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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은둔자 Jul 25. 2017

시테궁 (생샤펠, 파리 고등법원, 콩시에르주리)

파리에 남아있는 중세의 왕궁들 1

시테궁은 불어로 팔레 드 라 시테 (Palais de la Cité)으로, 현재 파리 고등법원(Palais de la Justice)이다.

하지만 이곳은 파리 공작이 왕으로 선출되어 카페 왕조를 열었던 시기(10세기)부터 왕궁으로 쓰였다.

샤를 5세 (1338-1380, 현명왕)가 루브르로 왕궁을 옮기면서, 팔레 드라 시테는 왕궁의 기능을 잃는다.


시테궁 (팔레 드 라 시테, Palais de la Cité)는 프랑스의 왕궁 중 유일하게 팔레로 불린다. 대표적으로 루브르궁, 베르사이유궁, 벵센느성, 생제르망앙레성, 퐁텐블로성이 모두 불어로는 샤토로 불린다.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팔레 드 룩상부르그인데, 그것은 왕비가 왕이 죽고 나서 섭정을 하며 지었으니 예외로 하자. 이것은 왕비가 자신을 위해 이태리 풍으로 지은 왕비궁이다.)

다른 곳은 모두 샤토(château, 영어로 캐슬 castle)인데, 이곳만은 팔레(palais, 영어로 팰리스 palace)다.

그 이유는 팔레와 샤토가 구조적으로 다른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팔레는 라틴어의 팔라티움(palatium)에서 유래하고, 샤토는 라틴어 카스텔룸(castellum)에서 기원한다.

로마의 황제 오귀스트(기원전 63년 – 14년)가 로마의 한 언덕 팔라틴 (Palatin) 위에 자신의 거처를 짓게 했고, 이것이 ‘황제의 궁(palatium)’이 된다. 즉 언덕의 이름 팔라틴 (Palatin)으로 황제의 궁, 팔라티움(palatium)을 표현했고, 이 궁전은 성(城:담, 담으로 둘러싸인 구역)으로 둘러싸여 있지 않았다.

반면, 카스텔룸은 성으로 둘러싸인 도시, 성곽도시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샤토와 팔레는 성벽의 유무가 가장 큰 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세가 끝나고 르네상스가 도래하면서 성벽은 점차 사라지는데,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샤토가 막강한 군주나 영주의 권력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건물로 자리 잡다 보니, 실제로 성벽은 유명무실해졌지만, 그 이름만은 여전히 살아남게 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파리역사박물관(Musée Carnavalet - Histoire de Paris)에 전시된 모형으로 중세시대의 시테성과 시테섬 모습

왕궁 관련 건물들이 샤를 5세가 떠난 이후부터는 재판소의 기능과 그에 딸린 감옥으로 개조된다. 앙리 4세가 암살된 이후에는 화재로 많은 건물들이 소실되기도 했다. 이 구역은 지금도 많은 법률가들이 일하는 구역이고, 옛 건물을 활용해서 쓰고 있지만 공간 부족해서 사르코지가 대통령일 때 이전이 결정되었다.  


왼쪽은 튀르고(Turgot, 파리시장)가 주문하여 1735-1739년 제작한 지도에서 파리 고등법원 (팔레 드 쥐스티스)의 모습이고, 오른쪽은 클리쉬-바티뇰 (Clichy-Batinolles)에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새로운 파리 고등법원 건물 모습으로, 거의 완공 단계에 있고 곧 이곳으로 옮긴다. 파리 외관 순환도로에서 잘 보이는 위치다.  

현재 파리 고등법원 건물에서 일반에게 공개된 부분은 생샤펠과 콩시에르주리 부분이다.

생샤펠은 성인으로 추대받은 왕, 생 루이가 콘스탄티노블에서 예수님의 가시관을 막대한 돈을 들여 사 와서, 가시관을 모실 성물 보관함의 개념으로 당대의 최고의 기술을 동원하고 자원을 동원하여 건설한 왕실 내의 성당이다. 왕실 샤펠의 가장 큰 특징은 위층은 왕과 왕의 가족, 왕족들이 미사를 보는 곳이고, 아래층은 왕궁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미사를 보는 두 층으로 나뉜 것이다. 위층에 비해 아래층은 층고가 몹시 낮다.


생샤펠의 지붕은 예수님의 가시관을 모티브로 형상화했다. 생샤펠은 1241년에 공사를 시작해서 7년 만에 완공된 13세기의 건물이다. 사진의 위층 예배당은 13세기의 기술로는 최첨단으로, 당시에는 유리를 지금처럼 크게 만들 수도 없었고, 입면을 전체 유리로 만들면서 구조적인 해결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중세 건축술의 위대한 업적으로 보는 것이다. 전면이 성경의 구절을 주제로 담고 있고, 생루이의 업적도 스테인드글라스 한 면에 장식되어 있다.   


시테성에서 중세에 지어진 부분이 남아있는 콩시에르주리 부분. 4개의 타워, 넓은 왕의 근위대  대기실, 감옥 등

가장 왼쪽의 사각 타워는 파리에 최초로 세워진 시계탑이다. 중세의 시계탑은 최첨단의 기술이 필요했고, 그래서 돈도 많이 드는 기계였다. 샤를 5세가 만들고, 현재의 모습으로 장식을 한 것은 앙리 3세 때이다.

두 번째 타워는 세자르 탑인데, 로마가 파리를 점령했을 때 시테섬에 세자르가 머물렀던 역사적 사건이 탑 이름에 남은 것으로 해석한다. 그 옆에 붙은 탑은 투흐 다르장(Tour d'Argent)으로 왕의 금고 기능을 맡았다. 맨 오른쪽의 탑은 투흐 봉벡(Tour Bon-bec)인데, 이 탑은 고문장이 있었던 곳이다. 벡 bec은 새들의 부리란 뜻으로 '잘 부는 주둥이' 정도의 불어 표현이다. 고문으로 죄인들이 죄를 술술 불었단 뜻이 담겼다.


왼쪽은 14세기에 최초로 파리에 생겨난 시계탑의 모습이다. 시계의 양옆 조각은 법과 정의의 알레고리(은유) 조각이다. 왼쪽의 법 알레고리는 왕의 권한 중 하나인 '정의의 손' 홀을 잡고 있고, 오른쪽의 정의 알레고리는 저울과 칼을 쥐고 있다.

오른쪽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갇혀있던 콩시에르주리의 감옥을 재현한 것으로, 감시병이 24시간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 감옥은 '귀요틴(단두대)의 전실'이라고 부르는데, 혁명기에 수천 명이 이곳에서 콩코드 광장에 설치된 단두대로 실려가서 처형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3D로 복원한 14세기의 팔레 모습의 동영상 (음성 없음)

https://www.youtube.com/watch?v=akD_nAvD_co


다음에는 중세 초기부터 지어지기 시작하여 오늘날에 이르는 루브르궁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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