세
루이 14세가 베르사유궁으로 정궁을 옮긴 이후에 루브르궁은 왕실 아카데미들이 자리를 차지한다. 루이 14세의 재상 콜베르는 특히 과학과 기술을 장려했고, 루이 14세는 예술 아카데미를 후원했다. 그리고 루브르에서 그림을 대중에게 전시하는 살롱도 처음 시작한다.
루브르궁이 오른쪽 날개가 완성되어 전체의 모습을 갖추었을 때 - 나폴레옹 1세와 3세
미테랑 대통령에 의해서 이오밍 페이가 유리 피라미드를 건설했을 때 - 오늘날
미테랑 대통령이 워싱턴에 있는 내셔널 아트 갤러리를 보고 이오밍 페이를 루브르의 프로젝트 건축가로 선정한다. 페이는 루브르의 피라미드를 설계하기 위하 6개월 이상 루브르에 머물면서 구상을 했고, 루브르에 유리 피라미드가 들어가기까지 많은 사연들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파리에는 여러 유명한 건축가들의 작품들이 많이 모여있는데, 후일 이오밍 페이의 작품을 비롯하여 다른 건축가들의 작품도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전에, 다음에는 중세의 왕궁 시리즈 마지막인 벵센느 성에 대해서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